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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신명기적 역사서의 메시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6,279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신명기적 역사서의 메시지

 

 

기원전 8~7세기의 예언자들, 예컨대 아모스, 미가,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은 독특한 방법으로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의 현실을 천명해 놓았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현재의 죄악을 폭로하였으며, 과거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활동에 비추어 지금의 죄를 폭로했다.

 

그 결과 그들은 역사의 흐름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말은 그 당시 세계의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활발한 예언 운동의 결과로 6세기에 거대한 역사서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로 구성되어 있는 이른바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이다. 이 여섯 권의 역사서들은 모세 시대로부터 바빌론 유배 기간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 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신명기 학파의 긴 역사서를 읽으면서 그것이 선포하려고 하는 본래적이고 핵심적인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6세기 중엽에 이스라엘이 처한 철저한 재난 속에서,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가 선포한 원래의 의도는 무엇이며 자기의 동시대인들한테 그토록 거대한 작품을 통하여 무엇을 증언하려고 했는가? 신명기적 역사서의 본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1. 최종적인 심판(?)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한데 대한 벌로서 국가 멸망의 가능성을 예시하였는데(특히 제28장의 저주 부분), 그것이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에서 이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신명기가 전제한 사물의 질서는 그 최종적인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적 역사서가 제시하는 역사 전체의 본래적인 관심사는 이처럼 사물의 질서가 끝나버리는 ‘종말’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래의 희망에 대한 여지는 전혀 없다. 정반대로 그 심판은 “분명히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그 어떤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성서 대목을 들 수 있다.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하신 계약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면, 야훼의 분노가 여러분 위에 미칠 것이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야훼께 받은 이 기름진 땅에서 멸절하고 말 것이오”(여호 23,16; 참고 : 신명 4,25-28; 1사무 12,14 이하. 25; 1열왕 9,8-9; 2열왕 17,23; 21,14-15).

 

신명기계 역사서는 실로 “역사 안에서 야훼 말씀이 어떻게 작용했느냐 하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신명기의 저주의 말씀과 예언자 위협의 말씀들과 함께, 구원의 약속에 대한 다른 종류의 말씀도 거기에 들어 있다 - 후자는 나단의 신탁에 포함되어 있는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호야긴의 용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신명기 역사서의 최종 부분에 와서(2열왕 25,27 이하) 그 저자는 “야훼께서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기회”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이 부분에 따르면, 유배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선포한 의로운 심판과 위협의 성취였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만이 신명기계 역사서의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독자들이 그것을 넘어 다윗한테 한 구원의 약속이 언젠가 역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하기를 이 저자는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서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서가 이스라엘 역사의 종말만을 묘사한다는 견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 신명기 역사서는 그의 동시대인들한테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2. 해답에 대한 접근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통하여 일관성 있게 나타나 있는 관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모세, 여호수아, 판관들 그리고 사무엘 시대를 상세하게 다룬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왜 독자들이 몇 세기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여러 사건들의 기록에 휘말리게 하는가?

 

가. 판관 시대

 

판관들의 그는 역사를 다루려 할 때 벌써 우리한테 답을 제시해 있다. 그는 배신이 여호수아 시대 직후에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에 많은 중점을 두고 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야훼를 섬겼다”(판관 2,7). 그러나 땅을 정복하자마자 반역이 시작된다. 여기에 그는 호세아의 역사관(반역 - 간음)에 의지하고 있다.

 

그는 몇 가지의 불충실한 경우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야훼의 면전에서 악을 행하고 바알을 섬겼다.”(판관 2,11)는 것을 태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조상을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조상의 하느님 야훼를 저버리고, 주위 백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며 절하여 야훼의 노여움을 샀다. 그들은 야훼를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야훼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이스라엘이 적에게 침략을 받아 노략질을 당하게 하셨다. 또한 둘러싸고 있는 원수들 손에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은 도저히 원수들과 맞설 수가 없었다”(판관 2,12-14).

 

신명기 역사서에 따르면, 나라 전체의 반역과 야훼의 타오르는 분노는, 북왕국의 종말을 초래했고 또한 므나쎄 시대에는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도 결정지었다(2열왕 17,15-18; 21,2-15; 23,26).

 

그렇다면 왜 그때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이 심한 곤경에 빠지면, 야훼께서는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곤 하셨다. …… 야훼께서는 원수들에게 억눌려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엾게 생각하셨던 것이다”(판관 2,16. 18).

