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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거룩한 전쟁: 야훼의 전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3,48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거룩한 전쟁 - 야훼의 전쟁

 

 

지난달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그 분배에 관해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서’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 땅을 정복한 후에도 이스라엘은 계속 주위의 적들과 전쟁을 하여야 했다(판관기와 사무엘서).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전(聖戰)의 개념과 그 요소

 

고대의 모든 민족들에 있어서 전쟁은 종교와 결부되었다. 전쟁은 신들의 명령, 혹은 적어도 그들의 허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또 전쟁에는 희생제사(犧牲祭祀)가 따르고 승리를 보장하는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이 수행되고, 이에 대해 노획물의 일부를 바침으로써 감사드리곤 했다. 이렇게 볼 때 고대의 모든 종교는 넓은 의미로 거룩한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하나의 ‘종교적인 차원’의 것으로 간주했다. 그 독특한 양식을 볼 것 같으면, 먼저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전쟁에 소집한다. 특별한 소집 방법의 하나는 가축의 뿔을 벤 후 그 피 흐르는 조각을 보내는 것이다(1사무 11,7과 판관 19,29의 비교). 진지에 모인 백성 즉 ‘야훼의 군대’는 엄격한 ‘종교 제도’의 규율을 따라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성결(聖潔)한 군대가 되는 것이다(1사무 21,5 이하). 전장(戰場)으로 행진하기 이전에 야훼께 ‘제사’를 드린다(1사무 7,9; 13,9.12).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에봇이나 거룩한 ‘제비’로써 (1사무 23,9-11; 30,7-8) ‘야훼의 뜻’을 물어 보아야 했으며(판관 20,23.28; 1사무 14,37; 23,2.4), 과연 전쟁을 하여야 할지 그리고 전쟁은 언제 해야 하는지를 그분이 결정하신다. “야훼가 적군을 너희 손에 불이셨느니라.” 하는 완료형의 약속이 하느님의 사람의 입을 통하여 울려 퍼진다. 야훼께서 몸소 군대의 선두에 서시고(판관 4,14; 2사무 5,24과 신명 20,4의 비교), 이때 적군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힌다. ‘터루아’(Teruah)는 크게 외치는 소리인데 이 소리가 울려 퍼짐으로써 전쟁은 시작된다. 이 외침은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축제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을 완전히 섬멸함으로써 싸움은 끝난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야훼의 명령에 의해 수행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거병(擧兵)할 때에 그들은 야훼의 백성 또는 하느님의 백성(판관 5,13; 20.2), 하느님의 부대(1사무 17,26) 혹은 야훼의 군대(출애 12,41; 7,4)라 불리었다. 군인들은 제의적(祭儀的)으로 정결한 상태에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거룩해야 했다”(여호 3,5). 그들은 수절 상태(守節狀態)를 지켜야 했고(1사무 21,6; 2사무 11,11), 야훼께서 당신의 부대와 야영하시기 위해서는 진지 전체가 이 정결의 의무를 지켜야만 했다(신명 23,10-15).

 

야훼께서 싸움 중에 현존해 계심에 대한 볼 수 있는 표시가 ‘성궤’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궤는 광야에서 백성들의 끝없는 방랑 동안 줄곧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이 방랑은 움직이는 군대의 행진으로 묘사되곤 했다. 민수기 10장 35-36절은 고대 전투 때의 고함을 포함하고 있다. 성궤가 일어날 때에 백성들은 “야훼여, 일어나시어 당신 원수들을 흩으소서.” 하고, 성궤가 놓여질 때에는 “야훼여, 이스라엘의 무리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고함쳤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위해 ‘성별’(聖別)되었을 때에 성궤는 그들을 요르단 너머로 인도했고(여호 3,6), 예리고 정복 때에 그들이 그 성벽 주위로 장엄한 행렬을 했을 때에도 성궤는 동반되었다(여호 6,6-7). 후에 다윗 시대조차 성궤는 라발 ? 암몬 앞에 모든 이스라엘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2사무 11, l1). 아벡에서의 전투는 특별히 교훈적이다(1사무 4장). 즉 블레셋인들의 승리는 이스라엘에 성궤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성궤는 실로에서부터 옮겨지고, 그때에 블레셋인들은 “하느님이 진지에 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성궤가 승리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성궤를 적에게 빼앗긴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재난으로 느껴졌고, 군대 자체의 전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성궤가 아벡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전쟁의 신호인 ‘터루아’를 외치는데(1사무 4,5-6), 이 외침은 성궤에 관계된 제의(祭儀)의 한 요소이며(2사무 6,15) 종교적인 외침이다.

