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열왕기 1. 개관 열왕기는 기원전 560년경 바빌론 유배 생활 중에 마지막으로 엮어졌으며, 기원전 965년경부터 560년경까지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그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용의 요점은, 이스라엘 왕조의 멸망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데, 그들이 야훼와 맺은 계약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범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최종 편집자인 신명기 학파는 여러 가지 사료들을 이용해 이 책을 구성했다. 2. 내용 열왕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통치(1열왕 1-11장). 둘째, 두 왕국의 흥망 성쇠(1열왕 12장-2열왕 17장). 셋째, 살아 남은 유다 왕국(2열왕 18-25장). 각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한 사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통치(1열왕 1-11장) 상권 1장부터 2장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윗은 만년에 후계자를 지명해야 했는데,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파와 솔로몬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의 인위적인 노력이 컸으나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왕위 계승에 관해서는 2사무 9-20장도 참조). 3장 1절부터 15절에서는 솔로몬이 무엇보다 지혜를 요구하자 하느님께선 이를 기꺼이 허락하시고, 16절부터 28절에서는 솔로몬이 이 지혜를 발휘해 두 여인 사이의 시비를 해결한 내용이 나온다. 4장 l절부터 28절은 솔로몬의 조직적인 자질에 관해서, 29절부터 34절은 다시 그의 뛰어난 지혜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5장에서는 성전 건립 준비와 띠로의 왕 히람과 맺은 계약에 대해, 6장에서는 성전 건립에 대해, 7장은 궁전 건립과 성전의 비품에 대해, 8장은 성전 봉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9장은 야훼께서 솔로몬한테 충실할 것을 요구하신 내용(1-9절)과 솔로몬의 통치에 관한 몇 가지 사항(10-28절)에 관한 것이며, 세바 여왕의 방문(10,1-13), 솔로몬의 영광과 상업적 성공(14-29)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솔로몬의 잘못은 많은 아내와 첩을 봐서도 알 수 있는데, 그의 이방 출신 아내들은 이방 신(異邦神) 숭배라는 위험을 가져온다(11,1-13). 이같이 솔로몬의 변절에 대한 야훼의 처벌이 뒤따른다(11,14-43). 나. 두 왕국의 성쇠(1열왕 12장-2열왕 17장) 솔로몬이 죽은 뒤 그의 후계자인 르호보암 때에 북부 부족들은 유다에서 떨어져 여로보암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다(12,1-20). 이어 두 왕국 사이에 전투가 예언되고(21-24절), 여로보암은 정치적 이유에서 단과 베델에 송아지 숭배를 위한 성소(聖所)를 만든다(25-33절). 13장에서는 이에 대한 경고, 베델 파괴, 여로보암의 아들의 죽음 그리고 에집트 왕 시삭의 유다 침공에 관해서 말해 주고 있다. 아비얌이 유다를 통치한 뒤(15,1-8), 그의 아들 아사가 통치하게 되고(9-24절),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이스라엘을 2년 동안 통치했으나 바아사한테 암살된다(25-32절). 이어 바아사의 통치(15,33-16,7), 그의 아들 엘라의 통치(16,8-14), 엘라를 살해한 지므리의 통치(15-22절), 오므리의 통치(23-28절), 아합 통치에 대한 서론(29-34절)이 이어진다. 17장부터 18장은 아합 왕과 엘리야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서이고, 19장은 엘리야가 사막으로 피난한 것과 엘리사의 부름에 관해서이다. 20장에서 22장은 야합 왕의 행적과 전투 그리고 그의 죄와 몰락에 대해서이며, 이어서 여호사밧의 유다 통치(22,41-50)와 아하지야의 이스라엘 통치(51-53절)에 대한 언급으로 열왕기 상권은 끝난다. 열왕기 하권 1장은 아하지야와 엘리야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2장은 엘리사의 계승과 행적에 대해서, 3장에선 여호람과 여호사밧이 엘리사의 예언대로 모압을 쳐 성공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4장에서는 엘리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기적에 관해서 상세히 말해 주고 있다. 5장은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와 이 병이 엘리사의 종 게하지한테 옮은 사건에 대해서, 6장부터 7장에선 엘리사와 시리아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8장에서는 수넴 여인에 관한 이야기(1-6절), 하자엘이 시리아의 왕이 되리라는 엘리사의 예언(7-15절), 유다의 여호람 통치(16-24절)와 그의 아들 아하지야의 통치(25-29절)에 관한 요약으로 되어 있다. 9장부터 10장에서는 혁명가 예후가 왕위에 옹립된 일과 그가 아합 가문을 숙청한 사건에 관해서 다루어져 있다. 