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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가나안 종교의 유혹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4,239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가나안 종교의 유혹

 

 

우리는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성조(聖祖)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거룩한 전쟁”[聖戰]을 통해 몸소 적들을 무찌르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그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해 이스라엘이 그 안에서 살게 해주신 것을 배웠다. 판관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즉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김으로써 주위의 적들한테 공격당하는 벌을 받게 되고, 그들이 구원을 요청할 때마다 하느님께선 구원자인 ‘판관’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선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이 왜 그토록 많은 은혜(에집트에서의 해방, 계약, 광야 인도, 가나안 땅 하사)를 베푸신 하느님을 잊고 여태껏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하던 가나안의 바알 신을 섬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은 왜 앞으로도 계속 이 바알 신을 뿌리치지 못했는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다. 바알 종교가 도대체 어떠한 종교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 보아야만 그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후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우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미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후에도 여러 해 동안 그곳에 살던 토착민이나 주위의 적들과 목숨을 건 전쟁을 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협상 등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계속 몰아대는 한편, 점차 그들을 동맹 관계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더욱 깊은 차원의 투쟁을 치러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적 갈등이었다. 오랜 세계사를 통해서 볼 때,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문화에 지배된 예가 허다하다. 예컨대, 중국을 지배한 오랑캐 무리들이 한(漢) 나라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로마 제국도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를 이어받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에도 이러한 징조가 보였다.

 

원래 생활 배경이 사막이었던 이스라엘은 비옥한 반달 지대의 문화에 심한 반발을 나타내었다. 특히 창세기 2장부터 11장에 이러한 반발이 잘 나타나 있다. 바벨탑 이야기에는 당시 비옥한 반달 지대의 교만한 문화에 대한 비난이 들어 있고(창세 11,1-9), 유목 생활하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농부인 카인의 “땅에서 난 곡식”은 거절되었다는 것(4,1-17)에도 농경 문화에 대한 반발이 들어 있다. 가나안 문화에 대한 이러한 유목민의 반발은 가나안을 정복한 뒤 그 후대에까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아 있었다(예레 35장 참조).

 

가나안 문화에 대한 ‘반발’에 못지 않게 ‘영향’을 받은 것도 많다. 가나안 문화에 매료되어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활 양식을 많이 모방했다.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이스라엘은 그곳에 남은 가나안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야 했다. 때로는 혼종(混種) 결혼도 했다 이방신들을 섬기던 개종자들도 받아들였다. 이렇게 여러 복잡한 상황 때문에 모세 시대의 엄격한 신앙이 일보 후퇴한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설교가 지니고 있는 강한 경고는 - 비록 여러 해 뒤에 쓰이기는 했지만- 가나안 문화의 유혹과 그 위험성 및 동화 작용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반유목민(半遊牧民)으로서 유랑하던 이스라엘이 비옥한 땅에 정착함으로써 심한 변화와 여러 위험을 겪게 된 것이다. 유랑민의 하느님이 이제는 경작해야 할 정착된 땅에 한정된 하느님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땅을 가는 농부의 지대한 관심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 즉 곡식 재배를 위한 풍성한 비, 계절의 변화, 풍요 다산(豊饒多産)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과거 성조들의 야훼는 역사를 지배함으로써 당신의 능력을 과시했으나, 이제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 그러한 위기가 닥친 것이다.

 

한 백성의 멸망은 외부의 군사적 압력보다는 내부의 윤리와 정신의 타락에서 시작한다. 판관기에서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스라엘이 야훼께 일치된 마음으로 충성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2,6-3,6의 도식 참조). 이스라엘의 계약 신앙이 튼튼할 때에는 외국의 문물이나 병력이 밀려와도 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이 비옥한 땅의 혼합주의적인 종교에 밀려 약화될 때에는 곧잘 적군의 희생이 되었다. 남아 있던 여러 부족들의 군사적인 위협(이는 야훼의 의도적인 배려이다.)을 통해서 모세 신앙을 따르게 하고 또 계약의 하느님께 복귀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은 유혹적인 풍요 다산의 종교인 가나안 종교에 흡수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1. 가나안의 종교 : 바알 종교

 

가나안의 종교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종교이다(판관 2,13; 10,6; 1사무 7,4; 12,10). 바알은 ‘주인’ 또는 ‘소유주’라는 뜻으로 땅을 소유하여 풍요 다산을 지배하는 남성의 신이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배우자이다. 고대의 농부들은 토지의 생산성이라는 비결에 대하여 놀라운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비결을 발견함으로써 농경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목축의 경우에는 가축의 수가 느는 것이 분명히 그들의 교미에 따른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농경의 경우에는 그와 다르다. 가나안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지의 축복을 받는 생산성에 대해 놀라움을 품게 되었고, 이 생산력은 결국 대지의 품속에 감추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즉 거기에서는 남녀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의 결합이 이루어지며, 그리하여 물의 공급(비, 샘, 지하수 등)으로 토지는 비옥해지고 많은 생산물이 거기에서 산출된다는 것이다. 탈무드나 나중의 아라비아의 법률 문서에도 인공적인 급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들을 “바알의 들”, 혹은 “바알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든 것이 토양의 결실에 달려 있던 비옥한 반달 지역에서는 그러한 자연의 신비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했던 것이다.

