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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전도서 | No25 | 성서구약성서해설 | 종류시서와지혜서 | |||
전도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히브리어 성서는 이 책이 코헬렛의 말이라 하여 ‘코헬렛’이라 불렀어요. 이 말의 뜻은 확실치 않으나 대개 ‘회중 또는 회중 앞에서 말하거나 가르치는 이’를 가리킨다고 보아요. 그래서 그리스어 성서도 책의 이름을 회중이란 뜻의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라고 붙였어요. 이 이름이 널리 퍼졌지요. 우리말 성서 이름 “전도서”는 중국어 성서 이름 “傳道書”에서 유래하였어요. 오랫동안 코헬렛을 ‘전도자’로 옮겼던 교회전통에 따른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코헬렛을 전도자보다 “설교자”(공동번역 성서), “교사”(NRSV), 또는 “코헬렛”(NAB)으로 옮기면서, 책이름도 그냥 “코헬렛”(구약성서 새 번역)으로 쓰기도 해요. 누가 썼나요? 전도서의 첫머리에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1,1)이라 하여 솔로몬을 저자로 암시하고 있어요. 하지만 글의 성격이나 내용, 사용된 어휘 등을 잘 검토한 결과, 이 성서를 쓴 이는 포로기 이후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던 유다의 한 늙은 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이스라엘 지혜의 대표격인 솔로몬의 권위 아래에 둠으로써, 전도서가 어느 한 무명작가의 개인적인 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에 근거를 둔 권위있는 가르침임을 드러냈답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전도서는 포로기 이후에 나온 후기 히브리어로 쓰여졌어요. 사용된 어휘는 페르시아의 아람어와 그리스어의 영향을 짙게 받았구요. 또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쓰여진 전도서의 필사본 단편이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살았던 집회서 저자가 전도서를 알았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당시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크게 보아 전도서는 기원전 3세기경에, 아마도 기원전 250년 전후에 완성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어요. 왜 썼나요? 잠언을 읽고 뒤이어 전도서를 읽은 분들은 좀 헷갈리지 않으셔요? 전도서가 잠언의 지당했던 내용들을 상당히 비판하고 있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코헬렛은 헬레니즘 같은 외래사조가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에서 기존의 지혜문학이 지닌 헛점을 보완하고,이스라엘의 신앙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썼어요.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는 틀이지요. 즉 코헬렛은 실제적인 경험과 냉정한 관찰을 통해 잠언류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지혜의 한계와 단순한 인과응보 논리의 허구성, 세상의 불공평과 왜곡된 현실 등을 지적하고 있어요. 특히 인간의 종말인 죽음에 부딪쳐 좌절해 있는 인간의 갖가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모든 업적과 소유가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상대적인 것임을 알려 주지요. 그리하여 코헬렛은 창조주 하느님만이 절대가치를 지니시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시니, 그분을 경외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분의 선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기쁘게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인간의 한계에 몸부림치면서도 신앙에 매달린 코헬렛에게 궁극적으로 빛과 구원을 던져주시는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새김과 나눔> 역사와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도서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춰 서로 의견을 나눠 보십시오. 헛되고 헛되다(전도 1-6장) 머리글(1,1-18) 전도서의 기본관점인 다음 두 구절을 적어 보십시오(1,2.9). 전도서는 첫머리에서 책 전체의 기본 기조를 밝힙니다. 세상만사 헛되다는 것이죠. ‘헛됨’의 원어는 ‘숨’으로서 쉽게 사라지는 걸 말하죠. 즉 인간의 삶, 세상일에 어떠한 의미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목적 없이 되풀이되고 인간사도 새로운 것 없이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허무주의 선언이 아니예요. 이 이야기 뒤에는 ‘과연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 의미와 답을 찾으려는 처절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죠.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더니(2,1-26) 향락의 결과는 어떠했다고 고백합니까?(2,10-11) 코헬렛은 행복해지기 위해 술에도 빠져보고 각종 향락에도 몰두하는 등 부귀와 쾌락을 즐겨 보았으나 결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혜로운 자도 죽음 앞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다름이 없고,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보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절망하지요. 그리하여 결국 일시적인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삶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지혜로운 이가 현실을 직시하며 들려주는 인생의 적나라한 실정과 불안한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어요. 무엇이나 때가 있다(3,1-4,16) 모든 것이 제 때에 맞게 들어 가도록 만드신 이는 누구입니까?