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주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것이오(판관 11,7-11) 입다의 소명 이야기는 독특하다. 그는 하느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을 사람답지 않게 출신이 천박하였다. 판관기의 저자는 그의 아버지가 길르앗이고 어머니는 창녀였다고 밝힌다. 길르앗은 본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지파가 차지한 요르단 강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저자가 입다의 아버지를 길르앗인들의 시조 이름으로 소개한 이유는 그가 사생아여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입다가 자라자 배다른 형제들이 그를 구박하고 그가 아버지의 상속 재산을 받지 못하게 아예 집안에서 내쫓았다. 입다는 고향을 등지고 길르앗 지방 북쪽 끝에 있던 ‘돕 땅’으로 올라가 그곳에 자리잡고 살았는데, 힘이 장사인 그의 주변에 불량배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그들의 두목이 되어 허구한 날 노략질로 세월을 보냈다. 이처럼 망나니 생활을 하는 입다에게 길르앗의 원로들이 찾아와서 자기네 지휘관이 되어 길르앗 땅을 넘보는 암몬인을 물리쳐 달라고 청한다. 암몬인은 길르앗보다 더 동쪽에 살던 민족으로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려고 불러들인 적들 가운데 하나이다(판관 10,6-7). 하느님께서 직접 소명을 주시지 않고 원로들을 통해서 주셨다는 사실도 입다의 소명 이야기에서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 새번역) 11. 7 입다는 길르앗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미워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쫓아낸 것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곤경에 빠졌으면 빠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8 그러자 길르앗의 원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그대에게 온 것이오.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의 자손들과 싸우고 길르앗에 사는 모든 주민의 우두머리가 되어달라는 것이오.” 9 이에 입다가 길르앗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나를 도로 데리고 가서 내가 암몬의 자손들과 싸울 때 주님께서 그들을 나에게 넘겨주시면 내가 여러분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오?” 10 그러자 길르앗의 원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우리 사이의 증인이 되어주실 것이오. 우리는 꼭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11 그리하여 입다는 길르앗의 원로들과 함께 갔다.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모시자 입다는 미스바로 가서 자기가 나눈 모든 말을 주님 앞에서 되풀이하였다. 지휘관이 되어달라는 원로들의 요청에 입다는, 암몬인들의 길르앗 침입이 동족에게서 쫓겨난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 억지 답변을 한다. 애가 탄 원로들은 “그래서 우리가 그대에게 온 것이오.” 하고 입다를 달랜다. 원로들의 말에서 “온 것이오”로 옮긴 히브리 말을 직역하면 “돌아온 것이오”이다. 성서에서 ‘돌아오다’는 주로 회개를 가리키는 데 쓰는 동사이다. 입다를 쫓아낸 원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를 데리러 돌아온 것이다. 원로들이 입다에게 제시한 조건도 파격적이다. 군대의 지휘관 정도가 아니라 모든 주민의 우두머리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에 입다는 암몬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만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으로 그 전쟁에서 이겼을 경우에는 영구적으로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냐고 다시 한번 확인한다. 원로들은 주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말을 들어준다. 원로들과 함께 길르앗으로 돌아온 입다를 백성이 자가들의 지휘관과 우두머리로 모시자, 입다는 그들을 데리고 미스바로 가서, 자기와 원로들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그곳 성소에서 엄숙하게 재확인한다. 미스바는 ‘망보는 곳’, ‘살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협정을 맺은 사람들이 성실하게 협정의 내용을 지키는지 살피시는 분이시다. 이 협정의 확인은 입다 개인으로 보면 원로들을 통하여 주어진 소명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이 미스바는 베냐민 지방에도 있어서(판관 20,1), 이곳의 미스바는 ‘길르앗의 미스바’(11,29)로 불리기도 한다. 원로들에게 전권을 이양받은 입다는 먼저 평화적인 방법에 호소한다. 하느님의 사람이 된 그는 이제 더 이상 불량배들을 이끌고 노략절만 하던 강도떼의 두목이 아니다. 사절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들의 땅을 침범하지 말고 물러가라고 요구하는 입다에게, 암몬인의 임금은 오히려 이스라엘이 자기네 땅을 점령한 것이라고 맞받는다. 