 

이전에 당신 백성을 그들의 적한테 넘겨주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신 야훼 바로 그분께 ‘부르짖는 것’ 이것이 배반과 야훼의 타오르는 분노의 결과를 취소시킨 셈이다.

 

판관들의 시대에 늘 구원 행위 다음에는 세세대대로 새로운 배반이 뒤따랐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왜 계속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야훼께 다시 간청했고 야훼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셨기 때문이다.

 

배반과 야훼께로 돌아옴 즉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러한 형식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야훼는 역사에 새로운 왜곡을 정해 놓으신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약속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온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여호수아가 채 몰아내지 못하고 죽은 민족들을 이 백성 앞에서 결코 몰아내지 않으리라. 그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리라. 이 백성이 조상들처럼 내가 가르쳐 준 길을 명심하고 바로 가는지 시험해 보리라”(판관 2,21-22).

 

가나안인들과 ‘공생’(共生)은,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가 보기에는, 오랜 기간 동안 불순종한 결과로써 오는, 야훼께서 역사 안에 세우신 새로운 규정이다(판관 3,4 참조).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새로운 규정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야훼께서 당신이 세우신 구제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전쟁에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10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남산동본당 신부)]

 

 

나. 왕정 시대

 

이렇게 판관들의 시대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로부터 분명히 분리된다. 또한 후에 왕들의 시대도 판관들의 시대와 분명하게 분리된다. 사무엘 상권 12장에 나타나 있는 사무엘의 거창한 고별사는 이러한 왕들의 시대와 판관들의 시대 사이의 차이를 힘차게 강조하고 있다. 판관들은 이스라엘의 기도 때문에 야훼께서 보내 주신 구제자들이다. 그러나 왕들이란 이스라엘 자신이 야훼의 뜻에 도전적으로 반항하면서 요구한 인물이다. 이러한 백성의 요구는 야훼의 주권 자체에 반대되는 것인데, 신명기 역사서는 이것을 판관들 시대의 결론으로 간주한다(1사무 12,10-13; 참조 : 판관 8,23; 1사무 8,7). 야훼에 대한 이러한 반역의 결과로 거룩한 부족 동맹 체제라는 옛 계약 질서는 깨어지게 되었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1사무 8,10 이하). 이스라엘은 주위의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왕을 모신 국가가 되려 했다.

 

이러한 계약의 하느님께 대한 반역 - 판관들 시대의 배반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에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야훼께서는 겸손되이 당신 말을 듣고 몸소 이스라엘에 왕을 세워 주신다(1사무 12,13). 사실 그분은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시고 동시에 야훼의 이름이 거처할 장소로 예루살렘을 선택하신다(1열왕 8,16). 이들 두 규정은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이며, 그것은 야훼의 왕권을 이스라엘이 반항적으로 거부한 데에서 온 결과이다.

 

그런데 역사의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판관들 시대의 절서와 마찬가지로 고난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사무엘 상권 12장 14절부터 15절에 나오는 일련의 사무엘의 고별사는 이 사실을 보여 있다. 이스라엘은 그의 왕과 더불어 야훼께 복종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도록 경고받는다. 밀 수확 때에 뇌우를 당하고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깨닫는다(1사무 12,17-18). 그때 이스라엘은 야훼께 중재해 달라고 사무엘한테 간청한다.

 

“당신의 하느님 야훼께 기도 드려, 당신의 종인 우리들이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이미 저지른 죄도 모자라 왕을 세워 달라는 못된 짓을 더 하였습니다”(1사무 12,19).

 

이스라엘은 자신의 종말이 당연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도움을 간청하자 사무엘은 그들한테 구원을 확신해 준다.

 

“두려워하지 말라. 비록 너희가 못할 일을 했지만…… 야훼께서는 너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높으신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를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1사무 12,20-22).

 

구원 역사는 - 비록 이 역사는 잠시 동안 정지하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 백성의 반역과 야훼의 심판으로 야기된 재앙 속에서조차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야훼께 대한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으로 인해 심판이 다시금 취소된다. 이런 취소는 판관 시대와 거의 마찬가지로 여기(사무엘 시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백성의 울부짖음은 야훼께서 자기들한테 동정 어린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이다. 야훼의 이러한 자비를 체험하고서 이스라엘은 야훼의 규정들을 준수하고자 새로이 다짐하게 되고, 또한 그들은 자신의 구원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다. 유배 시기

 

