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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55: 희망의 불씨, 그러나 - 바야흐로 봄이 오는가 싶더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18 조회수3,70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55) 희망의 불씨, 그러나 ….


바야흐로 봄이 오는가 싶더니 …

 

 

1600년대부터 유럽사회에선 유대인 박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대인들도 이제야 어엿한 사회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들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환상임이 곧 드러났다. 그림은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19세기 폴란드의 크라쿠프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유대인 상인들의 모습.

 

 

“유대인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가톨릭교회에 쇄신을 요청(1517년)한 직후, 그는 유대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호의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유대인들은 루터의 구약성경 이해 수준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탈무드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루터는 가톨릭교회에 쇄신을 요청했을 뿐, 반목할 생각은 없었다. 로마 교황청의 전대사 남발에 대해, 할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교회의 반응은 의외로 강경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 안에서 쇄신하는 방법 대신, 교회와 등을 돌리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접근했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 신앙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유대인들이라면 가톨릭교회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편에 서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523년에 소책자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예수」를 집필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두고 보자 유대인들. 역시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어.”

 

루터는 책상 앞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글을 써내려 갔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과 그 거짓들에 대해」(1543)가 탄생한다. 루터는 이 책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태우고, 재산을 압류하라고 했다. “피에 굶주린 개때들”이라는 원색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대인은 이 세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갖 타락과 악의에 찌들어 있다. 우물에 독약을 풀고, 아이들을 납치하고…. 한마디로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그런 부류들이다.” “유대인에 대한 신의 분노는 참으로 크다. 그래서 안일한 자비는 그들을 더욱 간악하게 만들고, 매질을 가해도 조금만 나아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두 쫓아내야 한다.”

 

베를린의 유대인 회당이 약탈당했으며, 결국 1572년에는 모든 유대인이 독일에서 추방됐다. 이 같은 유대인 박해는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가톨릭 신앙인들이 게토를 통해 유대인들을 가뒀다면, 개신교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을 빈털터리로 내쫓았다.

 

유대인들은 유랑민족이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또다시 짐을 싸서 떠돌았다. 그곳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가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곳 왕조들이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이 차츰 부를 축적하고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자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등 파란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지위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유대인 박해를 야만적으로 보는 풍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꿈의 땅,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1665년 네덜란드령이었던 뉴암스테르담을 4척의 함대로 빼앗은 후, 뉴욕이라고 이름을 고친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1672)는 뉴욕 초대 영국 총독이 된 후 이렇게 선언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피해를 당할 수는 없다. 법적으로 이들의 지위는 보장되어야 한다.”

 

훗날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도 「버지니아에 고함」(1782)에서 “종교의 다양성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진보와 자유를 가져다 준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희망의 땅이었다.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레비 슈트라우스(Levi Strauss, ‘레비’는 레위 사람이라는 뜻이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텐트용 천과 마차 덮개를 이용해 자신의 이름을 딴 최초의 청바지 ‘리바이스’를 개발(1853년)한 사례는 유명하다.

 

유럽에서도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럽 동북부와 중부에는 프로이센(프러시아라고도 불린다)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관리였던 빌헬름 폰 돔(Wilhelm von Dohm, 1751-1820)은 「유대인을 시민으로 올리는 것에 대하여」(1781)에서 “유대인은 모든 인간들과 똑같이 시민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며 “주거권의 제한, 직업 금지, 과중한 특별세 등 악법들을 폐지하고 유대인의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도 「예루살렘과 유대교에 관해」(1783)에서 “사회질서를 무너트리고, 법률을 고의적으로 어기지 않는다면, 누구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 1741~1790)는 관용 칙령(1781)을 통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제약들을 폐지했다. 또 1812년 프로이센에서도 소위 「해방 칙령」이 반포된다. 이로써 프로이센의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가진 어엿한 시민이 됐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도 얻었다. 군복무도 가능해졌다.

 

물론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예 해방을 선언했던 것처럼, 프로이센의 유대인 해방령도 대프랑스 전쟁에 유대인을 동원하기 위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들이 그랬듯이, 프로이센의 유대인들도 자발적으로 입대했다.

 

새롭게 패권국으로 부상한 영국도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영국 외교부가 스위스와 발칸반도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위해 1854년과 1856년 각각 해당 지역 공사에게 내린 지시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한 독특한 상황에서 벗어나 문명세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들을 보호하는데 노력하라.”

 

바야흐로 유대인 전성시대가 오는 듯 했다. 유대인들 스스로도 일반 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환상임이 곧 드러난다. 숟가락을 들려는데 밥상이 치워진다. 그 대표적 사건이 1894년 프랑스에서 터진다.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한 유대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희 유대인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11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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