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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창세기 27장 ,, 질문입니다 !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19 조회수2,534 추천수0 신고


예전에 공부했던 자료를 올리오니 보시고 참고가 되시기를(천천히 읽으시기를)  ~~



(공동번역성서)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창세27,1-40)

 

(창세27,1-40)

1 이사악은 늙어 눈이 어두어졌다. 어느 날 그는 큰아들 에사오를 불렀다. 2 '얘야!' '예, 어서 말씀하십시오.' '너도 보다시피 내가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3 그러니 너는 사냥할 때 쓰는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에 나가 사냥을 해다가 4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5 리브가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오에게 하는 이 말을 엿듣고는 에사오가 사냥하러 들에 나간 틈을 타서 6 아들 야곱에게 귀띔해 주었다. '아버지가 네 형 에사오에게 7 사냥해다가 별미를 만들어 오라시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것을 잡수시고 에사오에게 복을 빌어 주겠다고 하시더구나. 8 그러니 야곱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 9 양떼들한테 가서 살진 염소 새끼 두 마리만 끌어 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아버지 구미에 맞게 잘 요리해 줄 터이니 10 그것을 아버지께 갖다 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가 잡수시고 세상을 뜨시기 전에 너에게 복을 빌어 주실 것이다.'

11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형 에사오는 털이 많고 저는 이렇게 털이 없습니다. 12 아버님이 저를 만져 보시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제가 아버님을 놀리기나 한 것처럼 되어 복은커녕 도리어 저주를 받을 것 아닙니까?' 13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곱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어서 가서 염소 새끼나 끌어 오너라.' 어머니의 말대로 14 야곱은 염소 새끼 둘을 어머니에게 끌고 왔다. 어머니는 남편 구미에 맞게 별미를 만들었다.15 리브가는 집에 보관해 두었던 큰아들 에사오의 옷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염소 새끼 가죽을 매끈한 손과 목에 감아 준 다음, 17 장만해 놓은 별미와 구운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은 아버지한테 들어가 '아버지!' 하고 불렀다. 아버지이사악이 '오냐, 네가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님의 맏아들 에사오입니다. 아버님 분부대로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어서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해다가 만든 요리를 잡수시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20 이사악이 아들에게 물었다. '에사오야!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잡아 왔느냐?' '아버님의 하느님 야훼께서 짐승을 금방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21 이 말을 듣고 이사악은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오인지 만져 보아야겠다.' 하면서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22 가까이 온 야곱을 만져 보고 이사악은 중얼거렸다. '말소리는 야곱의 소린데 손은 에사오의 손이라!' 23 그는 야곱의 손에 형 에사오의 손처럼 털이 많았으므로 야곱인 줄 모르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은 '네가 틀림없는 내아들 에사오냐?' 하고 다짐하였다. 야곱이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5 이사악은 '에사오야! 사냥한 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먹고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하였다. 야곱이 가져다 바치는 요리와 술을 먹고 마신 뒤 26 아버지 이사악은 야곱에게 '에사오야, 이리 가까이 와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다오' 하였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야곱이 입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복을 빌어 주었다. '아! 내 아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야훼께 복받은 들 향기로구나.

28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신 이슬로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하고 술이 넘쳐 나거라. 29 뭇 백성은 너를 섬기고 뭇 족속들은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는 네 겨례의 영도자가 되어 네 동기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30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이 빌어 주는 복을 받고 아버지 앞에서 막 물러나오는데 형 에사오가 사냥에서 돌아왔다.

31 그도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들고 들어 가 권하였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이 아들이 사냥해다가 만든 요리를 잡수시고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32 아버지 이사악이 '대체 너는 누구냐?' 고 물었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오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33 이사악은 그만 기가 막혀 부들부들 떨며 말하였다. '누군가가 벌써 사냥해다가 만든 요리를 나에게 가져왔었다. 네가 오기 전에 나는 그 요리를 받아 배부르게 먹고 그에게 이미 복을 빌어주었다. 그 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것이다.'

34 에사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내어 통곡하면서 아버지에게 애원하였다. '아버지 저에게도 복을 빌어 주십시오.' 35 '네 동생이 와서 속임수로 너에게 돌아 갈 복을 가로챘구나.' 36 이 말을 듣고 에사오는, '나를 두 번씩이나 뒷발질하라고 그 녀석의 이름이 야곱이었던가? 저번에는 내 상속권을 빼앗더니, 이번에는 내가 받을 복마저 가로채는구나!' 하며 물었다. '저에게 주실 복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37 이사악이 에사오에게 대답하였다. '도리에는 어긋나지마는 나는 야곱을 너의 상전으로 삼고, 모든 동기를 그에게 종으로 주었다. 그에게는 곡식과 술도 떨어질 날이 없을 것이다. 에사오야,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 38 그러나 에사오는 거듭 애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빌어 주실 복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도 복을 빌어 주십시오.'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는 이사악 앞에서 에사오는 목놓아 울었다.