신명기 역사서 저자의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의 세 번째 마지막 단계(왕정시대) 즉 국가 존립이 끝나게 된다. 므니쎄 왕의 배반 이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유다(선택된 도시요 하느님의 이름이 거하는 집인 예루살렘을 포함해서)도 또한 버림받으리라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2열왕 21,12-13; 23,27). 그런데 이제 이루어졌고 또한 결정적인 것이라 보여지는 이 심판은 취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만일 백성들이 회개하면 심판이 다시 취소되리라 생각지 않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가가 보기에,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최종적인 심판을 행사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전히 끝장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물론 과장하는 셈이다. 이 심판이 특별히 준엄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 왕국, 유다 왕국, 나아가 선택된 도시까지 버림받는다. 그러나 이전의 역사에서처럼 야훼의 백성을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규정들을 다시 지닌 완전히 새로운 상태가 올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신명기 역사가는 역사의 저 아래까지 내려가 이러한 일련의 심판 취소들을 계속 제시하고 있을까?

 

만약 판관기 2장과 사무엘 상권 12장을 믿어야 한다면, 희망의 여지가 있다. 죄의 고백과 구원을 바는 기도와 기꺼이 새로운 순종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동반하는 그러한 야훼께 대한 부르짖음은 다시금 효과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11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남산동본당 신부)]

 

 

3. 야훼께 돌아감

 

이러한 권고가 신명기 역사서의 진정하고 실제적인 메시지이기에, 그것은 역사의 주요 교차점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위대한 여러 연설 어디에서나 분명히 나타나 있다.

 

판관기 2장 11절 이하와 사무엘 상권 12장이 우리한테 말해 주었지만, 계속되는 구원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야훼께 돌아가는 것이다. 사무엘 상권 12장에서 이 ‘돌아감’은 사무엘이 행한 권고의 말씀의 결과이다(14-15절). 사실상 신명기 역사서의 의도를 감지하게 해주는 중요한 거의 모든 구절들에서 우리는 ‘돌아감’이라는 주제를 발견한다. 다른 한편 다른 어떤 곳에서도 ‘희망’에 대한 격려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벌써 사무엘 상권 7장 3절에 있는 사무엘의 말에서 ‘돌아감’이라는 표제어를 볼 수 있다.

 

“너희들이 야훼께 진심으로 돌아오려고 한다면 너희 가운데서 다른 신들과 아스다롯을 버려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야훼께 돌아와 오로지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면 그가 너희를 불레셋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주시리라.”

 

이스라엘은 순종하고 따라서 불레셋의 억압에서 구원된다. 이스라엘 국가의 종말에 대해 잠시 묵상하고 있는 열왕기 하권 17장의 결정적인 대목에서 역사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예언자들과 선견자들을 통하여” 하신 야훼의 메시지를 ‘돌아오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하고 있다.

 

“너희들은 그 악습을 버리고 돌아와 나의 계명과 규정을 지켜라. 내 종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 조상에게 전한 법을 그대로 지켜라”(13절).

 

돌아오라는 외침 그리고 선조들과 맺은 계약도 무시당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도래했다. 이 최종적인 심판을 초래한 것은, 전적인 배반이라기보다는 돌아오라는 초대를 경멸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비록 심판은 벌써 포고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돌아감’은 심판을 돌이킬 수 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 사실을, 그에게 이스라엘 전역사에서 가장 총명한 인물로 보이는 요시아 왕의 경우를 들어 밝혀 주고 있다.

 

“요시아처럼 야훼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2열왕 23,25).

 

요시아 왕은 야훼를 한번도 배반하지 않은 그런 성실한 이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약속의 말씀에 신뢰하는 이로도 묘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바로 ‘돌아가는 이’로만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돌아감’이란 주제는 신명기적 역사 서술의 정점의 순간들에 나타나며, 그럼으로써 이 주제는 여러 예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유배 생활의 심판 아래서 무엇을 듣고 행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준다.

 

신명기 역사서는 이스라엘이 심판의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한 구절인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때의 기도에 잘 언급되어 있다. ‘돌아오라’는 표제어는 이 기도에서 적어도 네 번 나타난다. 먼저 열왕기 상권 8장 33절과 35절에 “이스라엘이 나에게 죄지었기 때문에” 원수한테 패배하거나 또는 가뭄을 겪을 수 있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두 경우 모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이 나온다.

 

“만일 그들이 당신께 돌아와 이 전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고백하며 당신께 기도하고 애원하거든, 하늘에서 들으시고 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35).

