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이름짓기
“레아는 아들을 낳고,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리라.’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다.”(창세 29,35)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지었다. 반면에 신약성서 시대에는 사내아이일 경우, 여드레째 되는 날에 할례를 베풀면서 작명하는 것이 관습으로 굳어진 것 같다(루가 1,59; 2,21). 그리고 아버지가 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성(性)은 따로 없이, ‘누구의 아들(또는 딸)’이 그 구실을 하였다. 예컨대 이사악의 온전한 이름은 ‘이사악 벤 아브라함(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만으로도 그를 가리킬 수 있다. 이름을 짓는 가장 간단한 방식은 동물의 이름을 쓰는 것이다. 야곱의 부인 ‘라헬’은 ‘어미양(羊)’(창세 29,6), 유명한 여판관 드보라는 ‘꿀벌’(판관 4,4), 예언자 ‘요나’는 ‘비둘기’(요나서), 사울의 후궁 ‘아야’는 ‘독수리’(2사무 3,7), 이스라엘인들이 에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유다 지파의 대표였던 ‘갈렙’은 ‘개(犬)’(민수 13,6), 다윗의 부인이 된 아비가일의 아버지 ‘나하스’는 ‘뱀’(2사무 17,25), 다윗의 또 다른 부인인 ‘에글라’는 ‘암소’(2사무 3,5), 유다 왕국 요시아의 대신 ‘악볼’은 ‘쥐’를 뜻한다(2열왕 22,12). 드물기는 하지만 나무 이름도 인명으로 사용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 가운데 하나인 즈불룬의 아들 ‘엘론’은 ‘참나무’(창세 46,14), 즈불룬의 형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야자나무’(창세 38,6), 1역대 4,7에 나오는 ‘코스’는 ‘가시나무(덤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동식물의 이름을 쓰는 일을 기원전 587-538년의 유배 이후에는 볼 수 없다. 이스라엘인들은 본디 자연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은 반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짐승이나 나무가 지녔다고 생각하던 특성이나 자질을 아기들도 가졌거나 가지기를 바랄 때, 그 이름을 아기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아기가 태어날 때의 사정이나 정황에 따라 이름을 짓기도 하였다. 야곱의 두 부인 레아와 라헬은, 아기를 낳지 못하면 몸종까지 동원하여 경쟁적으로 아들들을 낳고서는, 자기들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이름을 짓는다(창세 29,31-30,24).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기의 괴로움을 주님께서 보아주셨다고 하면서, 첫아기의 이름을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의 ‘르우벤’이라고 짓는다. 라헬도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셉’과 관련해서는 두 전통이 전해진다. ‘(하느님께서 내 불임의 수치를) 치워주셨구나’라는 의미와, ‘(주님께서 나에게 아들을 더) 보태주셨으면!’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라헬은 아들 하나를 더 낳으면서 죽고 만다. 그러면서 그는 아기 이름을 ‘벤-오니(내 고통의 아들)’라고 짓는다. 그러나 야곱은 이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벤야민(오른손/쪽의 아들)’으로 바꾼다(창세 35,16-19).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아기의 상태나 행동에 따라 이름을 짓기도 한다. 이사악의 부인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을 낳는다. 선둥이는 태어날 때에 온몸에 털이 많아서, ‘에사오(털투성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동생은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해서, ‘발뒤꿈치’의 뜻을 지닌 ‘야곱’이라고 불리게 된다(창세 25,24-26). 그러나 ‘야곱’은 ‘남의 자리를 뺏다, 기만하다’라는 뜻과 관련되기도 한다(창세 27,36). 때로는 아버지가 처한 상황이 아기의 이름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아들을 얻고,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 하면서, ‘게르(이방인)’를 넣어 ‘게르솜’이라 부른다(출애 2,22). 또 출생 당시의 사건에 따라 아기 이름이 지어지기도 한다. 하느님의 계약궤를 모신 실로 성전의 책임자 엘리의 며느리는, 계약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갑작스러운 진통 끝에 아들을 낳는다. 그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구나.” 하면서, 아기 이름을 ‘이가봇(영광은 어디에?)’이라 하고는 숨을 거둔다. 여기서 ‘영광’은 계약궤를 가리킨다(1사무 4,19-22).