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욥기 (9-16) : 욥기의 내용 (1-8) 욥기는 여타 문학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구조, 서론(1~2장) → 본론(3장~42, 6) → 결론(42, 7~17)의 3단계적 구조를 띄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욥기 전체의 특징을 염두에 두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작업은 위의 삼단계 구조를 따라 전개될 것인데, 우선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서론」에 해당되는 1~2장이다. 이 서론부분은 이미 언급된 대로 「산문형태」로 되어있고, 그 내용은 다시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욥에 대한 프로필(1, 1~15) → 2. 욥에게 가해진 첫 번째 시련(1, 6~22) → 3. 두 번째 시련(2, 1~10) → 4. 세 친구들의 등장(2, 11~13). 서론 내용개관 서론은 사건이 구체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주인공의 개인적 프로필(이름, 장소적 배경, 가족 상황 등)을 제시한다(1, 1~5). 두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련으로 본격적인 사건은 시작되는데, 욥에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시련은 모두 『하루는…』(1, 6과 2, 1)이라는 「도입 관용구」를 통해서 소개된다. 이러한 도입형식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것인데, 대부분의 동화나 민담들이 『옛날 옛적에…』라는 도입 관용구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 친구들의 등장으로 서론 부분은 마무리되는데(2, 11~13), 이는 본론(세 친구들과의 담화: 3장~42, 6)을 미리 준비하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욥의 프로필(1, 1~5) 욥은 「우스」(Uz)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고, 이 지명이 현재의 어디에 상응하는지 학계의 의견들이 분분하다(에돔 혹은 하란 지역쯤으로 추정). 이스라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지명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욥기의 저자를 이스라엘 밖의 외국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이들도 있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 역시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데, 이처럼 장소와 시간에 대한 불분명한 제시는 이 책이 하나의 신학적 보도일 뿐이지, 실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다. 백설공주가 어느 나라 공주였는지, 신데렐라가 어느 도시 출신이었는지 우리 중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녀들의 국적과 출신에 궁금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야기들이 가지는 교훈적 가치와 비현실적 아름다움에는 전적으로 긍정한다. 욥기의 픽션(fiction)적 성격도 이와 비슷한 원리로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욥의 이름이 소개된 후 등장하는 것은 그의 도덕성과 신앙심에 대한 칭송이다(『그는 온전하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2절). 이러한 그의 훌륭한 성품에 이어 저자는 그의 막대한 재력을 소개한다(3절). 이처럼 저자가 욥의 성품에 먼저 주목하고 이어서 그의 재산을 소개하였다는 점은, 지난주에 언급한 바 있는 「신명기적 발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바른 생활과 인격, 신앙심 때문에 막대한 부가 결과적으로 주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기의 프로필 소개의 마지막은(1, 4~5) 욥의 부성(父性)과 아버지로서의 섬세함을 드러내 주는데 할애되고 있다. 욥은 자식 하나하나를 위해 아침에 일어나 번제를 드리는데 『혹시나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저주했는지도 모르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5절). 지도자로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도 완벽했던 욥의 모습을 너무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구절이다. 자식의 과오까지 짊어지는 부모님 본당수녀로 있을 때 주일 미사를 꼭 두 번씩 참석하시는 분을 뵌 적이 있다. 자녀들이 주일미사를 안했을까봐라고 하셨다. 필자의 어머니도 매일같이 성무일도와 수십번의 묵주기도를 바치신다. 딸수녀 때문이다. 엄마가 보실 때 당신 딸은 수녀임에도 불구하고 부진한 신앙생활을 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신앙도 깊지 않은데, 기도도 별로 안하고, 거기에다 일까지 많아 하느님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들킨 나태한 신앙이 죄송하기도 하고 부담도 되어 「지나친 열심도 병」이라고, 오만과 방자를 섞어 일축해 버리곤 하지만, 부모님들의 열심으로(욥의 경우처럼) 그나마 자식들이 이 순간도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아마도 내가 알고있는 지식 중 그 어느 것보다 정확한 지식일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2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죽지않을 만큼만의 고통주시는 하느님 얼마 전 신문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색다른 정의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저자는 「달리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을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실패하거나 상처를 입어도, 다시, 여전히,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하였고,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시련을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사랑」과도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지금껏 사랑해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차별한 고통으로 상처를 주시는 하느님을, 여전히 태연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그분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는 믿음을 확고히 간직할 수 있을지, 욥이 도달해야할 내면의 진심은 바로 이에 대한 답안에 숨어있었다. 