[성서의 세계 - 신약] 예수님의 확고한 선언 “나는 …이다” 선언 네 번째 복음서는 더 오래 된 다른 세 복음서, 즉 공관복음서와 거의 모든 면에서 그리고 현저하게 다르다. 대충 읽어보아도 내용의 선택뿐 아니라 선택된 사건에 관한 시각과 형식조차 특별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다양한 표현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들과의 차이점은, 요한 복음에서 공관복음서들과는 어떤 모양으로든 상용하지 않는 예수의 선언들이 부각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두드러진다. 이러한 특징적인 선언들은 “나는 …이다.”라는 독특하고 유명한 형식으로 시작된다. 어떤 저자들이 “나는 …이다.” 선언을 고유한 문학유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려한 표현들은 특히 6장의 성체성사의 빵에 관한 긴 담화에서 발견된다. 이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두 번에 걸쳐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48)라고 단언하신다. 이 말씀의 변형은, 불평하는 유다인들과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 더욱 확장되어 표현되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41. 51)라는 선언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예수께서는 중심인물이 되실 뿐 아니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신다.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요한 6,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러한 선언을 강하게 주장하신다. 안식일에 치유를 하셨기 때문에 유다의 사제들과 선생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고발을 당하시면서도 그분은 다른 “나는 …이다.” 선언으로 공격에 도전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목자의 의무를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나쁜 목자들과 삯꾼들을 강한 선언으로 질타하신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요한 10,7. 9),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4). 이 담화도 분명하게 그분에 대한 나쁜 평판과 불신의 원인이 된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논란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그는 마귀가 들렸소. 그런 미친 사람의 말을 무엇 때문에 듣는 거요?’ 하고 말하였다”(요한 10,19-20).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확언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아주 많은 유다인들을 격앙시킨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기적적인 사실의 경우에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 기적과 기적의 깊은 뜻을 조명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최후의 만찬 뒤에 있은 길고도 잘 구성된 고별담화에서도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진리를 밝혀보이시고 다시 한번 보통 때의 특징적인 표현들을 이용하신다. 그들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과 불신을 뽑아버리시기 위해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이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요한 14,5)라는 질문에 곧바로 이어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지평으로 움직여나가고 전진해 나아가야 할 것을 분명하게 생각하도록 하시는 말씀이다. 비슷하게 예수께서는 제자와 스승과의 일치를 조명하시기 위해 “나는 …이다.” 선언으로 돌아오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이 확언은 단지 귀를 기울이도록 초대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래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는 절박한 호소임이 명백하다. 이 말씀들이 적들에 대해서 갖는 도발적인 특성은 실제로 제자들에게는 숭고한 호소였다. 그렇게 유명한 선언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음조는 고의로 선택된 두 가지 요소 덕분이다. 더 나아가 복음서 저자들의 언어에서 통상적으로 빠지는 “나”라는 주어가 첫째자리에 놓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서 “착한 목자, 참된 생명, 길, 진리, 생명, 세상의 빛, 부활들”처럼 고유한 존재에 대한 자각을 설명하는 부가어가 있다. 어떤 해석학자들은 한때 그리스 세계에서 기원되는 어떤 속성들이라는 의견을 가진 반면에, 오늘날은 분명하게 언급되는 대명사 “나”가 아람어 용법을 가리키며 아마도 예수 자신의 정식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아람어에서 기원되었다는 이러한 암시는 예수 자신에 의해 장엄하게 확언된 다른 “나는 …이다.” 선언에 특별히 기초하고 있고 거기에 새로운 빛을 준다. 세상의 빛에 관한 긴 담화에서 그분은 비록 듣는 이들에게는 신비로울지 몰라도 하느님의 아들이 영원한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는 표현으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위에 놓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같은 담화에서 마찬가지로 심오한 다른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온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요한 8,24), 그리고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8,28). 이 두 가지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계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사야서의 선언들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다. 요한 복음의 옛 번역에서 이 깊고 신비로운 표현은 “내가 ‘그’ 사람”(요한 9,9 참조)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번역에서는 정관사가 빠져있다. 따라서 그러한 제안은 물음에 대한 응답이고, 하느님의 영원성 그리고 사람이 되신 말씀의 천주성을 암시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옳김) [경향잡지, 1995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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