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지을 때,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가리야’라 부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자, ‘당신 집안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면서 의아해 한다(루가 1,57-61). 이렇게 주로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나 증조부나 삼촌의 이름을 택하는 관습이 구약성서 후대에 시작해서, 예수님 시대에는 관습처럼 된 것으로 여겨진다. 구약성서 말기에 들어서면서, 유다인들도 당시 근동의 공통어인 아람말을 점점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에 따라 바르톨로메오(마태 10,3), 마르타(루가 10,38), 바라빠(마르 15,7), 다비타처럼(사도 9,36) 아람말 이름도 쓰인다. 기원전 300년대 후반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근동 지역에 거세게 불어닥친 그리스 문화와, 이어서 예수님 시대에는 이미 확고히 자리를 잡은 로마 제국의 영향이 유다인들의 이름에도 나타나게 된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유다 땅을 다스린 살로메-알렉산드라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요한-마르코처럼(사도 12,12), 유다식 이름에 그리스나 로마식 이름을 덧붙인다. 또 ‘예수’나 ‘마리아’처럼 히브리말 이름을 그리스말식으로 바꾸기도 한다. ‘예수’는 ‘여호수아(야훼님께서는 구원이시다)’의 단축형 ‘요-수아’를 그리스말로 옮긴 것이고. ‘마리아(또는, 마리암)’는 ‘미리암(뜻은 분명하지 않음)’을 그리스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테오도토스’처럼(2마카 14,19) 유다식 이름(마탄야)을 그리스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인들의 이름과 관련해서 가장 큰 특정은, ‘하느님’이나 그분의 이름을 넣어 작명하는 것이다. 이런 이름이 수적으로도 가장 많다.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을 뜻하는 ‘엘’이나, 그분의 이름인 ‘야훼’의 단축형에 명사나 동사 또는 형용사를 보태서 이름을 짓는다. ‘야훼’는, 이름 앞에서는 ‘요’나 ‘여호’, 뒤에서는 ‘야’나 ‘야후’로 준 형식을 취한다. ‘요’와 ‘여호’, ‘야’와 ‘야후’는 히브리말에서도 혼용된다. 예컨대 다윗의 친구는 ‘여호-나단’과 ‘요나단’으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르머-야후’와 ‘이르머-야’로 쓰인다. 우선 ‘마따니-야’나(2열왕 24,17) ‘마따니-야후’처럼(1역대 25,4) ‘명사 + 하느님의 이름’으로 짓는 방식이 있다(우리말에서는 순서가 계속 거꾸로 된다). 이 두 이름은 태어난 아기가 ‘주님의 선물’이라는 믿음을 뜻한다. ‘마탄’처럼 ‘주님의’가 생략된 형식도 같은 뜻의 이름으로 쓰인다(예레 38,1). 또 ‘아도니-야(야훼께서는 주님)’처럼(2사무 3,4), 자기들의 하느님이신 야훼님에 대한 신앙을 표시하는 이름도 있다. ‘야훼님께서는 하느님’이라는 뜻을 지닌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1열왕 17장 이하). 다음으로는 ‘형용사 + 하느님의 이름’ 형식이 있는데, ‘토비-야후(야훼께서는 선하시다)’와 이것의 준말 ‘토비-야’가 여기에 속한다(느헤 2,10; 2역대 17,8). 이러한 ‘합성 이름’ 가운데에서 가장 흔한 형태는, 하느님이나 그분의 이름 앞이나 뒤에 동사를 덧붙이는 것이다. ‘엘리-사마’는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다’(민수 1,10), ‘엘리-야킴’은 ‘하느님께서 일으켜 세우실지어다’ (2열왕 18,18), ‘여호-사밧’과 그 단축형 ‘요-사밧’은 ‘야훼님께서 판결을 내리셨다(또는, 내리신다)’를 뜻한다(1역대 11,43). 그리고 ‘야자니-야’는 ‘야훼님께서는 귀를 기울이실지어다’(예레 35,3), ‘아하즈-야후’는 ‘야훼님께서 (손에) 쥐셨다’는 뜻을 지닌다(1열왕 22,40). 이런 형식에서도, ‘하느님’이나 그분의 이름을 생략한 채 동사만 가지고 같은 뜻의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곧 ‘나단’도(2사무 7,2) ‘여호-나단’과 ‘요-나단’처럼 ‘야훼님께서 주셨다’를 뜻한다. 그런데 ‘야훼’를 넣어 이름을 짓는 방식은 기원전 587년의 유배를 고비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점차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특히 예언자들의 설교로, 야훼님께서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면서, 구태여 하느님을 야훼님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하느님’을 뜻하는 ‘엘’이 들어간 이름이 점점 많이 쓰이게 되었다. 성서의 사람들은 이런 이름으로, 하느님에 대한 고백과 신뢰, 감사와 원의를 표현하였다. 이름이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지속적인 신앙 고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름을 짓는 것이 그저 관습적인 일일 수도 있지만, 고통이나 신앙 쇄신의 시기에는 이름의 내용이 더욱 생생한 뜻을 지니게 된다. [경향잡지, 1997년 1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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