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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사무엘: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3-10)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7 조회수4,328 추천수2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3-10)

 

 

이스라엘의 왕정을 태동시킨 인물은 사무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과 남북 두 왕국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임금인 다윗을 기름부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사무엘이 태어날 때 그의 부모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는 전에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사무엘 자신이 하느님께 소명을 받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구약성서 새번역) 3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이었는데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다.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거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거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거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때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9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실로에 만남의 천막을 세우고 그곳에 모여 하느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렸다. 하느님의 계약궤도 실로에 있었다. 그 시절 실로의 사제는 엘리였고, 소년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서원에 따라 이 엘리 사제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에게는 고약한 아들들이 있어 제사를 바친 뒤에 제물 봉헌자에게 돌아갈 고기를 가로채고, 심지어 하느님께 번제로 바쳐야 할 고기까지도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남의 천막 어귀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도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소문이 이미 주님의 백성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마침내 그들의 아버지 엘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엘리는 아들들을 불러 나무랐지만, 아들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쯤되면, 아들들을 중징계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겠건만, 엘리는 자식들의 악행을 그대로 방치하였다. 엘리가 너무 늙어 판단력도 결단력도 다 잃어버린 상태였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시고 그 집안을 멸망시키실 뜻을 품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엘리 집안 사람들과 달리 “어린 사무엘은 주님과 사람들에게 귀염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1사무 2,26).

 

하느님의 중재자로 나서야 할 엘리 사제의 가문이 이토록 주님에게서 멀어져있던 탓인지,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1사무 3,1). 이런 상황인 만큼, 엘리 밑에서 주님을 섬기던 사무엘도 주님을 아직 체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로한 스승 엘리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계약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 안쪽 성소에서 잠을 자고 있던 사무엘에게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엘서 저자는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이었다고 그 시간대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동트기 전 이른 새벽을 말한다. 본디 만남의 천막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은 해가 지면서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 성소에 기름 등불을 켜놓아야 했던 것이다. 사무엘은 자기를 부르는 이가 엘리인 줄 착각하고 그에게 달려가, “저를 부르셨는지요?” 하고 물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너를 부른 적이 없다.” 하고 그를 성소로 돌려보냈다. 주님과 상통이 거의 끊겨버린 엘리는 설마 어린 사무엘에게 주님의 소리가 들렸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성소에 돌아와 자고 있던 사무엘을 다시 부르셨다.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는지요?” 하고 물었지만, 엘리는 아직도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돌아가 자라고만 하였다. 세 번째로 사무엘이 다시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는지요?” 하고 묻자, 그제서야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신 줄 알아차리고, 이렇게 일렀다.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네 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이번에는 환시 가운데 직접 찾아오시어,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그의 이름이 또렷하게 들리도록 부르셨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가 가르쳐준 대로, “예,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엘리가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면서도 시정조치를 강력하게 취하지 않은 것 때문에 엘리 집안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사무엘에게 내리셨다. 과연 오래지 않아 엘리의 고약한 두 아들은 불레셋인들과 싸우다 죽었으며, 엘리 자신도 아들들이 전사하고 계약궤를 원수들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성문 옆 의지에서 넘어지더니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리하여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판관직을 수행하던 엘리는 가고, 사무엘이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판관이자 예언자로 나서게 되었다.

 

실로의 성소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주님께서는 늘 사무엘 곁에 머물러 계시면서 그가 한 말이 한마디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저 멀리 북쪽 끝 단에서부터 남쪽 끝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거듭 나타나시어 말씀과 환시로 사무엘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하셨다.

 

사무엘은 평생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직을 청렴결백하게 수행하였다(1사무 12,1-4). 그러나 사무엘이 말년에 자기 후계자로 내세운 아들들은 그와 달랐다. 그들은 엘리의 아들들처럼 주님을 직접 모독하는 일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올바른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잇속에만 치우쳐 뇌물을 받고 판결을 불공정하게 내렸다. 본디 판관직은 세습이 되지 않는 법인데,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내세운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고향 라마에 머무르고 있던 사무엘에게 찾아가 다른 민족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려줄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하게 되었다. 사무엘이 판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내내 이스라엘이 불레셋인들에게 시달림을 받았으니, 외세를 물리치고 정치적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일시 부족 동맹에 불과한 판관제도로는 역부족이고 임금의 지도력과 상비군에 바탕을 둔 왕정제도가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백성의 왕정 요구는 하느님께서 직접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신정(神政) 사상의 신봉자였던 사무엘에게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신다.

 

사무엘은 먼저 베냐민 지파 키스의 아들 사울을 기름부어 임금으로 내세운다. 사울은 처음에 하느님의 영을 받아 불레셋인들을 쳐부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아말렉인들과 성전(聖戰)을 치르면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주님께서 아말렉을 완전히 쳐부수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과 그의 군대는 그들의 임금 아각과 기름지고 튼튼한 양과 소들을 살려 두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사울을 저버리시고 사무엘도 사울에게 실망하여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사울 대신 유다 지파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기름부어 임금으로 세웠다. 사울은 평생 전사로서 왕궁도 왕홀(지팡이)도 없이 전투만 치른 반면,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하고 그곳에 번듯한 왕궁도 짓고 왕좌도 마련하여 이스라엘에 왕정제도를 제대로 확립하였다. 이렇게 사무엘의 손을 거쳐, 부역과 병역의 의무, 토지 몰수와 사유 재산 포기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되는 왕정제도가 탄생되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과정은 자기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앞에 놓고 고심하는 젊은이들에게 매우 소중한 가르침이 된다. 인생의 갈림길에 선 젊은이는 진지하게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궁리한다. 그것은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과 같은 조용한 시간과 성체 앞과 같은 한적한 장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주님의 대답을 확인하지 못한 그는 경험 많은 영적 지도자에게 찾아가 상담하기도 한다. 영적 지도자는 보통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결정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라고 충고한다. 바로 엘리 사제가 사무엘에게 일러준 자세 그대로이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경향잡지, 1998년 7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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