유다의 아하지야가 죽자 그 어머니 아달리야가 왕위를 잠시 쥐었다가(11,1-3절), 그녀의 손자 요아스가 곧 왕이 되어 유다를 통치한다(11,4-12,22). 13장은 여호아하즈의 이스라엘 통치(1-9절), 그의 아들 여호아스의 통치(10-13절), 엘리사의 죽음(14-21절), 여호아스의 시리아에 대한 승리(22-25절)로 구성되어 있다. 14장은 유다 왕 아마지야에 관해(1-22절),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통치(23-29절)에 관한 기사로 되어 있다. 15장은 여러 왕에 대한 내용으로 우찌야의 유다 통치(1-7절), 즈가리야의 이스라엘 통치(8-12절), 살룸의 이스라엘 통치(13-15절), 므나헴의 이스라엘 통치(16-22절), 브가히야의 이스라엘 통치(23-26절), 베가의 이스라엘 통치(27-31절), 그리고 요담의 유다 통치(32-38절)에 관해서이다. 16장은 아하즈의 유다 통치에 관해서이다. 17장은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내용으로, 호세아의 이스라엘 통치와 사마리아의 함락(1-6절), 이스라엘의 죄 요약(7-23절), 아시리아가 사마리아에 여러 이방 민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한 사건(24-42절)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다. 살아 남은 유다 왕국(2열왕 18-25장) 이 부분에는 히즈키야의 통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다. 즉 그의 전례 개혁(18,1-8), 사마리아 함락(18,9-12), 산헤립의 유다 침공(18,13-19,37)이 그것이다. 20장은 히즈키야의 병과 그의 회복(1-11절), 바빌론 사절단의 방문(12-21절)에 관해서, 21장은 므나쎄의 그릇된 정치(1-18절)와 그의 아들 아몬의 통치(19-26절)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22장은 요시아 왕의 법전(法典) 발견에 관해서, 23장 1절부터 25절엔 그 법전에 따른 광범위한 개혁 사업에 관해서, 23장 26절부터 30절엔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이어서 여호아하즈의 통치(23,31-35)와 여호야킴의 통치(23,36-24,7)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나머지 내용은 유다의 몰락에 관해서인데, 여호야긴의 잘못된 통치로 유다는 곧 바빌론에 함락되어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가게 된다(24,8-17). 마지막 왕인 시드키야의 통치 중에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된다(24,18-25,7).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성전과 도시가 약탈되고 파괴되며(25,8-17), 백성의 지도자들이 처형된다(18-21절). 이스마엘이 유다 총독인 게달리아를 죽인 사건은 유다의 종말을 초래하게 되었다(22-26절). 끝으로 약간의 희망이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빌론 왕이 이스라엘 왕 여호야긴을 궁중 손님으로서 친절히 대우한다는 것이다(27-30절). [경향잡지, 1994년 7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3. 구성 열왕기에는 그 구성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몇 개의 기원 사료(起源史料)가 분명히 내재해 있고 이들은 일정한 틀로 결합되어 있다. 고대 근동 문학과 같이 열왕기 개개의 문학 단편들은 많은 개개의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 집단적인 저자의 작품이다. 독립적인 사료 모음과 편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 구성 틀 이스라엘과 유다 왕에 대한 보고는 서론과 결론 양식의 틀로 짜여 있다. 이 틀의 어떤 부분은 이전의 왕과 관계해서 나타나지만(1열왕 2,10-12, 11,41-43; 14,19-20), 그 완전한 형식은 르호보암의 경우에 가서야 나타난다(1열왕 14,21-31). 서론부 양식(1열왕 14,21)과 결론부 양식(29-31절)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제 유다를 다스렸다. 르호보암은 통치를 시작했을 때 마흔한 살이었고 그는 십칠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암몬인 나아마였다”(21절). “르호보암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유다의 왕조 실록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르호보암은 조상들과 함께 죽어 다윗 도시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 그의 아들 아비얌이 그 대신에 다스렸다”(29-31절). 