39 아버지 이사악이 아들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땅은 기름지지 않은 땅,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이다. 칼만이 너의 밥줄이 되리라. 40 너는 아우를 섬겨야 할 몸, 너 스스로 힘을 길러 그가 씌워 준 멍에를 떨쳐 버려야 하리라.'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 이런 이야기가 꼭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내용들이 간혹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할 창세기 27장의 내용입니다.

차남이 장남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는가 하면, 장남은 자기 동생이 가로챈 아버지의 축복은 무효라며 다시 자신에게 축복을 하라고 방성대곡을 하는, 마치 주말 연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과연 그렇게 속여서 받은 축복도 효과가 있는 것일까?’였습니다. 저는 혼자서 답을 내리길 그렇게 도득(盜得)한 축복은 하느님도 무효로 처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속여서 가로챈 그 축복으로 꽤 험악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곱이 보여준,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집념을 하느님이 기특하게 보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면 그의 삶이 그렇게 험악하게 끝나면 안 되는 것이잖아요?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제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유효한 것이 아니라서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간 것이라면 왜 이사악은 야곱에게한 축복을 무효라 선언하고 장자인 에사오에게 다시 축복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두려워했을까?’였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한번 입밖으로 내 뱉어 지면 절대 번복이 불가능한 것인가요? 사실 성경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항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러한 작은 질문들은 아주 쉽게 해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그리고 교회로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가 왕이 되겠다고 하느님을 떠나있던 인간이 가 장 견디기 힘든 일은 아마 누군가에 의해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일 겁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완전히 무시당했을 때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고픈 인간들은 가장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라는 말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하는 복음을 인간들에게 제시하셨을 때 인간들은 그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처럼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무시당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 증명에 혈안이 된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어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사냥 해다 주는 에사오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하는 이사악이고, 역시 쌍둥이가 복중에 있을 때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음에도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꾀를 동원하여 장자권을 도득(盜得)하도록 시킨 리브가이며, 그 어미의 말을 듣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과,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광분하는 에사오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렇게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네 명의 등장인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염두에 두고 보시면 오늘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 진진하게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사악이 야곱에게 빌어주는 축복의 내용이 나옵니다.(27,27-29) 잘 보면 ➀이사악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은 땅에 관한 축복과 열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축복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은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셨다시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주셨던 당신의 언약을 이사악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15:18~20) 18 그 날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에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19 이 곳은 켄족, 크니즈족, 카드몬족, 헷족, 브리즈족, 르바족, 20 아모리족, 가나안족, 기르갓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창세17:1~8) 1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 2 나는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을 세워 네 후손을 많이 불어 나게 하리라.'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4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5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6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리라. 7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8 네가 몸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

 

(창세22:17~18)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잘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땅을 약속하고 계시고 그와 그 후손이 그 땅에서 승리자로서, 왕 노릇하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언약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이 점진적 형태로 지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로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무작정 그가 머물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목적지를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 아주 애매모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셔서 어떤 땅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뽑아내신 인류 최초의 갈대아 문명은 인간들이 하느님 없이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만들어낸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명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문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진짜 복된 땅으로 인도하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최초의 계시로 주어졌을 때에는 아주 모호하게 ‘내가 지시할 땅’이라 고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도 가르쳐 주시지 않은 채 그를 끌어내시고는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에 ‘여기가 그 땅 이니라’하고 그 땅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오늘 본문에서는 기름지고 풍요 한 땅으로 좀 더 명확하게 계시되는 것이고, 그렇게 점점 밝히 계시가 되어지다가 요한 묵시록에 이르러서는 그 땅이 새 하늘 과 새 땅임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세요.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땅은 기름진 땅이며 포도주와 곡식이 풍성한 땅이라 하십니다. 출애굽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창세기의 어떤 부분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대 반전의 모습입니다.

 

(창세3:17~19)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어느 곳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온통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땅이 아닌 기름지고 복 된 땅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일구이언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침투해 들어오게 될 것임이 미리 예시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받은 땅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저주받은 땅 갈대아 우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의 땅으로 창세전에 택해진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옮기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을 성경이 점진적으로 계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땅에 관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 중에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에 관한 언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②두 번째로 하느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담 안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리를 밟고 결국 만국의 왕으로, 통치자로 만들고야 마시겠다는 것이 지금 야곱에게 내려지는 하느님의 축복이자 언약인 것입니다. 그 약속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미리 힌트 되어있습니다.

