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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태오의 복음서 | No47 | 성서신약성서해설 | 종류복음서 | |||||
처음에는 이름없이 통용되었어요. 지금은 네 복음서가 신약성서 안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어 서로 다른 이름으로 구분지어야 하지만, 복음서가 처음 생겨날 때만 하여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한 공동체에서 하나의 복음서가 통용되던 시절에는 그저 ‘복음서’라고만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다른 공동체에서 생겨난 복음서가 점차 널리 보급되면서부터는, 각 복음서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야만 했죠. 마태오복음서는 세리였던 마태오가 기록했으리라는 생각에, 그 이름을 따서 복음서의 이름으로 삼았어요. 누가 썼나요? 초대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는 전승이 생겨났어요. 유세비우스는 그의 저서 “교회사”에서 “마태오는 말씀들을 히브리어로 차례대로 모아놓았고, 각자는 이를 자기 능력대로 번역하였다”는 파피아스(60-130년경)의 증언을 담고 있어요.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130-202년경) 또한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설교하며 교회를 세우고 있는 동안에 마태오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의 말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로 말미암아 사도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는 전승이 형성되었지만, 오늘날 사도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고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어요. 하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편의상 저자를 마태오로 부르고 있답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마태오복음서의 분량은 28장이나 돼요. 아무런 자료 없이 이 방대한 작업이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질 리는 없어요. 실제로 마태오복음은 50-60년경에 쓰여진 예수의 어록과 70년경에 완성된 마르코복음서를 참조해서 쓰여졌으리라고 봐요. 그리고 마태오 교회 안에 전해 내려온 전승들도 한데 모았을 거라고 봐요. 내용상 유다교와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고,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12사도의 가르침)에 마태오복음서가 인용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대략 80--90년경에 쓰여졌을 거라고 추정한답니다.
왜 썼나요? 유다교의 여러 풍습이나 계율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고 있으면서, 간혹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풀이해 주는 것으로 보아(1,23; 27,33.46), 북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에 인접한 시리아 지방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봐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점차 확립되어 나가면서 유다교와의 갈등도 생겨나는 시점에서, 어떠한 어려움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공동체 성원들에게 촉구하고자 했어요.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바탕을 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함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죠.
<새김과 나눔> 요즘처럼 인쇄기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그 옛날, 복음서 작가들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서 모두 글로 써야만 했습니다. 그 노고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마태오복음서를 한 번 써보면 어떨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1-9장) 그분의 별을 찾아(마태 1,1-4,22) 임마누엘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1,23)
마태오복음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1,1)는 말로 시작되어요. 구원사의 흐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서부터 통일왕국을 이룩한 다윗을 거쳐 계속 이어져 오고 있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죠. 이런 구원의 연속적인 흐름은 아마도 깨어 있는 자들만이 볼 수 있을 거에요. 동방박사들은 그분의 탄생을 나타내는 별을 보고 경배하러 가지만, 헤로데를 비롯한 율법학자는 미처 깨닫지를 못하니까요. 아마 우리를 그분께 이끄는 별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에요. 동방박사들만큼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예수의 탄생으로 시작된 구원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집트로 피신갔다가 다시 돌아와 나자렛에서 머물러 살며 성장한 다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는 과정을 통해 점차 소명의식을 틔우게 됩니다. 그리고는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인생의 흐름을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을까요?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이루려 하실 텐데요.
산상설교에 귀 기울이며(마태 4,23-7,29)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7,12)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주옥같은 말씀이라 하면, 누구나 산상수훈을 들 거에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로 시작되는 말씀은 언제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거든요. 우리 신앙인이 꿈꾸어야 할 참된 행복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게 되구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전통적인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실제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나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안됨을 힘있게 일깨워 줍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의기도’를 일러주시는가 하면, 겉꾸미기를 좋아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지 말도록 촉구하고 있죠. 이런 말씀들은 실제 살아가면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렇게 살려는 지향만큼은 간직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싶네요.
놀라운 기적은 여기저기서(마태 8,1-9,38) 아주 강한 믿음을 지녔다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8,5-13)
마태오는 전해 받은 이야기를 주제별로 전개시키곤 해요. 그 중에서 8-9장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치유 이야기가 나와요. 나병환자, 백인대장의 하인, 마귀들린 사람, 중풍병자, 회당장의 딸, 소경, 벙어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요. 각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 풀려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껴보시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 (마태 10-18장) 가서 선포하여라(마태 10,1-12,50)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름을 써보세요(10,2-4).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시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당부하면서 말이죠.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거에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다 보면, 때로 예기치 않게 오해도 받고 고통도 겪게 되죠. 예수님도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의 온 삶을 통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늘 나라는 …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1-52) 어느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까?(13,8)
하늘 나라의 신비를 일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 등. 이런 비유는 모두 하늘 나라의 속성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어요.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커지게 되는 모습,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귀중한 보물을 차지하는 모습, 하나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수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 등. 이런 모습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실제로 드러나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예수를 따르는 길(마태 13,53-17,27) 시몬 베드로는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합니까?(16,16)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지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달라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히 알아내어요. 비록 수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해도 말이죠.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 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럴 때에 용감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뒤따를 수 있도록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마태 18,1-35)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까?(18,4)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될지를 여러 모로 일러주시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가면서, 죄의 유혹은 단호히 끊어내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죄를 지은 형제를 크나큰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이들이야말로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시죠.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일 거에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마태 19-28장) 권위있는 가르침(마태 19,1-22,46)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 청년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19,21)
예수님은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를 비롯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에 대해서 깊이 일러주시죠. 어떤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하시는 분이심을 생각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그러니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데 방해가 되는 환전상들과 장수들을 몰아내는 과격한 행동을 하실 수밖에요. 우리 사회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제도나 관습이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를 바로잡도록 애써야겠지요.
너희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니(마태 23,1-25,46) 심판의 날은 누구만이 알고 있습니까?(24,36)
예수님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와 같은 유다교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을 꾸려 사람들에게 얹어 주면서도 자신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삶을 살아간다며 호되게 나무랍니다.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예식만 강조하는가 하면, 정결례를 철저히 요구하고 있다면서요. 우리의 신앙도 실속이 없고 겉치레에만 흐르면 같은 비난을 받게 될 거에요. 이어 예수님은 이런 그릇된 관행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 날이 될 때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면서요. 하지만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므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깨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도 소홀하는 법이 있어서는 안되구요. 아가교를 비롯해서 사이비 신앙이 성행하고 있는 요즈음 세태가 시사해 주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분별해 보아야겠지요.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마태 26,1-28,20)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명패에는 어떤 죄목으로 쓰여 있나요?(27,37)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다 이스가리옷이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 넘기는 바람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한 후 게쎄마니 동산에서 붙잡혀서 대사제 앞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장담과는 달리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구요.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조룡을 받은 끝에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죠. 이 이야기로만 끝났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거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시죠. 비록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시신을 훔쳐갔다는 낭설이 전해져 오지만요. 주님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셔서 부활의 새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한 주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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