이와 동일한 서론과 결론 양식은 유다 왕들에 대한 보고의 틀로 사용된다(1열왕 15,1-8. 9-24; 22,41-50). 이스라엘 왕의 경우엔 등극했을 때의 나이나 그 어머니의 이름이 이 양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1열왕 15,25-32; 15,33-16,7; 16,8-14). 서론부 또는 결론부 또는 양자 모두가 어떤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컨대 예후의 혁명 때에 살해된 요람과 아하지야의 경우에는 결론부가 없고(2열왕 9,22-28), 아달리야의 경우에는 양자 모두 없다(2열왕 11장). 그 당시에는 철저한 연대기(年代記) 체계가 없었기에, 저자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시기 측정에 동시적인 연관 방법을 쓰고 있다. 그래서 한 왕에 관한 서론부 양식에서 다른 왕과 연관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즉위 18년에 아비얌이 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했다”(1열왕 15,1). 또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유다 왕 아사 즉위 2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했다(25절). 이러한 비교식의 시대 측정은 맞지 않는 때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 측정 방법은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나. 신명기적 판단 이 틀의 또 하나의 특정적인 요소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에 대한 판단이다. 이 판단은 신명기적인 관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르호보암은 다음과 같이 단죄된다. “유다 백성도 역시 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 선조들보다도 더 큰 죄를 범하여 야훼께 미움을 샀다. 그들 역시 높은 언덕과 우거진 나무 아래마다 신당을 짓고 거기에다 돌로 남신을 만들고 나무로 여신을 만들어 세웠다. 게다가 전국 곳곳에 남창이 우글거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지기들 면전에서 쫓아내신 원주민들의 온갖 추악한 폐습을 이렇게 본받았던 것이다”(1열왕 14,22-24). 이스라엘의 왕 르호보암에 대한 이러한 단죄는 예배의 단일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신명기의 가르침과 잘 부합된다. 예배의 순수성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 신명기계 저자는 예배를 한 곳으로 집중시킬 것과 예배 장소인 언덕들과 기둥들과 아쉐림의 파괴를 요구했다(신명 12,1-3. 29-31). 유다의 왕에 대한 판단은 히즈키야(2열왕 18,3-7)와 요시아(2열왕 22,2) 경우에만 정도에 과도할 정도로 긍정적인데, 그것은 이들이 신명기의 법이 요구한 대로 언덕에서 지내던 제의(祭儀)를 폐지하고 전반적으로 예배를 개혁했기 때문이다. 아사(1열왕 15,11-14)와 여호사밧(1열왕 22,43)과 요아스(2열왕 12,2-3)와 아자리아(2열왕 15,3-4)와 요담(2열왕 15,34-35)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한정적이다. “그는 부왕 우찌야가 그러했듯이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산당(언덕)은 여전히 남겨 두었으므로 백성들이 그 산당에서 번제를 드리고 향을 피웠다”(2열왕 15,34-35). 유다의 다른 모든 왕들은 그들이 야훼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였다는 일정한 양식으로 모두 단죄되고 있다(2열왕 8,18.27; 21,2. 20). 그런데도 저자는 성전 건립 이전에 지방의 산당(언덕)에서 드린 경배는 합법적이라고 생각했다. 열왕기를 편집한 신명기계 편집자는 산당(山堂) 이외에 북쪽의 사당(私堂)들도 특별히 야훼의 뜻에 위배된다고 비난하고 있다. 여로보암은 북부 지파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베델과 단에 사당을 세운 데 대해 보고하고 있다(1열왕 12,26-33). 이들 북부 순례 사당들은 끊임없이 “여로보암의 길” 또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함으로써 그가 범한 죄(1열왕 15,26. 34; 16,19)이라고 일컫는다. 이 척도를 적용함으로써 한 달만 통치한 살룸을 제외하고 모든 이스라엘 왕은 야훼의 눈에 바른 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단죄받는다(1열왕 15,26. 34; 16,25).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단죄는 이레만 다스린 지므리(1열왕 16,19)와 예후(2열왕 10,29-31)한테까지 나아간다. 어떤 왕은 이방 신에 대한 경배 때문에 더욱 비난받는데, 이는 여러 가지로 일컫는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2열왕 16,3) 또는 아합 가문의 길(2열왕 8,21)이 그것이다. 