곧 이스라엘인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 야뽁까지, 곧 현재 길르앗 남쪽과 가드와 르우벤 지파가 차지한 요르단 강 동부 지역을 자기들에게서 빼앗아 차지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입다는 암몬인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반박한다. 본디 이 땅은 모세 시절에 아모리인이 이스라엘인의 통과를 방해하였을 때, 주님께서 아모리인의 임금 시혼과 그의 군대를 이스라엘인들의 손에 넘겨주시며 이스라엘인이 차지하도록 허락하신 영토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삼백 년 동안이나 살아왔으므로, 그들이 이 곳의 기득권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암몬인의 임금은 입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 입다에게 전쟁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님의 영이 입다에게 내리자 그는 미스바를 떠나 암몬인들이 진을 친 곳으로 갔다. 그때 입다가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의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의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11,30-31). 사람을 신에게 최상의 제물로 바치는 종교 관습은 고대의 셈족뿐 아니라 인도 유럽족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는 흔적이 판관기말고도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창세 22,1-19; 2열왕 16,4; 17,17; 미가 6,7). 그러나 예언자들이 이를 잘못된 관습으로 비판하였고(예레 7,31; 19,5; 에제 16,20-21; 23,39). 율법에서도 금지하였다(레위 18,21; 20,2-5; 신명 12,31). 주님께서 암몬인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입다는 암몬인의 성읍 스무 개를 점령하고 그들을 이스라엘인에게 굴복시켰다. 그리고 나서 자기 고향 미스바로 개선하였다. 그런데 하필 입다의 승리를 축하하러 마중 나온 첫 사람이 그의 외동딸이었다. 그 아이는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며 그를 환영하였다. 딸을 보는 순간 입다는 제 옷을 찢으며 울부짖었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은 돌이킬 수가 없단다”(판관 11,35). 입다의 말에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주님께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수 암몬의 자손들에게 복수해 주셨으니, 이미 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11,36). 다만 한 가지, 죽기 전에 친구들과 산으로 올라가서 처녀의 몸으로 죽는 자신의 신세를 두고 두 달 동안 실컷 곡이나 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입다가 허락하자 딸은 친구들과 산으로 가서 떠돌아 다니며 곡을 하고 두 달 뒤에 돌아왔다. 입다는 서원대로 그 아이를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이다. 그뒤에 입다는 암몬인과 싸울 때에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생트집을 잡는 에브라임 지파를 물리쳤다. 부르지 않았다고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 지파는 언제나 다른 지파 위에 군림하려고 하였다(8,1-3 참조). 암몬인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스라엘 원로들의 신임을 받은 입다가 에브라임의 패권주의를 허용할 리 없었다. 에브라임을 굴복시킨 뒤 입다는 온 이스라엘의 판관이 되어 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창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의 입다는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동족에게 쫓겨나 강도떼의 두목으로 막가는 인생을 살고 있던 그를 동족이 다시 맞아들여 그들의 지도자로 삼게 하셨다. 입다는 미스바의 성소에 가서 원로들을 통하여 주어진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였다. 그가 받은 소명은 암몬인을 쳐부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암몬인을 치러 가기 전에 입다는 하느님께 경솔한 서원을 하고 말았다. 입다는 사람을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선물이 될 사람이 하필 자신의 외동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어떠한 경우이든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지만, 입다는 힘과 지혜를 두루 갖춘 훌륭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하느님께 한번 서원한 것을 결코 되물리지 않으려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봉헌할 만큼 그분을 경외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소명은 비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경향잡지, 1999년 9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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