 

(창세3:15) 15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될 모든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승리는 바로 교회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로 신학의 백미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이지요.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져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계승되어져 내려오는 하느님의 언약은 그 자체가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저주와 사망의 땅에서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자들 중에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죄의 머리를 밟게 하시고 하늘의 풍요가 충만히 넘치는 약속의 나라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게 야곱 이 탈취하여 도득한 하느님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과 축복의 수혜자는 그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장자인 에사오가 아닌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야곱이 도둑질해서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유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자칫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느님의 축복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사기를 쳐서라도 빼앗을 수 있다는,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프래그머티즘이나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구절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 대한 오해를 더하는 에피소드가 루가복음 5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마을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 가까이 오지 못한 중풍병자와 그를 침상에 들고 온 그의 친구들이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침상을 아래로 내립니다. 그 때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것을 보고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기다리건 말건 새치기를 하거나, 남의 집 지붕을 마음대로 뜯어내도 괜찮다는식의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앞에 온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赦)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말을 모독한다(僭濫)고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가 용서해졌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쉬우냐?’고 반문하시면서 ‘내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도덕과 질서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온 것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난 그런 것 해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러 온 하느님이다’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풍병자는 남의 집 지붕을 뜯으면서까지 열심을 부려서 죄 赦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이미 들어 있던 사람이었기에 죄 赦(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9:11~13)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명확히 나오지요? 하느님의 은혜는 수혜자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채도 그 축복이 유효 한가 아닌가?’라든지 ‘하느님의 축복을 향한 야곱의 기특한 집념’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될 수 없으며 그 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됨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교회에게 설명하시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사악과 야곱에게 계승되어진 하느님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좀 더 점진적 그림으로 보여 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탈취하여 취한 축복의 내용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거쳐 예수에게로, 또 예수에게서 나와 교회 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축복이 요한묵시록에서 완성이 되는지 까지 연결해 드릴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시작이 되었어요.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의(含意)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언약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삶을 살다가 그 복을 아래로 흘려보냈던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삶으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이 지시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가나안족들을 모두 몰아내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들로부터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도록, 복의 근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역시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언약은 다윗 왕 때에 만개합니다. 다윗 왕 때에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일경이 모두 이스라엘의 땅이 되고 그 땅에는 은과 금이 길에 구르는 돌처럼 흔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하느님의 축복이 거기서 모두 성취가 되는듯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수시로 가나안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적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로 몽땅 내 모시기도 하셨습니다. 마치 야곱의 험악한 삶과 비슷하지요? 그러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의 인생과 역사도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언약은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2사무7:12-15) 12 네가 살 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13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만일 그가 죄를 지으면 나는 사람이 제 자식을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듯 치리라. 15 그러나, 내가 일찌기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도 그처럼 내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는 ‘후손’에 관한 예언이 또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언약은 바로 그 후손에게서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악과 야곱이라는 약속의 후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언약이 이제 다른 어떤 후손에게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언약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아래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말씀 중에 특이한 것은 그 후손은 하느님의 아들이랍니다.계시가 좀 더 명확해 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처음 등장한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한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나타난 그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의 다윗의 언약에 보면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시고 가르치시면서 기필코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해서 하느님께서 그 분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삼으시겠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마음에 합당한 분이었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그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사무엘서에서는 하느님께서 그 후손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셔서 아들을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킴과 동시에 또 다른 어떤 존재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지요?

 

(로마4:16~17)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교회를 ‘후손’이라 한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구약의 하느님의 언약에 등장 하는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 연합되어 구원받게 될 하느님의 교회 전체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하느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유업(몫, 상속)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종목적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아들을 삼으셔서 죄를 밟아 뭉개고 하늘을 통치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생애가 담고 있는 내용이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도득(盜得)한 축복의 내용인 것이며, 창세기 3장 15절부터 흐르는 하느님의 언약의 실체인 것입니다.

 

(묵시21:7) 7 승리하는 자는 이것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명확하지요? 하느님의 언약의 목적지는 하느님이 우리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후손’ 즉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그 분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승리’라는 이름을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그 ‘승리’라는 이름이 하느님이 죽어야 할 야곱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승리, 이김’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주말 드라마의 내용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 내용은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과 구원의 과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하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불려 질 후손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받은 교회가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되십니까?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은 그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또한 그들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로 택해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신명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신명7:7) 마찬가지로 교회의 선택 또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욕심에서 형의 축복을 가로챘지만 결국 빈손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의 재산에 손도 대 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풍성한 소출과 기름진 땅은커녕 아예 고향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약속된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은 이 땅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수시로 가나안 땅을 비워주어야 했고 수시로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고자 했던 땅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교회는 이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소산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데에 야곱의 공로가 전무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교회가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하심과 죽으심의 은혜만이 유효했습니다.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았지만 그로부터 하느님의 언약과 축복이 자손들에게로 계승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나라로부터 하느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그래서 바울로는 유대인들의 유익을 이렇게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로마9:4-5) 4 나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5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 아멘.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하느님의 계시와 언약과 율법과 제사 제도와 성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부터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어졌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유효한 것처럼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태10:5~6) 5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마태15:22~26) 22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 오고 있으니 돌려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는 복음의 적용 대상이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장이 됩니다.

