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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교리: 왜 사회교리인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16 조회수2,565 추천수0
[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왜 사회교리인가?


한국 주교회의는 지난 해 10월 총회에서, 올해부터 해마다 인권주일인 대림 제2주일을 시작으로 한 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선포하였다. 그 덕분인지 <빛> 잡지에서 사회교리와 관련된 글을 1년간 연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늦은 감이 있지만 사회교리를 교우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이나마 확산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사회교리는 신자들이 사회생활 가운데 신앙을 실천하는데 필수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회 내에서 잘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한 주교님들이 한국사회가 복음화되기 위하여 신자들에게 사회교리가 가르쳐지고, 이것이 사회생활의 기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사회교리주간을 선포했을 것이다.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20여 년 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선포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1년 최초의 사회회칙인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선포 100주년을 지내면서 전세계 교회를 향해 사회교리가 신학교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가르쳐져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이러한 선포에 영향을 받아 서울대교구에서 ‘사회교리학교’를 개설하였고, 대구대교구에서도 평신도 신학원에 ‘사회교리’란 과목을 개설하였지만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특히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우리지역에서 인권, 정치, 경제, 노동, 환경 등과 관련된 것에 대하여 교회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크게 반기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사회교리’에 대한 배움과 실천에 걸림돌이 된 것은 사실이다. 실상 교우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첫째 이유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를 꼽고 있는데, 이런 교우들이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는 각종 사안들에 대하여 신앙적 판단을 하고 이를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권과 노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신앙적 결론을 내리고 실천하는 데에 적잖은 “불편한 진실”에 접하고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실례로 현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시작할 때에 모 일간지에 “4대강 사업 문제있다”란 필자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을 읽은 교우가 “신부님, 왜 그런 정치와 관련된 글을 쓰십니까?”라는 항의를 해왔다. 정부의 사업을 반대하는 것으로만 본 교우에게 필자는 4대강 사업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터전인 강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악의 편을 드는 것임을 밝혔지만 끝내 동의를 받지 못했다. 아마 이 글을 연재하는 가운데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리라 생각된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그저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 자유, 정의라는 가치를 추구한다. 그렇다고 냉혹하게 진리, 자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통해서 이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회교리의 근저에서 강자와 권력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함으로써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고 모든 이들이 더욱 인간다운 생활, 복음적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 건설을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교리는 지상 천국이나 유토피아(Utopia)를 꿈꾸고 있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사명은 종교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이나 혹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종교적 사명은 인간 사회의 세속적인 발전 과정과 열정적으로 통교하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도 없으며, 완성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 이미 새로운 세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사목헌장, 22)

이와 같이 교회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고유의 목적으로 추구하면서 인간사회의 발전과 결속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고유한 사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노동 등에 관한 것이 아니고 종교적 질서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 종교적 사명의 가장 근저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들어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의 종교적 사명은 모든 이를 교회로 불러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게 하는데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의 분야(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노동 등)에 하느님의 뜻이 스며들어 실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의 빛에 힘입어 건설하고 발전시켜야 할 인간 공동체에 이바지해야 할 책무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교회가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이를 실천하는 이유는 인간 사회를 더욱 하느님의 뜻에 맞는 공동체로 성장, 발전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뜻이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서 실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의 이러한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기초한 각종 사회제도(정치, 경제, 문화, 언론, 노동, 환경 등)가 마련되고 실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교회는 사회교리를 선포하고 있다. 교회 구성원들은 선포된 사회교리를 익히고 실천해야 하는데 특히 현실 세계를 복음화해야 할 의무가 있는 평신도들이 사회교리를 잘 알고 자신이 생활하는 현장에서 사회교리가 실천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구체화되기 위해서 3단계를 거쳐야 한다.

1) 시대의 징표 인식: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비가 올 것을 알고,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덥겠다는 것을 알면서 “이 시대의 뜻을 왜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였다. 이러한 질책을 교훈삼아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징표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교회는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을 둘러보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시대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 특징이 지니는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해결책 모색: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과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해석하고 이에 따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은 시대의 조류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복음정신에 맞게 개선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3) 실천: 구체적인 해답을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을 넘어서서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비록 그 실천에 있어서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복음화를 위한 사도적 소명을 실천한다는 자부심과 시대의 선구자로서 박해마저도 극복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복음화할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사회교리는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식정보시대, 탈공업화시대,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등 다양한 용어로 현 시대를 정의하고 있다. 이 시대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변화가 빠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세상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심어주고, 세상 구조를 현시대의 요청에 응하도록 더 완전한 형태로 혁신하는 임무”(팔십주년, 50)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 시대의 징표인 ‘다문화’에 대하여 교회의 사회교리를 기초로 하여 살펴보는 것이 시대의 소명이 아닐까? 다음호부터 다문화와 관련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월간빛, 2012년 1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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