 

땅은 신들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각 지역마다 바알이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한 지역의 바알을 바로 그 땅의 ‘주인’ 아니면 ‘소유주’로 생각했고, 그 땅의 풍요는 바알과 그 배우자 사이의 성적(性的)인 관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소극적으로 신들의 결혼을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신들의 관계를 모방하여 인간 남녀가 신성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신들과 하나가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신들의 출산력에 직접 기여하게 되었다. 다사 말하자면 사람들은 이러한 바알의 성관계를 의식을 통해 재연함으로써 자연의 번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의적(祭儀的)인 매음 행위가 가나안 종교 의식의 특징을 이룬다(신명 23,18 참조).

 

남자는 바알과, 여자는 아스다롯과 동일시되어 선전에서 매음 행위를 벌인 것이다. 이렇게 남녀가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이들 두 신을 결합시켜 풍요 다산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토양의 결실에 의존하는 농부들은 성적인 의식을 통해 농경 세계에 주기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아가서 이러한 종교적인 마법을 통해 주기적인 계절의 변화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신들의 행위를 모방하면 그러한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자연계에는 봄과 여름, 다산과 기근, 생명과 죽음 같은 변화가 있다. 고대인들은 농부의 생활은 이 자연의 변화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이란 불안한 것이었다. 그들은 종교를 통해 자연의 세력을 지배하여 풍성한 수확을 보장받고자 했다. 말하자면 신전에서 바알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화적인 드라마를 재연함으로써 그 마술적인 힘을 통해 풍산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왔던 그 당시에 이렇게 여러 가지로 토지와 결부된 풍요 다산의 신에 대한 신앙이, 당시의 농경 생활에 관련해서 인근 국가에도 퍼져 있었다. 좀더 발달한 문화를 가진 ‘수리아’ 문화권에서는, 개성이 없는 바알들이 ‘바알’이라는 인격적인 신으로 변신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 바알은 관개(灌漑)가 잘된 지방의 중심에 있는 도시의 신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하늘에 있으면서 비를 내리는 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의 신은 우가릿(Ugarit)에서 나온 신화의 본문에서 볼 수 있으며, 거기에서는 이 신이 페니키아 시대의 폭풍의 신인 하닷(Hadad)으로 알려진 바알과 동일시되어 있고, 그의 이름은 또한 얄리얀(Alijan)이라고도 불린다. 그 본문을 읽어 보면, 이 얄리얀의 신은 ‘깊은 샘의 주인’이라고 불리며 지하의 깊은 곳에 살고 있으며, 또한 하늘의 주인으로서 ‘구름의 수문(水門)을 여는 자’이다. 또한 이 신은 그의 부신(父神)인 엘(El)과 같이 황소 모양을 하고 있으며, 여신(女神)을 사랑해 그 사이에 송아지를 낳는다고 한다. [경향잡지, 1993년 12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성서의 세계 - 구약] 역사에 계시하시는 살아 있는 하느님

 

 

2. 혼합주의의 등장

 