유다의 여호람(2열왕 8,18), 아하지야(8,27), 아하즈(16,2-4), 므나쎄(21,2-9), 아몬(21,20-22)과 같이 이스라엘의 아합과 그 아들 아하지야는 다른 신에 대한 숭배 때문에 단죄된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신명기 학파의 신조(信條)를 발견할 수 있다. 4. 여러 가지 기원 사료 열왕기는 여러 가지 사료를 이용하여 편찬된 편집물이다. 신명기 학파의 최종 편집자들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동원해 자신의 역사 작품을 편찬하게 되었다. 가. 솔로몬의 행적기 열왕기 상권 3장부터 11장에 나오는 솔로몬 설화 끝부분의 “솔로몬의 나머지 행적, 그가 행한 모든 것, 그리고 그의 지혜는 솔로몬의 행적기에 쓰여 있다.”(11,41)는 언급은 상실된 솔로몬 행적기의 성질을 평가하는 데 좋은 정보가 된다. ‘솔로몬의 지혜’라는 말에는 폭 넓게 전설적인 요소와 민담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그 예로 솔로몬이 꿈속에서 야훼께 지혜를 청한 일(1열왕 3,4-15),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1열왕 3,16-28), 어려운 질문으로 그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 세바 여왕의 방문(1열왕 10,1-10)을 들 수 있다. 편집자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전설적인 자료 이외에도 동시대 목록을 썼다. 그 예로 솔로몬 궁의 관리 목록(1열왕 4,1-6)과 지방 관리의 목록(1열왕 4,7-19; 5,7-8)을 들 수 있는데, 이 자료는 원래 궁전의 고문서고(古文書庫)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다. 성전 건립과 그 비품에 관한 묘사는 성전 문서고에서 나온 듯하다(1열왕 6장; 7,15-31).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에 대한 묘사(1열왕 4,20-26; 5,9-14),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띠로 왕 히람과 동맹 체결(1열왕 4,15-32), 성전 건축용 목재를 위해 솔로몬이 히람 왕과 거래한 일(1열왕 9,10-14), 국내의 여러 가지 건축 사업과 강제 노동 동원에 관한 보고(1열왕 9,15-24), 그리고 솔로몬의 상업적 성과에 관한 기록(1열왕 9,26-28; 10,11-12)은 고문서고에서 취한 자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같이 솔로몬의 행적기는, 왕의 지혜와 영광을 더욱 드높이기 위해, 약간의 전설적인 자서전적 정보를 내포한 문서고 자료를 후대에 모은 것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건전하고 확실한 역사적 보고(報告)와 전설이 이 혼합 작품에 섞여 있다. 나. 이스라엘 왕의 연대기 이 기원 사료는 저자의 결말부 양식에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 사료가 맨 처음 언급된 것은 여로보암 1세와 관계해서이고(1열왕 14,19), 맨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은 페카의 통치에 관한 마지막 설명 부분에서이다(2열왕 15,31). 이 사료는 통틀어 열일곱 번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요람, 예후 혁명의 희생자, 또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에 관한 보고들은 이러한 틀에 박힌 듯한 언급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사료는 지므리의 경우에는 그가 행한 음모(1열왕 16,20), 아합의 경우에는 그가 세운 상아집, 그가 세운 모든 도시들(1열왕 22,39), 요아스의 경우에는 유다 왕 아마지아와 싸운 그의 힘(2열왕 13,12)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 언급은 사료의 연대기적 성격을 나타내 주는데, 이 사료는 아마도 모든 왕의 기억할 만한 모든 사건을 포함했고 궁전 문서고에 보관되었다. 이들 연대기는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얼마 전인 기원전 724년경에 완성되었다. 다. 유다 왕의 연대기 이 기원 사료는 르호보암의 통치에 관한 결말부 양식에(1열왕 14,29) 맨 처음 언급되었고, 여호야킴의 그것에 맨 마지막으로 언급되어 있다(2열왕 24,5). 이 사료는 통틀어 열다섯 번 언급되어 있다. 어떤 유다 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아하지야, 여호아하즈(2열왕 23,31-34), 여호야긴(2열왕 24,8-17), 시드키야(2열왕 24,18-25,21) 경우에, 그들의 죽음에 관해서 원래 언급이 없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열왕기의 편집자는 왕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 틀에 박힌 양식(1열왕 14,31 참조)을 적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들의 경우에 전체 결말부 양식을 의문으로 남겨 둔 것이다. 