이제 그의 첫 번째 시련을 살펴보기로 하자(1, 6~22). 시험의 시작 『하루는』이라는 도입 관용구로 시작된 첫 번째 사건은, 지상이 아닌 「하늘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은 욥의 성실함과 신앙을 칭찬하시는데, 세상을 두루 살피고 돌아온 사탄이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건의 갈등을 야기시킨다. 사탄에 의하면 욥의 흠없는 모습은 「인과응보적 사고」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연극일 뿐이지, 남다른 신앙에서 우러나온 진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전통사고방식에 의한다면, 집과 재산 많은 자손 등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모범적 삶을 필수적으로 살아야하고, 따라서 욥은 기복(祈福)적 마음으로 선행을 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욥을 사이에 두고 야기된 하느님과 사탄의 대립은 사탄의 제안으로 타결점을 맞게 되는데, 욥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주었던 재산과 명예를 모두 빼앗아 보자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주어졌던 복을 박탈당하고도 여전히 하느님을 경외한다면 욥의 신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심인 것이고, 반대로 하느님을 욕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다면, 그의 성실함은 계산되고 조작된 것임이 증명된다는 논리였다. 이 제안과 함께 장면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전환되고, 미처 손 쓸 수조차 없는 재앙들이 연이어 욥에게 들이닥친다. 결국 욥은 모든 재산과 자식을 순식간에 잃어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신앙을 지켜나간다. 1차 시련은 하느님과 욥의 승리로 종결된 것이다. “나의 종 욥” 하느님은 욥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시는데(8절), 이는 1인칭 소유 대명사를 통해 구체적인 친근감을 부각시켜주는 호칭이다.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때 붙이신 조건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을 잘 제시해 주는데(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 12절 참조), 이러한 하느님의 배려는, 「진정한 생명을 찾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고통」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고통은 인간에게 「죽을 것」 같은 어려움으로 다가오지만, 실상 하느님께서는 「죽지 않을」 만큼만의 고통만을 허락하신다. 사람을 진정으로 「살리기 위한 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시험은, 전통적인 인과응보 논리가 사탄적(부정적)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저자의 의도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자신이 지적하고자 하는 전통의식(신명기적 인과율)을 사탄의 입장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사상이 던지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보상 없는 신앙, 가능한가? 욥에게 들이닥친 시련은 욥이 사랑한 실체에 대한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가 사랑한 것이 하느님(God) 자체였는지, 아니면 「행복」 혹은 「선」(Good)은 아니었는지…. 돌아갈 다른 곳이 있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보상을 바라는 신앙이라면 그건 종교도 믿음도 아니다. 기복과 기적만을 절대시하는 것이 하등종교가 가지는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Good 자체만을 사랑할 때, God는 실종될 수 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해온 것이 무엇인지, 정말 믿어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검증하게 하는 것, 고통과 시련이 가지는 궁극적 기능일지도 모르겠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3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변치않는 신실함 가진 욥 역시 「하루는」이라는 도입 관용구로 시작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경우(1, 6~12)와 거의 동일한 구조로 되어있다. 「하늘나라 의회」중, 욥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하는 하느님과 사탄의 대립 구조가 반복되기 때문이다(2, 1~2). 다만 두 번째 시련에 대한 서술은 첫 번째와의 연결을 위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첨가한다. 『그는 아직도 제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 너는 까닭 없이 그를 파멸시키도록 나를 부추긴 것이니라』(2, 3). 그러나 이러한 판정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더 강도 높은 시험(「뼈와 살을 치는」 2, 5참조)을 제안한다. 「뼈와 살을 치는」 시련 「뼈와 살을 치는」 시련의 구체적 내용은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에까지 난 악성 종기와 아내의 매몰찬 배신이었다. 심신 양면을 강타한 고통인 셈이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치명적 인 것은 「소외」와 「고독」이라고 한다. 더욱이 이 고독이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야기된 것일 때, 숨쉬기조차 힘든 포박이 될 수 있다. 