 

1) 신뢰

 

성전(聖戰)에 있어서 투사들은 승리하리라는 확신으로 안심한다. 그것은 “야훼께서 벌써 원수들을 그들(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다”(여호 6,2; 8,1.18; 판관 3,28; 4,7; 7,9.l5; 1사무 23,4; 24,5 등). 신앙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스라엘은 ‘신앙’을 가져야만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여호 8,l; 10,8.25). 신앙이 없어서 두려워하는 자는 필요한 종교적 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이며 그는 집으로 보내져야 했다(판관 7,3).

 

이스라엘은 비록 외적인 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을 때에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경고를 항상 받아 왔다. 야훼스트에 의하면 에집트 군대의 추적을 받았을 때에 모세는 갈대 바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설 터이니 모두들 진정하여라”(출애 14,14). 신명기 20장 1절 이하에서 모인 군대 앞에서 행한 사제의 전쟁 격려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원수를 치러 싸움터에 나갔다가 적군이 너보다 많은 말과 병거를 몰고 나타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해주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편에 서주신다……. 오늘 너희는 원수를 치러 싸움터로 나간다. 겁내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도망치지 말라. 원수를 앞에 두고 떨지 말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진격하시어 너희의 원수를 쳐주시고 너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1-4).

 

이 말은 이사야가 아람-에프라임 전쟁 때에 경고한 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말라……. 정신을 잃지 말라”(이사 7,4). 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대신에 외국과의 군사적 동맹이나 군대의 장비와 힘을 믿는 그릇된 신심과 싸우는 것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시편 20장 8절, 146장 3절, 즈가리야 4장 6절에도 이러한 사상이 메아리치고 있다. 이러한 ‘신앙’에 대한 요구는 원래 야훼의 전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야훼가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야훼께서 모든 무기를 없애 버리는 날을 고대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기대는 온 세계가 평화의 날을 맞이하기 시작할 때에 나타날 것이다(시편 46,9 이하; 이사 2,4; 9,4; 즈가 9,10).

 

2) 야훼의 개입

 

전투 중에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는 이는 야훼이시다(여호 10,14.42; 판관 20,35). 그분이 인간의 활동에 관여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야훼의 영은 인간을 사로잡아 싸움에 충분히 승리 할 수 있도록 강하게 만든다. 이는 대부분의 판관(判官)들, 그리고 사울이나 다윗 등의 왕들의 경우가 다 그렇다. 하느님의 영은 인간에게 임하여 그를 감동시키고 또 옷처럼 “입혀져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구원 행위를 행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구원자’(사울)를 싸우게 만든 한 기본 요소는 이 자발적인 하느님의 구원 행위였다(1사무 11,13).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敬畏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이 자원하여 종군했고(판관 5,2) 또 승리할 수 있었다. 다윗도 야훼의 영에 의해 감동되었다는 사실을 사무엘 상권 16장 13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보잘것없던 한 사람을 등장시키는 데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음을 의미한다.

 

(2) 야훼는 사제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명령하심으로써 모든 사건을 처리하신다. 이때 거룩한 제비인 우림(Urim)과 둠밈(Thummim)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민수 27,21; 판관 1,1; 1사무 23,2.6-9; 30,7-8; 14,37; 28,6). 꿈도 야훼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판관 7,13 이하; 1사무 28,6.15).

 

(3) 야훼는 적군에게 공포감을 주시고(출애 23,27 이하; 신명 7,20.23), 적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시고(판판 4,15; 7,22; 1사무 7,10; 14,20), 그들의 마음을 녹게 하시고(여호 2,11), 신적인 공포로 그들을 치신다(1사무 14,15).