아사의 건축 행위(1열왕 15,23), 여호사밧의 전투(1열왕 22,45), 히즈키야의 저수지와 수로 건설(2열왕 20,20)에 관한 언급은 분명히 이 사료의 연대기적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 연대기는, 이스라엘 왕의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궁정 연대기이며 예루살렘의 왕실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었다. 유다 연대기의 마지막 장은 기원전 590년경에 쓰여졌다. [경향잡지, 1994년 8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5. 다른 기원 사료들 열왕기에는 신명기계 편집자가 사용하고 언급한 이들 세 가지의 연대기적 기원 사료 이외에도, 그가 사용한 다른 사료도 분명히 있다. 가. 다윗 궁전 설화 열왕기 상권 1장부터 2장은 사무엘 하권 9장부터 20장에 보존된 다윗 궁전 회고록의 직접적인 계속이다. 전자는 후자와 똑같은 문학상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문체상의 솜씨와 다루고 있는 사건들도 서로 비슷하다. 이 설화는 기원전 10세기 후반의 산물이다. 나. 엘리야계 사료들 엘리야 이야기는 열왕기 상권 17장부터 19장과 21장 그리고 열왕기 하권 1장에 나타나 있다. 이 엘리야권 사료는 북부 설화집에서 유래한 듯하다. 엘리야 이야기의 보존과 전달은 분명히 북부 예언자 집단에서 한 것이다. 이 사료는 역사적인 사료였는데, 차차 예언적인 전설로 변형되어 간 듯하다. 다. 엘리사계 사료들 열왕기 하권 2장부터 13장에 나오는 엘리사 이야기는 엘리야권 사료에서 유래하는 전승과는 독립된 전승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문학적 표현과 종교적 관점이 두드러지게 차이 나기 때문에 동일한 저자가 엘리야 이야기와 엘리사 이야기를 모두 썼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두 전승이 일반적으로 동일한 환경에 속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병행 구절(예컨대, 1열왕 17,8-16과 2열왕 4,1-7; 1열왕 17,17-24와 2열왕 4,18-37)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라. 아합 사료 엘리야 사료의 연속을 중단시키고 있는 아합 이야기(1열왕 20장; 22,1-38)는 아합을 묘사하는 데 전자와 판이하다. 아합 이야기는 시리아 전쟁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으며(1열왕 20,42), 시리아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적대감으로 인해 엘리야와 엘리사권 사료와 구분된다. 이 아합 이야기는 아합과 무명 예언자 사이의 논쟁(1열왕 20,35-43), 그리고 아합과 임라의 아들 미가(1열왕 22,5-28)의 논쟁을 다루는 북부 왕국의 예언자적 전승과 결부되어 있다. 아합의 시리아 전쟁 묘사가 상세하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이는 기원전 9세기 후반이나 8세기초에 쓰여진 것이다. 엘리야, 엘리사, 아합 사료는 북부 왕국의 운명과 북부의 예언자적 전승에 공통된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데, 이는 이들 사료들이 북부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마. 이사야 사료 히즈키야 통치에 관한 서론부와 결론부 사이에 자리한 내용(2열왕 18,1-12; 20,20-21)은 이사야 사료라고 지칭될 만한 문학적 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이사야 예언자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이다. 이 사료는 이사야 설화의 독립된 모음에서부터 열왕기에 편입된 것이다. 이 체계는 18장 14절부터 16절을 제외하고 이사야서 36장부터 39장과 내용이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성서 학자들이 일치하는 바는, 이들 이사야 설화는 열왕기에서부터 이사야서에 이식되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설화의 전체 체계는 이사야 제자들 가운데서 예루살렘에서 기원해서 동일한 예언자적 집단에 의해 전수되었고, 7세기 중엽에 기록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바. 예언자적 사료 열왕기에는 하나 이상의 이런 사료가 있다. 신명기계 편집자가 독립적인 전승을 그의 저서에서 이용했을 때에 - 이는 신명기적 사상과 비슷한 점이 말해 준다 - 아직 구전 전승의 과정을 거치고 있던 예언 전승을 그는 자기 저서에 이용했다.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1열왕 11,29-39; 14,1-18)과 그 실현(12,15; 15,29)은 신명기계 편집자의 교훈적인 경향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고 있다. 