『?…죽어버려요』(2, 9)라는 비난이 그 누구도 아닌 아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을 때, 남편인 욥은 이미 그 순간 죽음을 체험한다. 사랑과 우정은, 애착을 가진 꼭 그만큼의 고통과 비극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반응 그러나 두 번째 시련에서도 욥은 하느님께 변치 않는 신실함을 보여준다(2, 10 참조). 욥은 하느님 주권의 절대성과 자신의 피조물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욥의 태도는 철저히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의 성실함을 통해, 하느님이 복을 주셨으니 재앙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피조물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는 피동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다만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는 신앙과 확고부동한 믿음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2, 10)는 표현으로 두 번째 시험의 결과가 제시된다. 세 친구들, 그리고 슬픈 침묵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는 욥의 소식을 듣고 각 처에서 찾아온 친구들이 등장한다. 엘리바즈, 빌닷, 소바르가 그들이었다(2, 11). 그들은 욥의 비참해진 모습을 보자, 멀리서부터 겉옷을 찢으며 비통해하고, 말문이 막힌 채 7일간을 땅바닥에서 지낸다. 유다인들의 전형적인 애도(哀悼) 표현이다. 욥기의 본론은 욥이 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드디어 자신의 삶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로써 친구들과 욥의 대담(본론)이 시작된다. 남들만 안보면 버리고 싶다 『남들만 안보면 버리고 싶다』. 일본의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가 몰래 버리고 싶다는 것의 정체는, 놀랍게도, 「가족」이었다. 언제나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에 담아왔던 그가 천륜을 저버리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놀라웠고, 인간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마음이겠지만 검열 없이 그대로 폭로된 솔직함이 섬뜩했다. 언제나 곁에 있어줄 것 같지만, 정작 각자는 늘 떠날 생각을 하고, 버릴 수만 있다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것,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우리들의 서글픈 현실이기도 하다. 욥의 아내가 욥을 원망하는 모습은 한 가정이 파괴되는 궤적을 잘 보여준다. 남편의 무기력함과 가련해진 모습을 수용할 수 없어, 과장된 난폭함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지만, 어쩌면 그것도 욥에 대한 사랑일지 모른다. 사랑하고 기대한 만큼 더 고통스럽고, 더 폭력적이 될 수 있는 곳이 가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는 구려』(2, 10) 라는 욥의 지적대로, 그녀의 문제는 너무도 평범한 시각에 있었다. 그녀가 대적해야 했던 것은 애꿎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에게 들이닥친 고통스런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혼과 노인문제가 심각해져 가는 요즈음, 가족 스스로에게 행사되는 가학과 폭력은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는 것, 부조리와 모순으로 범벅된 현실이라 하더라도 회피하지 말고 함께 힘을모아 대면해야한다는 것, 그 어떤 현안보다 진지하게 성찰되어야 할 이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한다. [가톨릭신문, 2003년 12월 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태어난 날’ 저주하는 욥 길을 걷던 두 친구가 한 아기의 탄생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은 『태어난 아기가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구나. 가서 축하합시다』라고 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려고…축하는 무슨 축하요!』 라고 응수했다 한다. 이번 주에 살펴보게 될 욥기의 본론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의 절규로 시작된다(3장). 본론(3,1~42,6) 산문(narrative)으로 진행되던 내용은 본론에 들어서면서 운문(poetic)으로 바뀌고, 욥의 태도 역시 급변한다. 지금까지 모든 것에 모범적이던 바른생활 사나이의 미담(美談)은 간데 없고, 복수는 나의 힘(?)이라고 성토하는 분노의 모습만 존재한다. 본론은 세 친구들과의 대화(3~31장) → 엘리후의 변론(32~37장) → 하느님의 등장(38장~42, 6)으로 진행되는데, 먼저 「세 친구들과의 대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세 친구들과의 대화(3~31장) 개관 이 부분은 매우 긴 분량으로 되어있는데, 양적인 비중을 통해 그 중요성이 암시되고 있다. 저자는 장황하고 체계적인 서술을 통해 욥이 왜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전통적인 입장에서 피력하고, 아울러 이 교의가 실제 삶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욥의 고독한 저항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1) 친구들의 논리 욥을 침통히 바라보던 세 친구들은 그의 고통을 위로한다며 각자의 입장을 표현한다. 그들의 입장은 「인과응보」적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까닭 없는 고난이란 없다」는 유다 정통 교리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즉, 욥의 고통은 그의 죄에 근거하고 있으니 어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다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 친구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 ① 엘리바스 ; 『…불의를 심은 자와 재앙을 뿌리는 자는 그것을 거두기 마련이라네』(4, 7~8). ② 빌닷 : 『…그분께 죄를 지었다면, 그분께서 그들을 그 죄과의 손아귀에 넘기신 것이네』(8, 3~4). ③ 소바르 : 『자네가 마음을 곧게 하고 그분께 손을 벌린다면…자네는 고통을 잊게 되고…생애는 대낮보다 밝게 일어서고…아침처럼 되리』(11, 13~17). 