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47) 아! 예루살렘
전쟁, 그 참혹한 비극의 현장 - 여인들은 남편에게서,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어미들이 자식의 입에서 먹을 것을 빼앗았다. 아이들이 음식을 물고 놓지 않아 끌려오면, 흔들어서 바닥에 떨어트렸다. 허리띠, 장화, 방패에 달린 가죽마저도 떼어내 씹어댔다. 그림은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묘사한 빌헬름 폰 쿨바흐(Wilhelm von Kaulbach)의 작품. 서기 66년, 로마군은 기세등등하게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됐다. 1개 레지오(군단, legio) 병력이면 손쉽게 진압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개 레지오의 병력 수는 전투와 시대에 따라 달라서 일반화하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병대를 포함해 약 5000~6000명(보조병력 제외)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유대인 정규 저항군 수는 적어도 5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결국 로마는 첫 전투에서 패해 후퇴한다. 후퇴는 진격보다 어렵다. 유대인들은 후퇴하는 로마군을 또다시 습격해 보병 5300명 기병 480기를 몰살한다. 1개 레지오 전체를 괴멸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로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었다. 당시 네로 황제는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를 공연하기 위해 그리스에 머물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군의 참패 소식에 대노한다. 그리고 당대의 명장 베스파시우스를 총사령관으로, 그의 아들 티투스를 부장으로 임명해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3개 레지오가 차출됐다. 로마가 맘먹고 편성한 대군이다. 병력도 정예 중의 정예다. 유대인들도 이에 맞서서 요세푸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병력을 갈릴리 북부지역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정예 로마군을 이겨낼 수 없었다. 7개월을 버티다 결국 패배한다. 이때 유대군 사망자가 4만 명, 포로가 1200명이었다. 주력부대가 무너진 이상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총사령관은 가나안 땅 전역을 차근차근 점령했고, 결국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시점(서기 68년)에서 전쟁이 중단된다. 네로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사령관 베스파시우스는 다음 황제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자 부장인 티투스를 새 황제 갈바에게 보냈다. 그런데 로마로 향하던 티투스는 도중에 갈바가 죽고 황제가 오토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 오토도 불과 3개월 후 사망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유대 전쟁을 지휘하던 베스파시우스가 69년 7월 로마의 새 황제로 추대됐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서라도 유대 반란을 확실히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점령을 위해 4개 레지오를 편성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과 전쟁터에서 고락을 함께한 아들 티투스를 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서기 70년 봄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 4개 레지오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진을 쳤다. 티투스는 봉쇄 작전을 폈다. 성을 완전히 포위해 물과 식량이 떨어질 때를 기다린 것이다. 고립된 예루살렘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옥으로 변해갔다. 저항군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귀족과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고 처형했다. 성을 탈출하다 붙잡혀도 즉시 처형됐다. 당시 기록에 그 참혹함이 잘 나타나 있다. “여인들은 남편에게서,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어미들이 자식의 입에서 먹을 것을 빼앗았다. 저항군들도 먹을 것이 필요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입속에 있는 것조차 꺼내게 했다. 아이들이 음식을 물고 놓지 않아 끌려오면, 흔들어서 바닥에 떨어트렸다. 허리띠, 장화, 방패에 달린 가죽마저도 떼어내 씹어댔다.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흉하게 튀어나온 얼굴로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고통 속에서 탈진하여 여기저기에 쓰러져 죽었다. 죽어가는 이들은 사투 속에서 메마른 눈으로 이를 악문채 이미 죽은 자들을 응시했다.” 그 내용이 참혹해 여기서 자세히 거론하기 힘들지만,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살해해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고상하고 온순한 여자도, … 제 두 다리 사이에서 나온 어린 것들에게도 그렇게 하며,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신명 28,56-57)는 예언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기다리다 못한 로마군이 먼저 작전에 돌입했다. 예루살렘성은 사방을 둘러싼 벼랑위의 천연요새였다. 성도 견고했다. 그것도 한 겹이 아니라 이중삼중이었고, 곳곳에 망대와 육중한 벽돌로 지어진 성채가 있었다. 격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끈질긴 공격에 성벽 한 귀퉁이가 무너졌고, 군인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해했다. 성전도 불탔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은 이제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당시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예루살렘성 전쟁 하나로 인한 사망자와 포로가 모두 6만 명이라고 썼다. 또 다른 증언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가 11만 명, 포로가 9만7000명이다. 특히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예루살렘성 안에서 굶주림과 처형으로 죽은 사람만 60만 명에 달한다. 희생자 대부분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지를 찾았다가 전란에 휩쓸린 사람들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는 270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 비극은 계속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세 군데 요새가 아직 유대인 수중에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km 거리에 있는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에 있는 마카이로스, 그리고 서해 서쪽에 있는 마사다가 그것이다. 로마는 서두르지 않았다. 예루살렘 함락에 공을 세운 4개 군단 중 3개 군단은 원래 주둔지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1개 군단만으로 이들 요새들을 공략했다. 헤로디온과 마카이로스는 이내 무너졌지만 마사다는 3년 넘게 항전했다. 하지만 마사다의 저항도 960여 명의 남녀와 아이들이 굴욕적인 포로 생활을 피해 집단 자살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의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다. 현재 유대인이 이스라엘 군인이 되면 이곳에 가서 신병선서를 한다. 마사다 함락 후 예루살렘에는 로마군 1개 레지오가 상주했다. 보조병력을 합쳐 1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다. 유대교는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일까. 하느님이 결국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일까. 예루살렘성이 무너지던 그날, 바리사이파 한 사람이 관 속에 몸을 숨겨 몰래 성을 빠져 나갔다. [가톨릭신문, 2010년 2월 7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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