스마야의 예언자적 발설(1열왕 12,21-24)도 동일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요시야의 이름까지 아는(1열왕 13,2) 무명의 예언자가 베델의 제단을 단죄한 이야기(1열왕 12,32-13,34)는 베델에서 행한 아모스의 단죄적인 예언(아모 7,10-16; 9,1)을 회고해 주고 있다. 또는 이 이야기는 신명기적 사상에 부합된 베델에 관한 후기 지방 전승(2열왕 23,16-20 참조)일지도 모른다. 무명의 인물이 행한 또 다른 예언은 므나쎄를 단죄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잘 알고 있다(2열왕 21,7-15). 그 문학 형식을 보면 신명기계 저자의 필치를 분명히 찾아낼 수 있다. 6. 신명기적 편집 열왕기 체계의 저자는 분명히 신명기적 사상의 영향 아래에 있다. 누가 이 체계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전체 작품의 사상도 좌우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들어 있는 사상과 목적이 일관성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체계의 사상이 신명기적이라면, 우리는 열왕기를 편집한 인물이 신명기적 편집자 또는 저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단 한 사람의 선명기계 편집자라고 가정한다면 설명될 수 없는 약간의 모순점이 있다. 예를 들면 하권 22장 20절, 23장 29절부터 30절, 상권 8장 8절과 다윗 왕조에 관한 상권 9장 21절, 11장 36절, 하권 8장 19절을 들 수 있다. 이 예에 따르면 한 신명기계 편집자는 기원전 609년의 요시아 왕 죽음 이전이고, 다른 한 신명기계 편집자는 기원전 550년경에 작업했다고 볼 수 있다. 두 편집자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유배 기간 중에 한 사람의 신명기계 편집자에 따른 것으로서, 그는 신명기 1장에서부터 열왕기 하권 25장까지 전체적으로 작업했다는 이론도 있다. 두 편집자 이론이 열왕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점을 더 만족스럽게 해결해 준다. 7. 열왕기의 목적 열왕기의 편집자는 예루살렘 성전만을 유일하고 합법적인 성소라고 인정하면서, 예배의 단일성과 순수성을 강조한 신명기적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왕을 단죄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네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인 송아지 숭배에 모두 관여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신학적 동기에 따라 그는 지방의 신당(神堂)과 언덕[山堂]을 파괴하지 않은 유다의 왕도 단죄했다. 그러나 예배의 단일성을 변호하지만 그는 예배의 형식주의자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예배란 거룩한 백성의 전체 삶에 나타나야 하는 이스라엘의 주님에 대한 충성심의 한 표현이다. 신명기계 편집자는 이 문학적 작품을 세속적인 사료 편찬이 아니라, 주께서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다루시는 역사로 여겼다. 편집자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강한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오므리 같은 중요한 왕(적어도 세속적인 기준에서)에 대해서 다만 여섯 절(1열왕 16,23-28)로 다루고 있다. 편집자는 예언자들을 역사에서 주님의 대변자로 간주했고, 따라서 엘리야, 엘리사권의 예언 설화를 열왕기에 다량 넣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합 사료도 저자의 흥미를 돋우었는데, 이는 그것의 객관적인 역사적 설화로서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예언적인 의미 때문이었다. 분명히 선명기계 편집자의 작품은 서구의 어떠한 세속 또는 교회의 역사적 작품과도 비교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저자 눈앞의 목적이 과거 사건을 보고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동시대 사람한테 훈계나 경고로써 과거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거룩한 백성의 변절과 반복되는 시련과 처벌을 자꾸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을 ‘회개’와 ‘참회’로 이끌었고, 그리고 모든 백성이 주님께 대해 충실함으로써 국가를 존립시켜야 함을 부르짖었다. 신명기계 저자의 작품은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예로 사용하는 긴 ‘설교’와도 같다. 열왕기는 교훈뿐만 아니라 ‘격려’도 한다. 그 반복되는 경고와 약속에 대한 전체적인 표현을 통하여, 열왕기는 미래를 위해서 과거와 현재의 공동체의 삶에 대해 재고해 보게 한다. [경향잡지, 1994년 9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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