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수숙혼(嫂叔婚)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복음서에 보면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 “모세가 정해준 법에는(직역 : 모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하고 살다가 자식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칠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태 22,24-28) 이 말을 들으면서 많은 이들에게는 부활의 문제가 아니라, ‘이 무슨 희한한 법인가?’라는 의아한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 혼인이 이땅의 관습이나 도덕으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마다 독특한 관습과 풍속이 있을 뿐더러, 그것들이 민족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대로 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하고 들어가야 하겠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법’은 신명기 25,5-10을 가리킨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하나가 혼인을 하고서도 아들없이 죽을 경우, 시숙이 그 죽은 형제의 아내와 혼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가 여럿이면 윗아들부터 순서가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나는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는다. 그런데 시숙이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 할 경우, 죽은 형제의 아내는 마을 법정에 호소한다. 그러면 원로들은 그 사람을 불러다가 타이른다. 그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그 과부는 자기의 의무 이행을 거부하는 자에 대한 모욕의 표시로 시숙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자기 형제의 집안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하고 말한다. 이 말에 따라 그 시숙은 ‘신 벗긴 자의 집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 이러한 예외 규정은 이 수숙혼이 이의없이 실행되지는 않았음을 반영한다. 기피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레위기 20,21에서는 형수나 제수와의 혼인이 엄격히 금지된다. 이 금령은 형이나 동생이 살아있을 때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숙혼 자체를 금하는 계명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규정에 대한 특별한 히브리말 용어는 없고, 서양말에서는 일반적으로 라틴말의 ‘시숙’을 써서 ‘시숙 혼인(또는 시숙혼)’이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부에서 ‘수혼법(嫂婚法)’이라고 한다. ‘수’는 형제의 아내를 가리킨다. 그래서 ‘수혼법’은 ‘형수나 제수와 혼인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시숙 혼인’이나 ‘수혼법’이라는 용어에는 혼인하는 한 쪽만 들어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다행히 한자말에 ‘수숙(嫂叔)’이라는 말이 있다. ‘형제의 아내와 남편의 형제’라는 뜻이다. 그래서 ‘혼인할 혼(婚)’을 붙여 ‘수숙혼’이라고 하면, 한자말이어서 이해의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신명기의 규정에 정확히 들어맞는 용어가 된다. 그리고 ‘수숙혼’에 ‘법’이라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본디 이 규정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민족에 퍼져있던 관습이었다. 그것이 다른 민족들에서도 비슷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신명기에 하나의 규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에, 구체적 형벌이 아니라 모욕만 받게 된다는 사실에서도, 이 수숙혼이 관습의 성격을 계속 강하게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는 수숙혼이 실제로 이루어진 두 경우를 비교적 상세히 전해준다. 그런데 이 두 경우가 신명기의 규정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므로 구약성서의 수숙혼을 둘러싸고 분명하지 않은 점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첫째 경우는 창세기 38장에 나온다. 야곱의 아들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아내 다말만 남겨놓고 죽는다. 그래서 에르의 동생 오난이 다말과 동침은 하지만 임신은 시키지 않다가 그 벌로 죽고 만다. 불상사가 또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한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면서 막내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막내가 다 컸는데도 수숙혼을 시켜주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관계를 맺고 임신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다는 며느리를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다말은 유다 자신이 아기의 아버지임을 넌지시 알린다. 사정을 깨달은 유다는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하고 실토한다. 다말과 유다의 육체 관계는 그 한 번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에서도 수숙혼이 가장의 주관 아래 행해지는 관습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남편의 자손을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수숙혼에는 본디 시아버지까지 포함되었는지, 아니면 이 경우는 예외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다말이 추구한 것은 시숙과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얻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관습의 본디 목적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가서야, 아들을 얻을 때까지의 한시적 관계가 아니라 혼인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성서가 전하는 둘째 수숙혼에서는 사정이 또 달라진다(룻기). 훗날 다윗 임금의 할머니가 된 과부 룻에게는 시숙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혼인하는 이는 시집 쪽의 친척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수숙혼과 ‘구원자 제도’라는 것이 뒤섞인다. 이 ‘구원자’는 룻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남편의 땅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사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룻과 혼인해서 “고인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룻 4,10). 룻의 경우에는 이렇게 남편의 후손만이 아니라 재산도 문제가 되는데, 수숙혼으로써 두 문제가 해결된다. 수숙혼은 이렇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수숙혼의 목적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가문의 대를 잇고 재산을 보호하며 과부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구약성서에서는 이 셋 가운데에서 첫 번째 것이 단연 중요한 목적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수숙혼은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중시하였던 종족 보존의 한 방식이었다(창세 1,28 참조). 양자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수숙혼은 양자 제도에 비해서 더욱 적극적인 면을 지닌다. 단순히 남의 아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인에게 가장 가까운 피붙이가 고인의 아내와 함께 고인을 위해서 아들 하나를 새로 낳는 것이다. 수숙혼은 옛 관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이를 무시하였고, 유다인들도 지금은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성서를 접하는 우리에게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제 이 관습이 지닌 의의와 목적,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던 이들의 진지함과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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