그러나 이러한 친구들의 충고는 욥에게 그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불행과 탄식, 배신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뿐이었다. 2) 욥의 논리 욥은 친구들이 제시한 원리원칙만으로는 인생의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음을 반박한다. 죄 없이 살아왔는데도 당하는 고통에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러한 욥의 저항을 통해 고착된 원칙만으로 삶과 인간을 평가하는 진부한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욥의 입장을 들어보자. 『내 생명이 내겐 메스꺼워…왜 저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소서. 학대하시는 것이 당신께는 좋으니이까』(10, 3). 결국 욥은 법정용어를 적용시켜가며 하느님께 도전한다(13, 19 참조). 욥기에 「소송」(히브리어 「리브」)이라는 단어는 모두 11번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욥은 하느님을 피고로 몰아간다. 욥의 연설은 『전능하신 분의 말을 듣고 싶다』(31, 35)는 것으로, 즉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본론과 결론(하느님의 등장; 38장)을 이어주는 문학적 복선으로 작용한다. 살아갈 수 있는 힘 서두에서 언급한 두 사람의 대립적 태도는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 태어난 날에 대한 저주는,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기대 때문에 생기는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을 저주해본 사람은, 그만큼, 삶을 살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야심과 애착이 곧 삶을 실제로 사는 능력은 아니기에 문제는 발생한다. 삶을 저주하거나, 폐기처분 하기에 앞서 먼저 자문해야할 것은, 삶을 사는 능력을 충실히 키워왔는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삶에 지칠 때, 나를 구원할 유일한 해답은, 바로 그 삶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 삶이 진저리 쳐지게 힘든 것이라 하더라도…. [가톨릭신문, 2003년 12월 2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엘리후, 고통을 새롭게 정의 「타인과의 대화」라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과 갈등의 시작일 때가 있다. 자신의 입장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을 상대할 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게 그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이미 생겨났을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신명기적 의식이라는 전통적 잣대만을 가지고 자기 이론을 피력하던 친구들은 결국 그들의 높은 이상과 고상한 논리성에 갇혀, 이론의 범주 밖에서 존재하던 욥의 「실제적」 고통과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이유가 무의미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바로, 자신들이 배운 것만을 믿고 그것을 타인에게 설득하겠다던 오만함과 그로 인한 치밀한 폭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엘리후의 등장(32~37장) 자기 변론에만 급급하던 욥과 세 친구는 결국 타결점을 찾지 못한 채 서로에게 상처만을 입히고, 급기야는 말하기를 포기해버린다. 이러한 대화의 실패와 그로 인한 무거운 침묵을 욥기 32, 1은 또 다른 친구 엘리후의 등장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등장과 연설(32~37장)은 본론의 첫 부분(세 친구와의 논쟁: 3~31장)과 끝 부분(하느님의 응답: 38~42, 6)을 연결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물론 이에 반대하는 이도 있다. 베르너, H. 슈미트 같은 이는 엘리후의 등장이 오히려 본론의 처음과 끝을 단절시킨다고 주장한다). 엘리후는 이미 등장했던 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자신의 첫 태도를 취하는데(32, 2), 그의 분노는 욥만이 아니라 세 친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욥의 주장에 변변한 대답조차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세 친구들에 대한 비판이었다(32, 3). 엘리후 연설의 신학적 의미 엘리후의 연설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고난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엘리후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고통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고난」은 인간이 자기 중심 주의를 벗어나 진정한 하느님의 존재를 만나고 알게 하는 교육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를 그 고통으로 구하시고 / 재앙을 통하여 그 귀를 열어주십니다』(욥 36, 15). 이러한 고난 이해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오던 세 친구들의 입장을 전복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고통을 죄의 결과, 벌로서만 이해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오히려 진정한 삶과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후 연사의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업적을 찬송하는 찬양시가 등장하는데(36, 26~37, 24) 이는 본론의 끝 부분, 즉 「하느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엘리후 연설의 후대 첨가 근거 이러한 엘리후의 연설은 비교적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유는, 1) 고통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라는 비교적 후대의 해석을 보여주었다는 점, 2) 세 친구가 보여준 실패는 기존의 지식인들(전통 지혜학파)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며 이에 대한 유감 표현이라는 점. 