(사도행1:8)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마태28:18-20) 1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율법으로 구원을 받던 세대와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세대가 분리되어 존재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하느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지는 복음의 통로, 즉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개인을 지칭할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과 역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서 탄생하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는 이 땅에서 ‘승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야곱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승리로 끝내는지를 보면 되겠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의 ‘승리’가 어떻게 야곱의 인생의 ‘승리’로 이어지는지 보세요.

오늘 본문 창세기 27장은 창세기 48장에서 결론이 납니다.

 

(창세48:17-20) 17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은 것을 보고는 못마땅하게 여겨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은 아버지의 손을 므나쎄의 머리에 옮겨 놓으려 했다. 18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오른손을 이 아이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19 그러나 아버지는 거절하며 대답하였다. '아들아, 나도 안다. 왜 모르겠느냐? 이 아이도 한 족속을 이룰 것이다. 크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우가 형보다 더 커져 그의 후손은 숱한 민족을 이룰 것이다.' 20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희의 덕을 입고 살며 '하느님께서 너를 에브라임처럼, 므나쎄처럼 세워 주시기 바란다' 하리라.' 이렇게 그는 에브라임을 므나쎄보다 앞세웠다.

 

어떠세요? 오늘 본문에는 하느님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취향과 욕심에 이끌려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48장에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장자인 므낫세를 뒤로 물리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리는 완전히 길들여진 말 잘 듣는 양같은 야곱이 나옵니다. 그는 그렇게 손자들과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긴 뒤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결국이며, 그게 바로 성도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야곱으로 지어지는 그 과정을 창세기 기자인 모세가 장장 스물두 장을 할애하여 기록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과 본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은 야곱처럼 자신의 뜻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하느님의 뜻 앞에서 사기와 권모술수까지도 동원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삶에서 돌이켜 하느님의 주권과 그 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참 ‘후손’의 삶이 예수님의 삶 속에 확실하게 계시되어져 있습니다.

 

(필립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이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지요? 하느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장의 ‘승리’와 오늘 본문의 모든 왕이 굴복하는 ‘통치권’이 비로소 예수 안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의 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하늘의 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비결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며 죽기까지 순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그게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기름진 땅과 하늘의 풍성한 소산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목숨 바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바로 그 언약의 상속자이니까요.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은 장자 권을 계승하는 당신의 영적 장자들인 교회를 가시와 엉겅퀴의 땅에서 건져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시키실 것을 창세전부터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깊이 간섭하시어 그들을 하느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다는 것이 바로 야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목적지는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 의 힘의 원리에서 빠져나와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늘의 가치를 참 가치로 삼아 이 세상을 조롱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그런데 여전히 그 하느님의 자리에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힘의 원리와 번영의 신학과 고지론 같은 것들이 자리를 잡고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번영하고, 성공하고, 많이 모으면 그게 장땡입니다. 기복주의든 신비주의든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의 힘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힘을 약속해 주는 이상한 하느님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느님의 노여우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거짓 을 전합니다.

 

(1디모4:3-5) 3 이런 자들은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못 먹게 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으로서 진리를 깨닫고 신도가 된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4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5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신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거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르13:6,14~19) 6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 대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14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 독자는 알아 들으라. )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15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려 내려 오지 말며 16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17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18 이런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19 그 때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쳐 올 터인데, 이런 재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 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앞으로도 다시 없을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쫒아 자신의 사욕을 버리고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유익하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멸망의 가증한 것인,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번영의 신학 등이 앉아 있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하느님의 언약과 축복을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이 사냥한 고기의 유혹에 넘어가 초개처럼 여겼던 이사악의 모습이 오늘 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팥죽 한 그릇에 하느님의 언약의 상속권을 팔아버린 에사오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 것들을 받고 신의 복을 빌어주는 무당 짓거리가 약속의 자손 이사악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치욕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 짓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도망가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세요. 여러분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겨내라는 하느님의 역설을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성도입니다. 힘을 빼세요. 순종하십시오. 그게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참고가 되셨기를~~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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