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로마로 이송된 바오로 그리스도의 포로 카이로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사하라 평원에 있는 피라미드 답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은 열차로 하였는데, 출발 선로 옆에는 쇠사슬과 수갑으로 묶인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앉아있거나 웅크리고 있었다. 열차 꼬리에 붙어있는, 철망이 씌워진 특별한 차량은 죄수들을 수송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이 근동 특유의 운명적인 체념 속에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몇몇 여인들은 움직일 수 없는 이들 옆에서 흐느껴 울면서 동시에 단순하면서도 과장된 인사를 하며 물러섰다. 경찰의 신호로 쇠사슬은 ‘철커덕’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쇠사슬에 묶인 집단은 특수차량 속으로 끌려갔다. 죄수 가운데 하나는 탈진하여 두 명의 경관이 옮겨야 했다. 그도 다른 동료들과 쇠사슬로 묶여있었다. 그 근동에서 본 죄수 수송은 포로가 되어 가이사리아와 또 로마로 이송된 바오로를 생각나게 했다. 세 번째 선교여행 뒤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오로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성전을 방문하였다. 뜻밖에도 온 도시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들었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소리가 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붙잡아서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자 성전문은 곧 닫혔다”(사도 21,30).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 로마군의 파견대가 개입하였다. 군인들을 거느린 파견대장을 본 군중은 바오로를 때리는 짓을 멈추었다. 파견대장이 가까이 와 그를 체포하고 쇠사슬 둘로 묶게 한 뒤 그가 누구인지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물었다(사도 21,31-33 참조). 그러나 바오로가 층계까지 끌려갔을 때 군인들은 대규모로 몰려든 군중이 뒤따라오며 “그놈을 죽여라!” 하고 외치는 위협에 눌려 그를 어깨에 둘러메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포로로서 이송과 쇠사슬에 묶인 바오로의 새로운 생애의 시작이었다. 떠들썩한 체포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그의 목숨을 앗으려는 음모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바오로의 조카에게 들어갔다. 결국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리아로 이송되었다. 가이사리아는 팔레스티나 주둔 로마 군대의 총병영이 있는 곳으로 안전했다. 명령은 명료했다.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투척병 이백 명을 준비시켜 오늘 밤 아홉시에 가이사리아로 출발하여라. 그리고 말도 준비하여 바오로를 태우고 펠릭스 총독에게 호송하여라”(사도 23,23-24). 쇠사슬에 묶인 채 말에 태워져 수많은 기병대에게 둘러싸인 바오로는 한밤중에 해안으로 이송되었다. 가이사리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그에게는 단 한차례 헤로데 아그리파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의 생생하고 열정적인 설교는 “그대는 그렇게 쉽게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왕의 외침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바오로는 “쉽게든 어렵게든 저는 전하뿐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저와 갈은 사람이 되기를 하느님께 빕니다. 물론 이 쇠사슬만은 제외하고 말입니다.”(사도 26,28-29) 하고 대답했다. 묶인 손을 높이 든 바오로는 왕 앞에 있었고, 마지막 말을 선포할 때 그의 쇠사슬은 소리를 냈다. 가이사리아에서 약 2년 동안 포로생활을 한 뒤 카이사르, 즉 로마 최고 법정에 상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책략과 불의가 계속해서 드러난 바도 있어 바오로는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다. 곧 그러한 호송에 따른 준비가 착수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배에 태워서 이탈리아로 보내기로 결정하였을 때 바오로와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율리오라는 친위대의 한 백인대장에게 넘겨주었다. 마침 그때 아드라미티움에서 온 배 한 척이 아시아 연안의 여러 항구를 향하여 떠나려고 하였으므로 우리는 그 배를 타고 떠났다. 우리 일행 중에는 데살로니카 출신인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르코도 있었다. 이튿날 배가 시돈에 닿았다”(사도 27,1-3). 이송 도중에 죄수들은 목숨이 아주 위태로운 순간을 겪었다. 며칠 동안 항해를 하면서 여러 가지 불운한 일을 겪은 다음 멜리데 근처에 이르러 배는 사나운 폭풍으로 모래톱에 얹혔다. “이물은 박혀 움직이지 않고 고물은 심한 물결에 깨어졌다”(사도 27,41). 그러자 까닭 모를 두려움이 엄습했다. 죄수들은 자신의 목숨이 걱정스러웠다. 흔히 그러한 상황에서 죄수들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죄수들을 죽일 생각을 품었다.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오로를 살리려고 한 백인대장은 군인들이 그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막았다. 나아가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은 먼저 물에 뛰어내려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빤지나 부서진 뱃조각에 매달려 육지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두 무사히 육지로 올라오게 되었다”(사도 27,43-44). 백인대장의 이러한 명령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포로생활을 연장시키는 것이었으나, 호의가 담긴 의견으로 여겨져야 한다. 로마에 도착하자 바오로에게는 포로생활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고, 이 역시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오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사도 28,16). 이러한 표현으로 볼 때 비록 군 경비대 아래 있었지만 사도에게 관대하게 대접했음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바오로가 군대에서 쇠사슬에 묶여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그의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 쇠사슬은 그에게 붙어서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두려움을 모르는 이 사도의 마음에는 무엇이 지나가고 있었을까? 육지와 바다를 달려가는 데 익숙해 있고 어느 한 장소 또는 그가 설립한 교회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머물러있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이제 협소한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바오로는 감옥의 벽에서 나온다. 자신의 교회들에 펀지를 쓰고 그 편지를 통하여 신자들의 집에 다시 들어간다. 에페소 교회에는 이렇게 썼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페 4,1). 그의 친한 친구이며 한때 협력자였던 필레몬에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 바오로는 늙었고 이제는 그리스도 때문에 갇힌 몸으로서 그대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필레 1,8-9). 한때 그의 두 번째 죄수생활이 끝날 즈음 그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고(2디모 4,6 참조) 자신의 고독을 애석해 했으며(2디모 4,11 참조), 그의 사도적 가슴은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아닙니다.”(2디모 2,9)라고 외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감옥에 있다. 그러나 그가 감옥의 담 밖으로 설교한 말은 바오로의 쇠사슬 덕분에 여전히 더욱 빠르게 달리고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7년 5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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