즉 그들의 이론은 인간의 고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데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 3) 엘리후가 언급되는 곳은 오직 여기뿐이라는 점 등이다. 세계적 성서학자 알롱소 쇠켈은 엘리후의 연설이 욥기의 원저자보다 한 두 세기 후에 살았던 한 독자에 의해 첨가된 부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왜 살아야 하나 「왜 살아야 하는지」, 에 대한 정답은, 역설적이게도,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 즉 물리적으로는 아무리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절박함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 상황 「고통」은 내가 왜 살아야하는지 그 정답을 알게 하고, 이를 통해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견디어 낼 내면의 힘을 갖게 하는 지혜와 교육의 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욥기는 분명 절절한 한 인간의 슬픈 사연을 서술하고 있지만, 절대로 「비극적 이야기」는 아니다. 비극을 통해서, 역으로, 삶의 희망과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을 뿐.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욥의 내면적 침묵 삶을 살면서 만나게되는 불가해(不可解) 중에, 그런게 있다. 이미 환멸과 증오를 충분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멀어지지 못하는 것, 그리하여 여전한 환멸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직감하면서도 그냥 그 자리에 있고자 하는 것, 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욥은 이미 하느님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을 느끼고 그 만큼 절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전가한, 그래서 이미 등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된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 손을 내미는 이중의 모순적 상황을 본론의 마지막 부분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욥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고통의 원인이며 동시에 구원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욥기가 제시하는 드라마틱한 삶의 메시지이며 또한 불가해한 하느님 이해(神觀)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등장(38~42, 6) 「하느님의 등장」(38, 1~42, 6) 부분은 본론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전개된 논의의 절정을 이루며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주님의 첫째 말씀과 욥의 답변(38, 1~40, 5) 2) 주님의 둘째 말씀과 욥의 답변(40, 6~42, 6). 즉, 이 부분 역시 매우 체계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하느님의 연설(A) -> 욥의 답변(B) -> 하느님의 연설(A') -> 욥의 답변(B')의 순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하느님의 연설(38, 1~40, 2) 드디어 등장하신 하느님은 욥의 고통에 대해 속시원한 이유를 제시하는 대신,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만을 밝히신다. 『누가 땅에 주춧돌을 놓았느냐?』, 『누가 문을 닫아 바닷물을 가두었느냐?』등 38장부터 40장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질문들은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러므로 인간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간 본연의 한계상황을 상기시키고 있다. 결국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므로 세상은 그분의 시각에 의해 조성되고 운영되는데, 욥의 문제는 자신의 경험 중심으로, 즉 자기 중심적 시각으로 이 모든 이치를 이해하려 했기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세상을 인간 중심적 시각으로 보려는 태도를 비판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의 해체」를 시도하고, 역사와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그 주인이신 하느님이심을, 즉 「신중심주의」적 시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시선과 판단을 기준으로 전체를 보려고 할 때, 인간은 억울하고 불만스런 현실만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세상!」, 이라는 표현은 또 하나의 절대 진리이다. 세상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세상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기 때문이다. 욥의 답변(40, 3~5)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시선만으로 세상을 보려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깨달음을 통해 이제 욥은 말하기를 포기한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40, 4~5). 