가나안에 진입한 히브리 유목민들이 알게 된 것은, ‘바알’ 신들이란 그곳 원주민들이 갖고 있던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를 가진 신이라는 것이다. 이 신들은 가나안 땅의 오아시스 가운데 살고 있으며, 조그마한 암시로도 그 신들을 볼 수가 있으며, 또한 ‘모든 무성한 나무 밑에서’ 부부신(夫婦神)들은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이 신들은 바로 거기에 있었고, 그들이 바로 농지의 ‘소유자’인 바알이었다. 따라서 땅을 경작하는 일에서 사람들은 바알에게 의존하였으며, 바알의 뜻을 좇아 섬기지 않으면 사람들은 성공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바알을 다시 잊지 않았고 또한 잊을 수가 없었다. 이 같이 가나안의 종교는 농부들에게 실용적인 종교였다. 바알은 농사에 필수적인 비를 주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가나안의 방식에 따라 풍산의 신인 바알을 섬기지 않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결실도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농경 생활에 경험이 없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의 풍요의 신들에게 의지하려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조상들과 출애굽의 하느님인 야훼께로부터 등을 돌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주위에 적이 공격해 올 때에는 ‘야훼’께 의지하고, 농사를 지을 때에는 ‘바알’에게 의지하려 했다. 즉 야훼와 바알을 번갈아 섬기려 했다. 한때에 간혹 종교와 정치를 서로 다른 분야라 생각하듯, 그들도 신마다 활동 영역이 다르다고 여겼다. 그들은 공식적인 종교와 가정 및 농사를 위한 종교를 따로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이 두 종교가 모순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바알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농경 상의 증산을 위해 불가피한 종교적인 조치인 듯하다. 이유는 유목민의 신, 또는 전쟁의 신으로서 야훼는 이제껏 농사에 관여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농경 방면에 힘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배에서도 대중의 이 두 신앙을 공존시키려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산의 여신인 아스다롯의 상(像)들을 지니고 있었고, 가나안 종교의 신화와 의식이 야훼 예배에서도 사용되었다. 베델이나 세켐같은 가나안의 성소(聖所)들이 야훼께 재봉헌되고, 가나안의 농사력 (農事曆)이 이스라엘의 축제 시기를 정하는 데에 사용되었다(출애 34,22-23). 이스라엘 자녀들의 이름도 바알의 이름을 따서 지어지곤 했다. 예컨대 기드온의 별명이 ‘여룹바알’ 이고, 사울의 두 아들들의 이름이 ‘머피바알’과 ‘이스바알’이고, 요나단의 아들 이름이 ‘머리바알’(2사무 21,8; 4,4; 9,6; 1역대 8,34)이고, 다윗의 딸의 이름도 ‘브엘랴다’였다(1역대 14,7). 기원전 8세기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를 바알이라 부르고, 풍산을 얻기 위해 바알 종교의 의식에 따라 야훼를 섬겼다고 한다(호세 2장). 이러한 혼합주의 즉 이질적인 종교 형태와 결합이,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시작되었다.

 

적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에는 지방 신인 바알 신들의 제단을 파괴하는 것만으로(판관 6,28) 일시적으로 만족하였다. 해방을 위한 적과 싸움이 선언되면 다만 야훼만이 현실의 신이 되고, 바알은 곧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평화가 회복되어 일상의 농경 생활로 돌아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의지하였기 때문에, 야훼로서는 각 농경지에 거주하고 있는 바알들에게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야훼께서 이 농경 생활 방면에서도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면, 옛날 출애굽 사건 등에서 나타난 위대하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동시에 사실상 ‘뭇민족들’의 주님이요 ‘모든 면’에서 주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성적(性的)인 신이 되는 등 야훼의 고유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가나안의 농경 생활은 그 전승이 성적인 신화나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것을 떠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야훼는 그러한 타협을 허용하지 않으시며, 본성상 그분은 성(性)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모든 자연 생활과 같이 성도 야훼의 힘으로 성화(聖化)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 자체 그대로는 신성한 것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점에서 그분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원래래 어떠한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는 ‘질투하는’ 하느님에 대한 독특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계약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야훼 앞에서 어떠한 신도 섬길 수 없다. 야훼의 주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적인 것으로서 생활 영역 전체에 미쳐 있다. 그러므로 ‘야훼’는 이 부분(역사)의 주인이시고, ‘바알’은 저 부분(땅의 비옥)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근본적으로 계약 위배이며 유일하고 지존하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후대의 예언자들도 야훼나 바알,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외쳤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택하라.”(여호 24,15)고 시켐에서 여호수아가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야훼는 생활 전체의 주인이시며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혼합이나 절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알 종교는 비옥한 반달 지대의 불안정한 환경에서 안정을 도모하려는 이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수단이었다. 야훼는 풍요 다산을 관장하는 신이기는 하지만, 바알과 같이 자연계의 변화에 따라 죽고 사는 신이 아니다. 야훼는 자신을 역사에 계시하시는 ‘살아 있는’ 하느님이시다. 바알 종교에서는 신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라고 가르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백성에게 부여한 임무를 다하기 위해 하느님을 ‘섬기라’고 강조한다. 야훼는 마술 따위로 지배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야훼를 믿거나 배반하거나, 그분에게 순종하거나 불복할 수는 있어도 그분의 주권만은 변함없다. [경향잡지, 1994년 1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성서의 세계 - 구약] 바알과 대결하는 야훼

 

 

3. 바알 저항 운동

 

호세아에게 와서 처음으로 야훼와 바알의 혼합에 대한 무서운 위험을 경고하게 되었다. “바알과 대결하는 야훼”라는 표어는 서부 셈족의 농경 생활의 종교적 바탕을 뒤흔들었다. 물이 땅과 만난다는 증산의 비결인 성적인 관심은 제거되어야만 했다. 토지가 자연의 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의 요소가 여성의 요소 속으로 들어가는 성적인 결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풍작의 주인이시고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이다.

