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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우리에게 오실 성령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3,707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신약] 우리에게 오실 성령

 

 

위로자이신 성령

 

그리스도인은 유명한 옛 찬가 ‘임하소서 성령이여’를 부르며 성령께 청한다. 특히 두 시구(詩句)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두 가지 호칭으로 성령께 찬미를 드리고 호소한다. 영예로운 첫 번째 호칭 ‘파라클리토’는 요한복음에서 취해진 것이며, 라틴어역에서든 이탈리아어 역에서든 그리스어 원문을 나타낸다. 어떤 공식 번역서들에서는 그 호칭이 이탈리아 주교회의 성서(CEI 성서)에서처럼(요한 14,16; 15,26; 16,7 참조) ‘위로자’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최근에 ‘위로자’라는 용어는 많은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그것이 초라한 가치를 지니며, 차라리 우는 사람을 향한 자비심이나 작용을 가리킨다고 단언한다. 네 번째 복음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주석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읽어볼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성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신심 깊은 영혼들을 격려해 주어야 하는 ‘위로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스어 ‘파라클리토’는 전혀 다른 일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단어를 분석해 보면, 그것은 둘 다 어떤 수동적인 일, 예컨대 도움을 주기 위해 부른 사람을 가리키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라틴어에서 이 개념은 ‘변호자’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법정에서 고소당한 사람을 보호할 과제가 있는 사람으로 지나치게 그 의미가 축소되어 변호사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정당한 의미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서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라클리토’란 말은 요한의 기록에만 있는 것으로, 복음서에 네 번, 첫 번째 편지에 한 번 나온다. 이러한 본문에서는 법률학과 재판이란 개념이 지배적이다. 파라클리토는 변호자로 이해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거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변호하거나 우리의 소송 사건과는 동떨어진 것을 다루는 변호자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힘이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증거하는 힘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파라클리토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6-17).

 

‘다른 파라클리토’라는 이 선언으로 예수 역시 파라클리토라는 결과가 나온다. 성부 곁에 계신 변호자로서 예수의 과제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분명히 강조된다.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재물이 되셨습니다”(1요한 2,1-2).

 

성령을 명백하게 ‘파라클리토’로 부르는 본문들은 거의 모두가 법정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파라클리토’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파라클리토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요한 16,7-8).

 

이러한 묘사에 상응하여 파라클리토는 그 자체로 하나의 능력이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이러한 그의 증언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사명에 대한 확인이다. 동시에 성령의 증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적대감을 갖는 세상에 대한 단죄다.

 

그 위에 성령은 우리를 보호하고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서 증언하시고 우리 자신을 증인이 되게 하는 증언이시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파라클리토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사도들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순수하게 지적인 양상으로 제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적 증언으로 그들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성령강림의 사실로 분명히 드러난다. 만찬 방의 닫힌 문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대중 앞에 나아가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이러한 파라클리토의 작업은 사마리아의 신자들에게도 되풀이되고(사도 8,17), 베드로가 교회 안에 불러모은 첫 번째 이방인들에게도 되풀이된다(사도 10,44-46). 성령강림 날마다 교회가 온 세상에서 모든 신자들 안에 다시 살아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똑같은 기적이다.

 

사실을 이렇게 고려해 볼 때, 성령은 참으로 고통과 의기소침 속에 있는 신심 깊은 영혼들의 위로자일 뿐만 아니라 천상의 ‘위로자’, 초능력을 지닌 조력자이다. 즉 위로는 필연적으로 슬픔과 눈물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용기있게 증거하기 위한 충실과 모든 어려움에 대한 극복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자’ 또는 ‘파라클리토’란 용어는 그분의 사명을 설명하는 데 더욱 적합하고 선택할 가치가 있는 용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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