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이사야서는 그 시대적 배경과 내용과 문체에 따라 보통 셋으로 나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보자. 제1이사야서(1-39장)는 아하즈와 히즈키야의 통치 시절(기원전 735-687년)을, 제2이사야서(40-55장)는 다윗 왕조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가져온 바빌론 침공과 유배 시절(586-539년)을, 제3이사야서(56-66장)는 유배 이후 이스라엘의 재건 시절(539-500년)을 다룬다. 그 다음 내용상, 제1이사야서는 아시리아인들의 억압과 침략 앞에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반면, 제2이사야서는 55장 3절 외에는 다윗 왕조에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고, 예루살렘은 중요한 실체라기보다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제시되며 성전에 관해서는 단 한 번 언급한다(44,28). 제3이사야서는 제2이사야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 왕조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의 미신적 예식을 비난하는 한편, 메시아 시대에 예루살렘이 가지게 될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선포한다. 마지막으로 문체를 놓고 볼 때, 이스라엘에 위기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우상숭배를 단죄하는 제1이사야서는 간결하고 직선적이며 단호하고, 바빌론 유배 시절에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2이사야서는 장중하면서도 서정적이며, 메시아 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제3이사야서는 앞의 두 책에 비하여 설득력과 박진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원숙한 필체로 두 책의 내용을 포괄한다. 이제 제2이사야처럼 이사야 예언자의 제자이며 무명의 신탁 선포자인 제3이사야가 어떤 소명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받은 소명이 제3이사야서의 중심 주제인 메시아 시대의 정의(正義)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구약성서 새번역) 이사 6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정의의 참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 부르도록 하셨다. 기원전 539년 가을, 바빌론을 정복하고 ‘바빌론의 임금’이라는 칭호를 얻은 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은 538년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유다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2역대 36,22-23; 에즈 1,1-4). 이 칙령은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가라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폐허가 된 고국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바빌론의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고향으로 발길을 옮긴 사람들은 소수의 무리였다. 여러 무리의 유다인들이 제후 세스바쌀, 여고니야의 손자이며 다윗 왕조의 계승권자인 즈루빠벨, 대사제 스사랴의 손자이며 그 역시 대사제인 예수아 등 출중한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아마도 서로 다른 시기에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에즈 1-2장).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제사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고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북쪽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귀환자들은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의 독려로 516년 마침내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고 예배를 정식으로 드리기 시작하였다(에즈 5-6장). 그뒤에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가 도착하여 이민족과의 혼인을 단죄하고 전례와 윤리와 제도의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에즈 7-8장; 느헤 1-2장). 겉으로 보기에 이스라엘의 복구와 재건은 이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3이사야는 하깨와 즈가리야에게 없는 안목과 통찰을 가지고서,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감히 추진하지 못한 개혁을 더 넓고(보편주의) 더 궁극적인(메시아적 종말론) 차원에서 선포하였다. 제3이사야서에 따르면 바빌론 유배자들이 고향에 돌아와 이루어낸 상황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제2이사야가 우상들의 헛됨을 조롱하고 그것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다. 반면, 제3이사야는 그처럼 헛되고 무능한 우상들을 섬기는 악습들에 또다시 빠져든 백성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고발한다(57,3-13).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바빌론 유배살이에서 제2 출애굽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우상숭배와 더불어 제3이사야는 겉치레 예배와 신심을 고발한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예배가 회복되는 시점에서 모두가 외적인 예배와 형식보다 진정한 예배인 공정과 정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을 통탄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것이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께서 반기시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5-7) 이런 생각은 위에서 인용한 예언자의 소명 신탁(61,1-3)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신탁에 묘사된 내용은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소명을 반영한다. 서로 일치되는 요소들을 열거하자면, 주님께서 선택하시어 성령을 주심(42,1), 자비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봉사함(42,2-3),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풀어줌(42,7), 정의에 대한 언급(42,1. 3-4. 6) 등이다. 제3이사야의 소명 신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의이다.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이 정의는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당신 백성에게 자비와 사랑을 충만히 드러내시고 당신이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시키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단순히 개인들의 짓밟힌 권리를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구원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정의의 개념은 제1이사야서, 제2이사야서, 제3이사야서를 거치면서 점차 확장된다. 제1이사야서의 주 관심사였던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성의 확고한 존립은 제2이사야서에 들어오면서 그 역사적 실체적 의미 대신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제3이사야서에 와서 메시아 시대의 희망으로 발전한다.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단순히 한 왕조의 존립과 번영에 머무르지 않고, 제3이사야서에서 결국 메시아를 통하여 온 세상 민족을 영원한 구원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으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번영에 국한된 하느님의 정의 개념이 인류 구원과 연결되면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을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제3이사야의 소명은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시의 보존, 그리고 성전의 재건과 형식적인 전례의 회복 등 외적인 정치 · 종교 제도의 확립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실현될 메시아 시대를 선포하고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3이사야는 이 소명을 자신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시온의 남은 자들에게까지 확장시킨다. 그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었는데, 이들이 ‘정의의 참나무’ 또는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가 된 것이다.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노래’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속죄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하고 형상화한 것이라면, 제3이사야의 소명 신탁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신 그분의 공생활 전체를 미리 예고하고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루가 복음서 저자가 이를 예수님의 나자렛 첫 설교에서 공생활의 청사진으로 제시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를 이웃 사랑에 연결시켜 모든 이에게 메시아 시대의 구원에 동참하기를 요구하는 이사 58,6-10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심판의 비유’에 그대로 반영된다. [경향잡지, 1999년 3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