 

솔로몬 왕이 시돈 출신의 아내를 위하여 시돈의 아스다롯의 제의(祭儀)를 허용함으로써 바알 숭배가 공적으로 묵인되기 시작했고(1열왕 11,1.5.8), 아합 왕은 시돈 출신의 아내인 이세벨을 위하여 시돈의 바알의 제의를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아합 왕은 아내의 종교인 바알 종교를 자국 내에 방관하였음은 물론, “바알에게 가서 그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1열왕 16,31). 그 일로 아합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왕)의 의무를 태만히 하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이 바알 종교를 거슬러 최초로 싸운 예언자는 엘리야이다. 그는 아합 왕의 통치 기간(기원전 875~853년)에 주로 활동했다. 그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들려 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1열왕 19,21). 이렇게 그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파견되었다(14-18절).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났으며(21,17 이하), 거기에서 그는 야훼의 뜻의 선포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 책망하는 태도를 취했다(21,18). 즉 그는 참다운 지배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왕에게 부과된 의무를 태만히 한 죄를 고발하고, 이 불충실한 신의 대리자를 질책하였다. 엘리야에 대한 설화에는 그 서두의 한발의 이야기,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비를 내리게 하는 이야기 등(17장 이하)이 들어 있다. 이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알이 천상의 물과 지상의 번식력에 대해서 아무런 지배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야훼와 바알 둘 가운데 하나만이 옳고 둘 가운데 하나만이 참다운 신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신이건 힘을 보여 주는 신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실패했으나, 야훼는 큰 비를 내리셨다(18,45). 이제 바알아 아니라 야훼가 물을 내리시는 하늘의 신이요, 물을 흡수하여 소출을 내는(창세 1,12) 대지의 신으로 실증되었으며 그렇게 선언되었다.

 

이렇게 토지가 가진 풍요 다산의 비결을 바알에게서 빼앗아서 유목민의 신인 야훼가 이제는 옛날의 특성 - 전투와 구원하는 신의 모습 - 을 잃지 않은 채 농민의 신이 되고, 대지의 정당한 소유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호세아가 말한 것처럼(2,8), 지상의 농산물은 바알과 그 배우자 사이의 성적인 관계의 결과가 아니라, 한 분의 신이신 야훼의 은혜라고 한 것은 여기서 바로 실증되었다. 사람들은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바알의 성적인 마술의 힘은 깨어졌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 소수 왕궁의 사람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바알을 따랐으나, 그 후의 역사에 따르면 엘리야가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인 예후(1열왕 19,16)의 명령으로 바알 신봉자들은 바알의 궁에 초대되었다가 한꺼번에 모두 학살당하였다(2열왕 10,18-27). 후대의 전설에 따르면 이 학살은 엘리야의 뜻에 따라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1열왕 18,40). 남부 유다 왕국에서도 당분간은 바알 예배가 박멸되었다(2열왕 11,18).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개혁이나 혁명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바알 종교가 성했으며, 이는 계속 예언자들의 경고의 대상이 된다.

 

예후의 바알 추종자 섬멸 때에 그에게 협력한 자로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2열왕 10,15.23). 이 사람은, 유다 왕국의 중요한 후대의 기사(記事)에 따르면(예레 35,6), 그의 아들들에게 그들이 살 집도 못 짓게 하고, 파종할 논밭도 이루지 못하게 하고 포도원도 가꾸지 못하게 하며, 언제까지나 천막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그들은 반동적 또는 혁명적이라는 말을 듣지만, 이들이 지키고 있었던 종교적 전통의 바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야훼는 광야의 신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유로운 유목민의 생활 양식에서만 야훼를 올바르게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레갑인들은 야훼의 주권을 본래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유목민적 이상이었다.

 

엘리야는 유목민으로서 그 신을 섬겼지만 유목민의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농경지의 주권자인 바알의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즉 천상의 물 역시 야훼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밝히 보이는 것이었다. 땅의 주인은 바알아 아니라 야훼였고, “구름을 타는 자”(시편 68,4)는 바알이 아니라 야훼였음을 보여 주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꿰뚫어 보았으며, 두 신은 서로 근본적으로 배치됨을 알았다. 인생의 의미를 자연계의 신들에게서 찾느냐 아니면 역사의 주인인 야훼께로부터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모세 신앙의 참된 힘과 독창성을 깨닫기까지는 여러 세대가 걸렸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바알 종교의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된 이후부터 문제가 된다(역사서, 예언서).

 

바알 종교는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여전히 현존해 있다. 이스라엘에게는 바알이 농사의 신, 풍요 다산의 신이었듯이, 오늘날의 바알은 물질(돈)의 신, 권력의 신이다. 오늘날에도 이 돈과 권력이라는 ‘신’의 유혹은 대단히 강하다. 이를 신처럼 절대시하고 공경할 위험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러기보다는 하느님만을 섬기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이 은혜로이 주시는 것으로 여기고 고마워할 줄 아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이다. [경향잡지, 1994년 2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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