 

(4) 전쟁 중에 야훼는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하신다. 드보라의 싸움에서는 폭풍우로써(판관 5,20 이하) 적을 치시고, 여호수아 10장 11절에서는 도망치는 가나안인들 위에 주먹 같은 우박을 떨어뜨리시며, 사무엘 상권 7장 10절에서는 우뢰로써 블레셋인들을 물리치시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갈대 바다에서 야훼는 어둠과 바닷물로 에집트인들을 쳐부수신다(여호 20,7). 후대의 전설에서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룻밤에 파멸의 천사가 나타나 산헤립의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명의 군사를 전멸시킨다(2열왕 19,35). 전투 중에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는 이는 야훼이시다(여호 4,42; 판관 20,35). [경향잡지, 1993년 7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3) 전멸 행위

 

성전(聖戰)의 마지막 행위는 정복된 적들과 그 노획물에 행해지는 전멸 행위인 ‘헤렘’(herem)이다. 그 어원의 뜻과 동사형의 용법에 의하면, ‘헤렘’은 어떤 것을 ‘분리하는’ 즉 어떤 것을 속된 사용으로부터 떼어 내어 거룩한 사용을 위해 보관하는 사실을 뜻한다. 혹은 헤렘은 이러한 방법으로 ‘분리된’ 그 어떤 것 -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고 하느님께 성별된 것 - 을 뜻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나중에 일반적인 경신례적 용어로 통하게 되었지만(민수 18,14; 레위 27,21.28; 에제 44,29) 원래 그것은 성전 의식에 속했다. 즉 그것은 승리의 결실을 야훼께 드린다는 것이다.

 

헤렘의 정확한 형식은 성서 본문들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헤렘은 야훼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다(신명 7,2; 20,17; 여호 8,2; l사무 21,2).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예외도 용납지 않는다. 즉 예리고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죽여야 했으며, 도시와 그 가구들은 다 불태우고 금속 제품들은 전부 야훼께 바쳐졌다(여호 6,18-24). 아간은 헤렘의 규칙을 깨뜨림으로써 백성들에게 저주를 초래했고, 따라서 그는 처벌되었으며 그가 훔친 물건들은 파괴되었다(여호 7장). 사울이 아말렉족과 전투하는 데(1사무 15장)도 예외 없이 모든 것을 전멸시켜야 했는데, 그가 이 규칙을 엄격히 지키지 않아 처벌된다(9절). 가나안 도시들에서 제의 도구들을 파괴할 것을 신명기 7장 5절과 25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헤렘은 야훼를 부정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모든 이스라엘의 도시들에 엄격히 적용되었다(신명 13,13-18).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완전 전멸을 명하는 것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 주된 이유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신앙은 굳건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더욱이 가나안 종교(바알 종교)의 유혹이 대단했기 때문에 여기에 물들지 않기 위해 헤렘의 규칙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통해 방어하고자 했던 것이다.

 

헤렘(완전 전멸)은 어떤 성서 본문들에서는 어느 정도 제한되었다. 즉 그것은 이방인인 모든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었으나, 가축이나 가재도구들은 노획물로서 헤렘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신명 2,34-35; 3,6-7; 여호 8,2.27; 11,14). 처음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이방도시들을 점령했을 때에는 남자들만이 처형되었다(신명 20,14). 후대에는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가나안 사람들과 서로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바알 종교에 많이 동화되어 갔다.

 

이러한 성전(聖戰)의 구성 요소들을 한 전쟁 기사에서 다 찾아볼 수는 없다. 여러 전쟁 기사들을 종합해 봄으로써만 알 수 있다. 야훼의 전쟁은 제국주의적인 침략 전쟁이 아니라, 항상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신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비전’이다. 정착 전쟁도 야훼 전쟁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정착 전쟁이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여한 생존 장소를 확보하기 위한 것임을 말해 준다. 다윗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싸운 것도 야훼 전쟁으로 간주된다. 야훼 전쟁이란 말은 전쟁 때에 야훼의 도움을 ‘정당한 도움’으로 이해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야훼의 구원 행위는 “야훼의 의로움”(판판 5,11; 1사무 12,7)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권리 행사’이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성전

 

앞에서 살펴본 성전의 개념들이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 판관기 4장과 5장에 나타난 시스라에 대한 드보라와 바락의 전투(4,6-7.14-16; 5,2.4.8.9.13.20.23). 4장과 5장에서 운문이나 산문은 모두 실제 사건과 아주 가까워서 전투 참가자들이 이 전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해 준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거룩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2) 판관기 6장부터 8장에 나타난 미디안족들에 대한 기드온의 전투(6,34-36; 7,2.3.7.9-10.14-25.20-21; 8,3.7).

 

3) 사무엘 상권 14장에 나타난 요나단과 불레셋인들의 전투(6-7.10.l2.15.18-23).

