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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이야기25: 오늘날 하느님에 관한 논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6 조회수2,959 추천수0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25) 오늘날 하느님에 관한 논쟁

이성 · 믿음 쌍두마차가 주님께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우주가 생성되는 데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없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신문에 토픽 기사로 난 적이 있다. 그렇다고 과학자들이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일에서 면제된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믿어야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왜 우리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시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현대에 와서는 종교와 과학의 의견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

최근 물리학자 가운데 하느님 존재를 부인하는 리처드 도킨스라는 학자가 쓴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이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라는 부제를 달아 2007년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됐다. 그는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가 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망상을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것, 즉 정신장애의 한 증상으로 풀이한다.
 
도킨스 자신은 아인슈타인이나 호킹처럼 범신론자 혹은 무신론자로 자처한다. 범신론자들이란 인간 운명에 관한 행위에 관여하는 신이 아니라, 존재의 질서 있는 조화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신학, 과학 상호 의존, 협력적

창조의 하느님을 다루면서 언급한 것이지만, 진화론은 창조론과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진화하는 세상을 창조하셨지 고정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신 까닭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나,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찍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존재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과학은 종교를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정화시킬 수 있고, 종교는 과학을 우상숭배와 거짓 절대주의로부터 정화시킬 수 있다. 양자는 각기 타자를 보다 넓은 세계로, 양자가 그 안에서 번영할 수 있는 세계로 이끌어들인다."(요한 바오로 2세, 신학과 과학과의 대화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이러한 새로운 인식 속 그리스도교는 신학과 과학이 상호의존적이며 협력적 관계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종을 뛰어넘는 진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생물들의 진화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유전자에 관한 생명공학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빅뱅이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빅뱅이 왜 일어났고 누가 일어나게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연과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가페적 사랑의 행위다. 어떤 사회생물학자는 그러한 이타주의 행위가 간접적으로 종족 번식에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인간이 아닌 영장류를 관찰해보면 이 주장은 전혀 맞지 않고 반대 상황이 나타난다. 가령 새로 우두머리가 된 수컷 원숭이는 훗날 생길 자기 새끼의 앞날을 위해 다른 새끼들을 제거한다. 이처럼 과학은 자연의 신비를 푸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과 관련된 문제를 푸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고통은 왜 존재하며, 선하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왜 허락하시는 것일까. 우리에게 고통이 있기에 하느님은 전능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고통의 많은 부분은 스스로 자초한 경우가 많다. 또 내가 아닌 나와 가까이 있는 타인의 잘못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천재지변으로 불행을 겪기도 한다. 교회는 고통을 인간이 성장하기 위한 하느님의 교육수단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이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의 부분이 있다. 사랑만이 신비가 아니고, 신앙만이 신비가 아니고, 고통에도 여전히 신비가 남아 있다.
 

세상 일깨우는 신의 확성기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해 고통을 자초하지 않도록 하지 못할까'하고 질문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 즐거움에 대고는 속삭이고, 우리 양심에 대고는 평범하게 이야기하지만 우리 고통에 대고는 소리를 지른다. 귀먹은 세상을 일깨우는 것은 신의 확성기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삭임을 알아듣지 못한다. 커다란 불행과 고통이라는 확성기의 소리를 듣고서야 깨닫는다.
 
우리는 이성으로도 하느님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지만, 이성이 하느님을 반드시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성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믿음과 이성은 하느님께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라고 말했다.

리처드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신랄한 부정은 사실 종교인들에 대한 공격이다. 하느님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믿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라 여겨진다. 그는 오늘날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그 하느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는 미신행위에 일침을 가한다.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무섭게 복수하시는 하느님으로 그려냈기에 그런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느님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원수에게는 잔인한 복수를 하는 하느님을 만들어낸다. 하느님은 그렇게 내가 내 마음대로 생각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을 스스로 알려주셔야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평화신문, 2011년 12월 4일, 정리=박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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