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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마르코,마태오,루카 복음의 기사들이 왜 다르죠?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이효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5 조회수500 추천수0 신고

다음에 붙이는 글은 자료실에서 복사해온 것입니다.

성경자료실에 가시면  312 공관 복음서 입문 , 311신약성서 입문 이 한글 파일로 있습니다.

312번 글의 일부를 아래에 붙입니다. 자세한 것은 함 찾아가 보셔요^^분량이 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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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 복음서 입문

  

 1. 한 복음과 여러 복음서


‘복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용어가 뜻하는 대로 구원의 ‘기쁜 소식’(마르 1,1 각주 참조),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의 선포를 뜻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이해하는 바이기도 하다.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선포이다. 이러한 연유로 복음은 본디 책이 아니었다. 문학적 또는 역사적 작품이 아니었다(150년쯤에 와서야 유스티노가 처음으로 ‘복음’이라는 낱말로써 ‘복음서’를 가리키게 된다. 곧, 우리말에는 ‘복음’과 ‘복음서’라는 용어가 따로 있지만, 그리스 말을 비롯한 서양 언어들에서는 한 용어가 이 둘을 다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네 책에 각각 ‘복음’이라는 제목이 달린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이야기에서도 그렇지만, 네 저자가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 및 행동과 이루는 고유한 관계 안에서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함을 뜻한다. 곧 서로 조금, 때로는 많이 다른 이 고유한 관계에 따라 네 개의 복음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정확성을 중시한다. 늘 확증되고 재확인되는 사실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복음서 문학은 조리가 없어 보여 당혹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각 복음서의 줄거리에 연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러한 모순들을 극복할 방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찾아 내지 못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들이 복음과 관련된 더 고차원적인 문제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학 유형의 문제들로 이어진다면,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모든 글은 처음부터 일정한 문학 유형에 따라 쓰여진다. 편지를 단편 소설처럼 쓰거나 시를 신문 기사처럼 쓰지는 않는다. 글을 접하는 이도 문학 유형에 따라 그것을 이해한다. 광고 문구를 보면서 신문 기사처럼 읽거나 시를 과학 논문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문학 유형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형식과 어투, 논리와 목적을 지닌다.

복음 역시 고유한 문학 유형을 이룬다. 복음서들을 편집한 이들은 책상에 앉아 완전한 목록을 갖춘 문헌들을 가지고 나자렛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분의 전역사를 기록하려고 했던 저술가가 아니다.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했던 방식은 그러한 것과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사람들의 갖가지 병을 고쳐 주시며 여러 가지 뜻 깊은 행동을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다. 그리고 직접 예고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이제 열렬한 설교가가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하신 모든 언행을 새로운 ‘눈’과 ‘마음’, 곧 ‘파스카 신앙’으로 돌아보게 된다. 이 파스카 신앙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리고 각 교회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그분께서 하신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약 사십 년 동안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여러 구전(口傳) 전통이 형성된다. 설교와 전례와 교리교수 등을 통하여, 이 전통들이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게 되는 모든 자료를 보존하고 전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들 가운데 일부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글의 형태를 취하였을 수도 있다. 신앙 고백처럼 전례에서 이용된 고정 표현, 예수님의 여러 어록(語錄), 그리고 틀림없이 매우 일찍부터 명확한 구조를 지녔을 일련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수난사 등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은 초기 공동체들의 생생한 삶 속에서 이미 여러 가지 형태를 갖춘 이러한 전통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이 형태들은 ‘기쁜 소식’이 글로 완전히 고정되기 전에 이미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키우고 신도들을 가르치며, 갖가지 환경에 적응하면서 여러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고 전례에 생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 대한 새로운 숙고의 결과를 내놓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오류들을 바로잡으며, 때로는 적대자들의 반론에 대답함으로써 활기찬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을 이어받아 자기들의 고유한 관점에 따라서 기록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작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서를 저술한다. 그들 역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가르치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답을 제시하려고 애를 쓴다.1)

각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관점은 나중에 보기로 한다. 지금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서 전통과 형성의 역사에 관한 작업들이 이루어진 뒤로 더 이상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중요한 사실 하나만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복음서들이 여러 가지 특수한 세부 사항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초대 공동체들의 믿음과 삶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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