 

중요한 사실은 바로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싸우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자기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전쟁은 ‘종교 전쟁’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와 판관 시대의 전쟁은 이슬람 종교를 퍼뜨리기 위한 ‘지하드’[聖戰]와 같은 야훼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방 종교에 대해 자신의 종교를 보호하려는 것도 그 목적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서의 정복 설화들이 가나안의 신들과 예배 의식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판관기에서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으로서의 생존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에는 야훼 및 그 백성은 시스라 및 그 병거(兵車)와 대조되어 있을 뿐, 시스라 및 그 신들과 대조되어 있지 않다.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부수지만, 이 행위는 미디안족들에 대한 그의 성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종교적인 관점은 후대에 편집된 본문들에서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예로 헤렘에 관한 신명기의 규정(7,2-5.25; 20,17-18), 판관기의 신명기적 편집 부분(2,2-3), 그리고 모세와 미디안족과의 싸움에 있어 훨씬 후대에 편집된 부분(민수 25,17-18; 31,15-16)을 들 수 있다. 비록 거룩한 전쟁이 원래 ‘종교 전쟁’이 아니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이다. 즉 이 전쟁들에서 야훼는 당신 백성의 생명을 위해 싸우시고, 그들은 신앙의 행위로써 그리고 일정한 제의(祭儀)를 지킴으로써 야훼의 행위에 스스로 참여했던 것이다.

 

 

인간의 역할

 

그렇다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전쟁에 관여하셨을 때에 거기에서 인간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우선 이스라엘의 신앙은 인간의 역할을 결코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드보라의 노래에는 인간의 여러 가지 역할이 승리에 작용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판관기 5장 23절에 보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메로스를 저주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저들은 야훼를 도우려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은 항상 야훼께만 돌렸다. 구약은 위대한 전쟁 용사를 찬양하면서도 그러한 용사를 ‘숭배’하는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승리는 어디까지나 야훼께서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승리’는 항상 “도움을 받았다.”는 수동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야훼께서 직접 전쟁에 참가하신다는 사상의 영향 때문에 승리에 가담한 인간을 가능한 한 보잘것없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판관기 6장 15절에 보면 기드온의 집은 므나쎄 지파 중에서 제일 약하며, 그는 그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가 처음 모집한 군대의 수는 삼만 이천 명이지만 차차 줄어 삼백 명이 된다(7,2). 또 불레셋을 쳐부술 사명을 맡은 사울은 짐짝들 틈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택함을 받았다(1사무 10,22). 사무엘 상권 16장에 보면 다윗도 그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로 나타나 있다. 요나단은 불레셋 진지를 용감하게 습격할 때 다음과 같은 야훼 신앙을 겸손하게 고백하였다. “야훼께서 우리를 도와만 주신다면 적의 수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겠느냐?’(1사무 14,6).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인간의 무장을 불신하는 풍조가 후대에 생겨났다(1사무 17,45 참조).

 

 

왕정 시대의 전쟁

 

이상과 같은 전쟁의 거룩한 성격은 왕조의 출현과 직업 군대의 설립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야훼의 전쟁을 수행하러 백성들을 앞서서 행진한 것은 더 이상 야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자신의 전쟁을 수행하는 왕이다(1사무 8,20). 전사들은 더 이상 지원한 사람들이 아니라, 왕에게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들이거나 혹은 장교들이 뽑은 징집병들이다. 이러한 변형은 분명히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사울이 성전 제의를 위반함으로써 그러한 변형의 터전이 마련되었으며, 그 변형은 다윗 시대에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상당한 수의 외인 부대를 고용했으며, 군사적인 목적으로 자기 백성의 수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2사무 24,19). 따라서 전쟁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즉 그것은 ‘속화’되었다.

 

처음에는 거룩한 전쟁의 어떤 요소들이 유지되기는 했다. 암몬족과의 전투에서 성궤가 군대 앞에서 행진했고, 우리아(그는 헷 사람으로 외인 부대에 속한다)는 엄격한 금욕을 지켰다(2사무 11,11). 다윗은 자신이 정복한 금과 은을 야훼께 “봉헌하였다”(2사무 8,11). 그러나 이들 제의(祭儀)들은 겉치레 혹은 장식적인 행사였다. 비록 “야훼께서 승리를 주신다”(2사무 8,6.14)는 말은 여전히 하긴 하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확인해 준 것은 다윗이었으며, 승리의 결과인 영광을 받은 이도 역시 야훼가 아니라 다윗이었다(2사무 12,28). [경향잡지, 1993년 8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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