지금까지 무수히 발설해온 변론을 그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각,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이요 동시에 자기 생각과 이론만에 갇혀, 더 큰 조화와 질서를 보지 못해왔음에 대한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욥은 내면적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성탄과 새해 지난 대림절, 내 손으로는 처음으로 트리를 꾸미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짝이 전구, 작은 방울, 리본 모두 각각 예쁘지만,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적절한 자리에 배치될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 작은 방울은 반드시 그 자리에 배치될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왜 이 처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달은 자라면 욥처럼 항변을 철회하고 수용과 침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진지한 자기 표현일 수 있다. 가난하게 태어나신 아가 예수님의 고요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으로 인한 조용한 평화가 새해에는 모든이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원해 본다.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주님과 마주한 욥 「이미지」가 곧 전략인 것이 요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지(그림자, 겉모습)만으로는 승부를 걸 수 없는 곳이 있다. 가정처럼 가까운 이들에 의해 형성된 공간에서이다. 이미지만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 노출되어 생활해야하고, 또 그렇게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유비무한이라는 방어기재 역시 쉽게 해제되고 만다. 사랑하는데도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각자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지속시킬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는 이미지 뒤에 숨겨놓은 진짜 맨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은 곧 갈등과 고통의 시작이기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론의 마지막 부분인 「하느님의 등장」(38, 1~42, 6) 후반부(「하느님의 두 번째 연설」(40, 6~41, 26)과 「욥의 응답」(42, 1~6)으로 구성됨)은,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닌 서로의 맨 얼굴을 마주한 욥과 하느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을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내부의 질서와 정체성을 찾게되는 욥의 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40, 6~41, 26) 이 부분은 하느님의 폭력적 이미지(9장 참조)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하느님이, 욥이 오해해온 것처럼 무차별하게 인간에게 폭력을 전가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과 폭력의 세력(괴물 「베헤못」 혹은 「레비아탄」으로 은유됨 40, 15~16. 19 참조)을 굴복시키고 조정하는 분임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혼돈의 세력을 조정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역시 당신의 피조물들이라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시선을 벗어나 살 수 없는 피조물이듯, 아무리 강력한 악의 세력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이다(40, 15 이하). 이 부분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이 이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완전히 쳐 없애지 않으시고), 어느 시대에도 예외 없이 존재해온 악과 부조리의 잔존(殘存)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자는 인간의 삶과 악이 언제나 공존하게 되어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은 하느님에 의해 컨트롤되고 극복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욥의 답변(42, 1~6) 욥은 무죄한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과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부정해온 것이 사실은 자신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이기적 판단이요 오만이었음을 깨닫게된다. 이러한 반성과 함께 욥은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하느님이 「소문으로 들어 알아온 분」이었음을 고백한다(42, 5). 「소문으로 알게된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체험된 하느님일 뿐, 사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아무리 성서를 많이 알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해있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신학자들의 화려한 이론에 의해 전달된, 즉 「소문에 의해 전달된 하느님」만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발생하는 모순이기도 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만나 구체적 관계로 들게 한 사건은 「원체험」이라 불리는 출애굽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물론 그 이전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그들의 하느님」이었을 뿐이다. 즉 이스라엘은 「누구 누구의 하느님」(소문으로 알게된)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실존에 의해 체험되어지고 고백된 「나의 하느님」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되고, 비로소 하느님과 구체적인 관계에 들게된다. 이 관계의 가시적 표현이 시나이 계약임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욥 역시 이제 소문에 의해 「이미지」로만 알아온 하느님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직접 체험된 하느님을 알게되고 소중한 내적 평화를 간직하게 된다.