 

두 경우 모두 확인해 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판관기 2장 1절과 사무엘 상권 7장과 12장 그리고 간접으로는 열왕기 하권 17장과 23장 25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돌아옴’은 배반으로 말미암은 심판이 일어날 때마다 주어지는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유배로 인해 파괴된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시점에서도 그러한 명령이 통용되는가? 성전 봉헌 때의 기도는 여기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정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만일 이 백성이 당신께 범죄하여… 당신이 노하시어 원수에게 넘겨주시면 이 백성은 먼 나라, 가까운 나라에 잡혀 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로잡혀 간 적국의 땅에서라도 뉘우치며 ‘우리는 죄인입니다. 못할 짓을 하여 죄를 얻었습니다.’ 하고 당신께 애원하거든, 그들이 적국의 땅에서 참 마음과 뜻을 다 쏟아 당신께 돌아오고, 당신께서 선조들에게 주신 조국 땅과 당신께서 뽑으신 이 성읍과 소인이 당신의 것으로 지어 바친 이 전을 바라보며 빌거든,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애원을 들어주소서”(1열왕 8,46-53).

 

이 구절은 두 가지 이유로 신명기 역사서의 실제적인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물음에 아주 중요하다. 첫째, 이 구절은 전환점, 다시 말해 이스라엘 역사의 세 번째 중요한 단계의 서론부에 자리하고 있다. 둘째, 이 구절에서 신명기 역사서는 이제 이스라엘을 엄습하는 심판에 대한 그의 관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는데,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이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분명히 다루고 있다. 신명기 역사서가 이러한 형태로 ‘동트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면 바로 이 구절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명기 역사서는 큰 재앙이긴 하지만 이 심판과 파괴와 유배를 최종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스라엘은 이 처벌을 정당하고 희망 없는 것으로 인종(忍從)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 번째로 다시금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즉 야훼께 부르짖음이 다시 한번 필요하다는 것이다. 죄의 고백과 이에 따른 야훼의 정의에 대한 인정은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48절)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정당한 것으로 보는 지나간 역사의 최종적인 종말을 지적하는 것만은 아니다. 뒤이어 나오는 얘기에 강조를 두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명확한 희망이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야훼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에 귀기울이시고 이스라엘은 뭇민족들 가운데서 “야훼의 백성이요 소유”(51절)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순간의 계명은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야훼께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되돌아감’은 여기에서도 구원 역사의 새로운 단계 변화로 여겨진다.

 

 

4. 야훼께 돌아감의 성격

 

신명기 역사서가 선포한 ‘돌아옴’이란 어떻게 이루어져야 했을까 하는 문제를 우리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 그것은 기도를 통해 전적으로 야훼께 향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판관기 2장 16절과 3장 9절, 사무엘 12장 19절, 열왕기 8장 47절은 이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는 죄의 고백, 구원을 간청함, 그리고 새로운 순종을 드릴 각오가 내포되어 있다.

 

나. 이러한 ‘돌아옴’은 “모세의 가르침을 따라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예언자들의 거듭된 충고에 귀기울이는 것을 포함한다. 열왕기 하권 23장 25절의 요시아의 예와 열왕기 하권 17장 13절에 나오는 예언적 설교의 요약이 이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특히 사무엘 상권 7장 3절과 열왕기 하권 23장 24절에 나타나 있듯이, 무엇보다 모든 이방신들을 완전히 제거할 것을 뜻한다. 신명기 4장 30절과 30장 2절, 8절, 10절에 따르면 ‘되돌아옴’과 ‘야훼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다. 이 ‘돌아옴’의 특성은 비제의적(非祭儀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돌아감’이란 제의적으로 양이나 염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와 관계없다. 또한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은 본질적으로 오직 ‘기도’하는 장소이지 그곳에 ‘가까이 가는 것’을 결코 요구하지는 않았다 유배 중에는 그곳 방향으로 향하는 것으로 족했다.

 

신명기 역사서는 근본적으로 기도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 야훼의 말씀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신명기 역사가들은 구원 역사 즉 희망적인 역사에 대해 광범위하고 아주 끈기 있게 묘사함으로써 자기 동시대인들을 ‘돌아옴’으로 교육시켰다. 야훼께서 아직 잊지 않으시는 조상들의 계약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유배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고통의 시기에 이 ‘돌아옴’은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이같이 신명기 역사서는 구원 역사의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긴급한 초대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의 우리한테도 유효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12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남산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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