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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요나 1,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091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요나 1,2)

 

 

요나서를 이해하고 싶다면 요나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잠시 잊어야 합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예언서가 쓰일 당시 실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요나서를 이해할 때 요나를 언급한 신약 성경의 구절에서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요나서의 줄거리만 아는 채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1,1)

 

요나서는 저자를 묻기 전에 요나서의 역사성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나서에서는 요나를 그 책의 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예언서들은 특정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인 반면, 요나서는 다른 사람이 요나에 대해 말하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요나서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 요나라는 예언자를 다룬 책일까요?

 

요나서에서는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1,1)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2열왕 14,25에 따르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던 예로보암 2세 때에 활동한 예언자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 요나는 갓 헤페르 출신으로 이스라엘이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리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나옵니다. 아마도 요나서의 저자는 열왕기에 언급된 그 예언자의 이름을 빌려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요나서가 기원전 8세기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나서는 허구적 이야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사용된 언어를 보면, 요나서에 쓰인 히브리어는 문법이나 어휘가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책인 코헬렛이나 다니엘서에서 사용된 것과 비슷하고 아람어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니네베에 대해 구체적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모습만 서술하고 있어서 동시대의 역사 기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기원전 8세기의 아시리아라면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엄청난 세력이었는데, 요나서의 니네베에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로보암 2세 시대에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도 아니었고, 니네베 주민 전체가 회개했다는 것은 어떤 역사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연성도 매우 적습니다.

 

또한 신학적인 면에서 회개라는 주제는 유배 이후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고, 이방인들의 구원이라는 주제 역시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요나가 정말 고래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고도 살아 올 수 있었을까요?

 

이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다른 문학 유형에 속한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 가르침을 주기 위한 허구적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교훈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요나서는 지혜문학과 공통점을 가집니다.

 

요나서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적 기록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요나가 어떻게 사흘 동안 살 수 있었을까를 밝히기 위하여 고래를 해부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여러 가지 매우 우연적 요소들과 더불어 요나가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지냈다는 이야기는, 저자가 이 책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독자에게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관찰은 이 책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이에 덧붙여 집회서 저자가 요나서를 다른 소예언서들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집회 49,10 참조), 이 책의 작성 연대는 대략 기원전 5-4세기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요나 – 니네베

 

이제부터 요나서에 대한 해석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호에 한 가지, 다음 호에 두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요나서의 줄거리를 잠시 돌아보면, 요나는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거부하고 타르시스로 가려고 하지만, 배가 풍랑을 만나고 선원들은 요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알아 그를 바다에 던집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사흘 후 뭍에 뱉어 놓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니네베로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진다고 선포합니다. 온 니네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자, 하느님은 마음을 돌이켜 내리겠다고 하셨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입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하느님은 더운 낮에 그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게 하셨다가 다시 말라 버리게 하십니다. 그런 아주까리 때문에 화를 내는 그에게 하느님은, 그가 아주까리를 심고 기르지도 않았는데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그렇게 화를 낸다면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1) 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첫 번째 해석은 주로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적으로 해 온 것으로, 요나가 니네베에 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였고,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요나는 그런 니네베가 회개하여 구원되기를 바라지 않고, 차라리 그 죄 때문에 멸망해 버리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요나를 통해서 니네베를 구하셨습니다. 요나의 뜻을 거슬러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해석에서는 주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요나서의 주제로 강조합니다. 특히 4장에서 시들어 버린 아주까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당신이 니네베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 주민들과 동물들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4장을 자세히 보면 하느님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그곳을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도성 안에 있는 무수한 생명 곧 짐승과 어린이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자비를 베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나서가 작성된 시대의 배경을 고려할 때 특히 의미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앞에서 설명한 언어적 또는 신학적 이유를 근거로 요나서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아마도 기원전 5-4세기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요나서의 내용은 에즈라-느헤미야의 노선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갇힌 동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요나서의 저자는, 당시 이스라엘이 지녔던 폐쇄적 태도를 넌지시 비판합니다. 니네베에 가지 않으려 하고 하느님께서 니네베를 멸망시키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요나라는 인물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 때문에 다른 민족들의 구원에는 눈길을 돌릴 수 없었던 에즈라 시대의 유다 공동체. 유다 왕국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이고, 이제는 오직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세워야 했던 유다인들은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1,9)라고 말하던 요나처럼 자신들의 믿음을 강하게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몰두한 결과 그들은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도 그런 모습이 없지 않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여 살고 있던 이들에게, 느헤미야는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내보내게 합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지나친 일이지요.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은 그만큼 철저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서의 저자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주인공 요나를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통하여 동시대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마구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의 등을 토닥이며, 하느님께서는 너처럼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그의 귀에 속삭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흠 없는 삶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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