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삶의 문제를 타인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소문에 귀기울일 필요 없이 자신의 내면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고요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백 번 물어보는 것보다 내가 체험한 단 한번의 만남이 소중한 이유,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닐까.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자신의 착오 깨닫게 된 욥 솔직히 나는 자연과 친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릴 때는 기회와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고 어른이 된 지금은 시간과 여유, 돈이 없다. 그러던 중, 지난 가을 학생들과 함께 산에 갈 기회가 생겼고, 오랜만의 산행을 통해, 「산을 직접 타보지 않고서는 산에 갔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오른 산은 광주 내려오는 길에 늘 보아왔던 산이고, 언제 봐도 아름답고 멋있어서, 보는 이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던 그런 산이었다. 그러나 산행을 통해, 지금껏 내게 익숙해온 그 아름다움은 추상으로서의 멋일 뿐, 살아있는 것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산을 어렵사리 오르고 난 후에 다시 그 길에서 본 산은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살아있는 너」로서의 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 산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관계에 들게 된 것이다. 욥은 하느님을 알아왔지만, 바닥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그저 「소문에 의해 전해진 하느님」을 믿어왔다. 당연히 그런 하느님은 살아있는 구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구체적 체험을 통해 각인된 하느님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기억으로 실존하게 된다. 욥기의 결론부분(42, 7~17) 우리는 지금까지 욥기의 본론 부분을 살펴보았다. 「세 친구들의 등장과 대화」로 시작된 본론은 「엘리후와의 대화」, 「하느님의 등장」 순으로 전개되었고, 그 내용은 모두 운문형식을 띄고있었다.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폭풍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되면서 욥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원인을 깨닫게 되고, 이 모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기나긴 고통의 바닥을 보게된 것이었고, 이로써 욥기의 결말 부분이 도입된다. 결말은 시작할 때(서론)의 문체였던 「산문」이 다시 도용된다. 운문인 본론과는 다른, 분명한 구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의 내용(욥의 회복) 욥이 자신의 착오를 깨닫게 되자(42, 6) 지금까지의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는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훨씬 큰 축복을 받게된다. 언젠가 이 지면을 통해 백설공주의 사과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작은 조각 때문에 찾아온 죽음이 아주 사소한 계기나 충격에 의해 쉽고도 간단하게 풀릴 수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갑자기 머리가 좋아졌다는 얘기이다. 믿지 못할 얘기지만 나는 그 행운을 터무니없는 요행으로 보지 않는다. 죽은 것 같은 재능이라 할 지라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능력과 생명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소함 속에 녹아있던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욥기의 결론에 제시된 하느님의 보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1) 친구들에 대한 심판(42, 7~9)과 2) 욥의 회복(42, 10~17)이다. 하느님은 욥의 고통자체를 실존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원리나 공식(신명기적 인과율)에 맞춰 설복시키려했던 친구들에게 경고와 심판을 내리신다. 이론과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요, 그 사람이 가지는 존엄한 가치임을 재차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이어 하느님은 욥에게 이전에 소유했던 것의 갑절에 해당되는 보화와 자녀 축복을 내리신다. 이야기는 욥이 늦게까지 수를 다하며 살았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바닥에서 만난 것들 바닥까지 가지 않고서는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 설사 중간에 어영부영 해서 돌아왔다 하더라도 그건 돌아왔다고 믿고 싶은 마음의 반영일 뿐, 나는 여전히 잘못된 채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삶은 공평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내면의 바닥을 보아야하고, 거기에서 만난 하느님의 간절한 사랑을 통해 반등할 때 진정한 삶의 가치와 정체성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산행은 내게 소중한 진실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산에 가질 못했다. 여전히 시간과 돈이 없어서였고, 산행 후 며칠을 골병든 채 지내야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소중한 체험은 한번으로 족하다는 간사한 영합도 한몫 했다. 새해에는 운동 좀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운동에 자존심 걸 필요가 있을까를 고민하며 금새 게으름과 타협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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