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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33: 귀향 - 반세기 만의 귀향, 그러나 고향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5 조회수4,70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33) 귀향


반세기 만의 귀향, 그러나 고향엔 …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의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키루스 실린더’. 대영박물관 소장.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키루스 대왕, 혹은 고레스)는 바빌론 점령 1년 뒤, 중대 선언을 담은 포고령을 낸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주요 내용을 모두 소개하기로 한다. 유대인 역사에서 이처럼 감격적인 순간은 드물기 때문이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에즈 1, 2-4)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드디어 유대인들의 귀향이 가능해졌다. 당시 키루스 대왕의 이 해방령은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엄청난 뉴스였다. 키루스의 이 해방령은 19세기 바빌론 궁전 유적지에서 발굴돼,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키루스 대왕 비문에도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유대인들은 국가 재건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이어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귀향 작전이 전개됐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귀향을 ‘작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귀향이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다윗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세스바차르(에즈 5,14)를 유다지역 총독에 임명, 기원전 538년 귀환 작전을 지휘토록 한다. 이 때 귀향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바빌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배 2세대였다. 유배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가 살던 땅으로 귀향에 나선 이들은 바빌론의 생활 기반을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 가면 무엇이 기다릴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새 공동체 실현과 새 땅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바빌론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성벽조차 제대로 없는 예루살렘은 온전한 집 한 채 남아있지 않은 폐허 그대로였다. 과거 솔로몬의 영화를 드러내던 남 유다 왕국의 땅은 이제 버려진 땅이었다. 북 이스라엘의 도읍 사마리아도 더 이상 유대인들의 땅이 아니었다.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은 지역 종교와 혼합된 하느님 제의를 바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첫 귀향자들은 실망하지 않고 본격적인 성전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한다. 성전 재건을 위해 제공하겠다던 키루스 왕의 재건 비용이 지속적으로 조달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리아인들의 갈등도 격화됐다. 심지어 가난하고 무식했다는 이유로 바빌론 유배에서 제외돼 현지에 남았던 토착 유대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빌론에 끌려가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갑자기 바빌론에서 밀려오는 유대인들의 물결이 달갑지 않았다.

 

역사는 유대인들을 떠난 자, 남겨진 자, 혼혈이 된 자로 나눠 놓았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살아온 과정이 달랐으며 현재의 처지가 달랐다. 서로를 이해할 수도,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에는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첫 귀향자들의 성전 재건 노력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대대적인 귀환은 첫 번째 귀향자들이 출발한지 8년 뒤인 기원전 530년 이뤄진다. 지휘관은 신임 유대 총독 즈루빠벨이었다. 성경은 당시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의 인도로 귀향한 유배자들을 정확히 4만236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에즈 2,64). 여기에 남녀 종이 7337명이었고 이동과 수송에 사용한 말과 노새, 낙타, 나귀가 각각 736마리와 245마리, 435마리, 6720마리였다.

 

대규모 이주였던 만큼 성전 재건의 열기도 그만큼 높았다. 그 결과 작은 성전 하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역사는 이 성전을 두고 재건된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제2성전이라고 부르는 예루살렘의 성전 건립은 70여 년 후에 이뤄진다). 그 규모와 기능상 성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했기 때문이다. 당시 초라한 성전의 모습은 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하까 2,2). 대성전을 건립할 자리에 초라한 단칸 목조 공소 건물을 세운 격이다.

 

게다가 이번 귀향자들도 배타성이 강했다.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유대인을 비롯해 다른 모든 이민족들과 융화되지 못했다. 그들은 성전 건축에 토착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배제시킨다(에즈 4,3 참조).

 

예루살렘은 아직도 폐허 그대로였다. 민족간 지역간 갈등으로 정세는 항상 불안했다. 다윗 왕국 재건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 공동체의 분열 조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첫 귀향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제2의 다윗 왕국을 꿈꾸던 유대 귀향 공동체는 점차 활기를 잃어 갔다. 하느님 신앙도 점차 시들해져갔다.

 

하지만 큰 무리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을 향한 산발적 귀향의 물결은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정화된 남은 자라고 여기는 이들의 용감한 여행이 계속됐다. 바빌론에서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희망을 가슴에 품은 많은 이들이 미지의 땅 예루살렘으로 밀려들었다.

 

염원이 쌓이고 쌓이면 결실을 맺기 마련이다. 성전 건립의 염원도 서서히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25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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