(3,11) 모든 현상과 사물의 진행과정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때를 온전히 알 수 없어요. 게다가 세상을 관찰해보니 인간의 운명도 짐승보다 특별하지 않고, 세상엔 불의가 판치고, 남과 경쟁하며 더 성취해 보아야 소용이 없고, 명예와 권력도 일시적임을 알게 되죠. 그리하여 코헬렛은 다시금 하느님을 주목합니다. 때를 정하시고 사람의 정의를 심판하시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인간의 결함과 노력의 한계를 일깨우며 하느님께 눈을 돌리라고 호소하는 거죠. 여러 짧은 잠언들(4,17-6,9) 코헬렛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5,17) 코헬렛은 계속해서 인간 삶의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을 드러내면서 지혜롭게 충고합니다. 성전에는 제물 봉헌보다 겸허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러 갈 것이며 하느님께 성급하게 서원하지 말라고 일러요. 또 왕정체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재산 축적과 부귀영화의 헛됨도 강조하죠.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랍니다. <새김과 나눔> 코헬렛은 계속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내용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춰 서로 의견을 나눠 보십시오.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라 (전도 7-12장) 누가 알겠는가? 무엇이 좋은 일인지(6,10-8,15)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누구입니까?(8,1) 코헬렛은 결정적인 운명 앞에 서 있는 인간의 한계와 무기력함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구부려 놓으신 것을 펼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7,13). 그리하여 죽음 앞에서는 절대적인 행복이 없음을 잠언 형식으로 들려줍니다(7,1-9). 그가 덧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만사를 겪어보니, 세상은 인과응보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용(中庸)을 지켜 살기를 권해요. 또 정치의 양면성과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의 불공평함도 지적하지요. 그렇지만 코헬렛은 비록 사람의 지혜에 한계가 있으나 그래도 때와 방식에 맞게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충고해요. 아울러 하느님을 향해 즐겁게 사는 것이 좋은 것임을 다시금 강조해요.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8,16-11,6) 저자는 죽은 사자보다 무엇이 더 낫다고 합니까?(9,4) 이 대목에서 코헬렛은 사람의 운명이 똑같음을 계속 지적해요. 다같이 죽을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이죠. 또 아무도 죽을 날을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친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요. 그러니 살아 있음이 무척 소중한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몫을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요. 사실 이러한 코헬렛의 주장은 죽음을 극복하는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깊은 심정과 운명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죽으셨다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이 꼭 필요한 거죠. 그 밖에 코헬렛은 전통적인 지혜의 한계를 밝히면서도 여전히 인간 생활에서 지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충고하고 있어요. 인간이 노력한 앞으로의 결과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말이죠(로마 9,16). 맺음말(11,7-12,14) 금언집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12,11) 코헬렛의 마지막 말은 젊음과 늙음(또는 죽음)에 대한 묘사와 충고입니다. 젊음과 늙음은 햇빛과 어둠, 봄과 겨울처럼 대조적인 모습으로 비교되어요. 청춘을 즐기라는 코헬렛의 권유는 어떤 향락이나 방종을 부추기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삶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자유롭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권유이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기 전에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며(12,1), 그분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히 사는 것이죠. 생명이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말이죠. 전도서의 끝부분(12,9-14)은 코헬렛의 제자들이 나중에 덧붙인 내용이에요. 그들은 코헬렛이 지혜를 깨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었음을 밝혀요. 그리고 그러한 금언들은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죠. 그들의 마지막 결론은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12,13)는 한마디예요. 지혜문학의 핵심이자 지혜문학과 오경이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결국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오랜 전승을 보완하는 가르침인 전도서는 신약성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갈구하는 고백이기도 한 셈이죠. 다음 주에는 아가를 읽겠습니다. 짧고 아름다운 성서이니 꼭 읽고 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글·그림 성서와 함께] <새김과 나눔> 변화하는 이 시대에 코헬렛처럼 하느님의 절대성과 영원하심을 가르치기 위해 젊은이나 자녀들에게 충고한다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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