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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20: 예루살렘의 성벽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6 조회수4,895 추천수1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0) 예루살렘의 성벽


오늘날 예루살렘에는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성문들이 있다. 현재의 성벽은 기원후 16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역사 안에서 길고도 다양한 변천 과정을 거쳤다. 성벽은 시기별로 확장되기도 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성벽의 변천 과정에 따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성경 안에서 다양하게 언급된다. 예루살렘과 그 성벽을 노래하는 시편의 다음 몇 구절들을 소개한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 우리 하느님의 도성 /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 아름답게 솟아오른 그 산은 / 온 누리의 기쁨이요 / 북녘의 맨 끝 시온 산은 / 대왕님의 도읍이라네. 하느님께서 그 궁궐 안에 계시며 / 당신을 성채로 드러내신다.”(시편 48,2-4) “거룩한 산 위에 세워진 그 터전, / 주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 하느님의 도성아 / 너를 두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컬어지는구나.”(시편 87,1-3) “그곳에 재판하는 왕좌가,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시편 122,5-7)

다윗 임금이 수도로 삼은 “다윗 성”(2사무 5,7)은 예루살렘의 동쪽 언덕에 위치한 작은 거주지였다. 이곳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일한 샘과 가깝고 양쪽으로 깊은 두 계곡이 있었다. 다윗은 계약 궤를 이 성 안으로 옮겼고, 그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28년)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도시를 확장해야 했는데, 계곡들 때문에 능선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1열왕 9,15에 따르면, 솔로몬 임금은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을 세웠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아시리아가 북 왕국을 침략했을 때 많은 피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 성 바깥 서쪽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임금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을 때 새로운 성벽이 서쪽 언덕을 둘러싸기 위해 세워졌고 도시의 규모는 네 배로 확장되었다. 2역대 32,5에 따르면 “히즈키야는 용기를 내어 허물어진 성벽들을 모두 쌓고 탑들을 높였으며, 성 밖에 또 다른 성벽을 쌓았다.” 여기서 묘사된 이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50년 가량의 유배 이후 귀환하였을 때 성벽을 다시 세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느헤미야(기원전 445-443년)는 페르시아의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우리는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자,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읍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시다.”(느헤 2,17) 느헤미야 당시 예루살렘 주민의 수는 많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규모는 솔로몬 당시의 도시보다 훨씬 줄어 들었다.

느헤 12,27-43는 예루살렘 성벽 봉헌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할 때, 사람들은 레위인들을 곳곳에서 찾아내어 예루살렘으로 데려왔다. 자바라와 수금과 비파에 맞추어 감사와 노래로 봉헌식을 기쁘게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가대가 모여들었는데, 예루살렘 주변 일대와 느토파인들의 촌락들, 벳 길갈, 게바와 아즈마 들판에서 왔다. 성가대는 예루살렘 주변에 촌락들을 세우고 살았던 것이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 다음, 백성과 성문들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였다. 나는 유다의 수령들을 성벽 위로 올라오게 하고, 큰 찬양대 둘을 세운 다음, 한 찬양대를 ‘거름 문’을 향하여 성벽을 타고 오른쪽으로 행진하게 하였다…. 그날 사람들은 많은 제물들을 바치며 기뻐하였다. 하느님께서 큰 기쁨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아이들도 함께 기뻐하니, 예루살렘에서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이 본문에는 당시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거름 문, 샘 문, 다윗 성, 물 문, 가마 탑, 넓은 성벽, 에프라임 문, 옛 문, 물고기 문, 하난엘 탑, 백인 탑, 양 문, 경비대 문과 같은 다양한 지명과 명칭이 소개된다.

기원전 2세기 전반부의 마카베오 항쟁 이후 예루살렘은 다시 성장하였다. 요한 히르카누스(기원전 134-104년)와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기원전 103-76년)와 같은 강력한 하스모니아 왕조의 임금들은 먼저 서쪽으로, 그 다음으로는 북쪽으로 예루살렘을 확대하였다. 그런데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은 놀랍게도 성벽은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안의 건축물들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경계가 동쪽 성벽의 역할을 하였다.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 5권 147-155에 따르면, 헤로데 아그리파 1세(기원후 37-44년)가 새로운 북쪽 성벽의 기초를 놓았고, 제1차 유다 항쟁(기원후 66-70년) 동안에 완성되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도록 명령한다. “로마 군대는 살인과 약탈로 분노를 발산했다. 분노의 대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자, 티투스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세 개의 망대, 즉 파사엘, 히피쿠스, 마리암메 망대와 도시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만은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곳을 나중에 예루살렘에 남을 로마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망대들은 예루살렘 도시가 얼마나 견고한 요새였는지, 그리고 이 도시를 정복한 로마 군대가 얼마나 용맹하였는지를 후손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대는 성벽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래서 장차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다.”(『유다 전쟁사』 7권 1-2) 성벽의 파괴는 티투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원후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사실상 완료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새로운 이름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에는 단지 로마 군대 제10군단의 주둔지만이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313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황제의 공적인 지지를 받게 되어 예루살렘은 새로운 종교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수님과 관련있는 장소들에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였다. 예루살렘 도시는 더욱 확대되었다. 5세기에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는 그리스도인의 시온 산과 본래의 다윗 성에 성벽을 세웠다. 637년에 예루살렘은 칼리프 오마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오늘날 예루살렘 성벽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2세(1520-1566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1537년에 북쪽 성벽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동쪽과 서쪽으로 계속 진행하였다. 남쪽의 성벽은 1540년에 완성되었다. 사실 당시에 남쪽 성벽 안에 시온 산을 포함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현재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는 평균 17m이고 전체 길이는 약 4km이다. 성 안, 즉 구시가(Old City)의 전체 면적은 1km2인데,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쪽은 그리스도인 지역, 북동쪽은 이슬람인 지역, 남서쪽은 아르메니아인 지역, 그리고 남동쪽은 유다인 지역이다. 시온 산과 다윗 성은 현재의 성벽 바깥에 위치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8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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