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52) 십자군
대의명분에 가려진 십자군의 만행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유명한 파스칼이 태어난 고향에서 교황은 십자군 원정의 깃발을 들었다. 예루살렘 성지탈환을 위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림은 십자군 전쟁 중 안티오키아 학살을 묘사한 구스타프 도레의 작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팡세」에서 말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1095년 11월 27일, 파스칼의 고향인 프랑스 남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 클레르몽. 파스칼의 고향답게 세상이 온통 갈대들의 갈색으로 가득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수많은 갈색 군상들이 평상시와 달리 음산해 보였다. 갈대들이 바람에 휘둘리고 있었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그 갈대들이 휘둘리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갈색들이 군중들의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 재위 1088∼1099)가 클레르몽 도심 외곽 언덕 꼭대기에 마련된 연단에 올랐다. 교황의 등 뒤로 파스칼이 말한 그 갈대들이 군상을 이루며 춤추고 있었다. 교황 앞에는 주교들과 귀족, 시민들이 모여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황이 입을 열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도와 싸워 성지(예루살렘)를 되찾읍시다.” 그리고 약속했다.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의 칭호를 받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열광한다. 그리고 칼을 들었다. 사회적·종교적 배경은 어찌되었건, 대부분의 귀족 청년들은 하느님 땅을 되찾겠다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다. 농민 등 하층계층도 천국의 약속을 믿고 전쟁에 참여했다. 성지순례와 천국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그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그래서 세상은 훗날 그들을 ‘십자군’(十字軍, crusades)이라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미국 청년들이 정의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앞다퉈 군대에 입대했듯이, 당시 젊은 혈기를 가진 유럽 청년이라면 누구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안에는 다른 의도를 가진 이들도 많았다. 어떤 귀족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어떤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어떤 농민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희망을 꿈꿨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이 밖에도 모험심, 약탈욕구 등이 혼재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때 ‘설마’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고,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십자군은 흥분해 있었다. 특히 북유럽에서 유입된 이들은 난폭하고 거칠었다. 이들은 십자군이라는 대의명분 뒤에 숨어,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이 현금을 많이 보유한 것도 그들의 피해를 키운 원인이었다. 이 같은 혼란을 틈타, 일반 군중들도 유대인 마을을 습격해 제 몫을 챙겼다. 이들은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슬람의 유럽 정복전쟁에 적극 협력한 전력도 있었다. 당시 상황은 12세기 유대인 역사 편집자였던‘솔로몬 벤 삼손’ 랍비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교황의 십자군 호소 이후 1095년에서 1096년을 넘어가던 시기, 파리 북서쪽 123km 지점에 위치한 루앙(이 도시는 훗날 잔다르크가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에서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 십자군은 이어 프랑스를 벗어나 독일 지역으로 접어들었는데, 이곳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096년 봄과 여름에는 보름스, 슈파이어, 마인츠, 트리어, 쾰른, 크산텐 등의 유대인 집단 거주지가 파괴됐다. 프라하의 유대인들도 똑같은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십자군의 약탈과 살해, 방화에는 일반 시민들도 동참, 점차 폭동 형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을 다스리던 황제와 주교들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광기와 통제불능 상태를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쾰른 등 각 지역의 주교들은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 약탈 행위를 금지시켰다. 유대인을 살해하고 재산을 뺏은 주모자를 체포,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의 적극적 노력은 몇몇 도시에서 일정부분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역에서는 광신적 군중들의 기세에 밀려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는 폭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동료 사제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제 유대인들을 보호해 줄 공권력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을 단위로 자경대를 조직하고 대항에 나섰다. 하지만 십자군과 군중들의 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수많은 유대인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선 그리스도교로 강제 개종해야 했다. 어린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쾰른의 대주교는 유대인 여성들만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였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여성들은 집단 자살을 선택했다. 그렇게 유대인들의 피를 뒤로하고 진군한 십자군은 출정 4년만에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한다. 십자군은 여기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이슬람교도 뿐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도 용납하지 않았다. 십자군은 유대인들을 회당으로 몰아넣은 후, 불을 질렀다. 이후에도 십자군 원정은 1400년대 중반까지 8차에 걸쳐 이뤄지는데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도(Bernardus, 1090~1153) 성인이 “누구든지 히브리인들을 죽이기 위해 손을 댄 사람은 예수님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과 똑같은 중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호소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2주일 전인 1099년 7월 29일 선종했다. 900년 후(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 원정을 가톨릭교회가 인류에게 저지른 7대 오류중 하나로 시인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21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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