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7)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기업
참된 ‘가난의 정신’ 실천하는 장
‘공동체’와 ‘사랑’을 뿌리로 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뜻에 보다 가까이 다가선 사회적 기업일수록 하느님 나라의 많은 부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숱한 고난 끝에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주인공 ‘크리스천’의 여정을 그린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은 세속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해줍니다. ‘크리스천’을 통해 작가는 물질적인 욕망뿐 아니라, 정신적인 욕망 등 세속이 던져주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져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다는 긴박하고 절절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참될 때 세상의 때를 벗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기업은 이처럼 참된 가난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 전통 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적 기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영국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배울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국형 사회적 기업은,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면서 기업이 영리활동을 통해 취약계층 지원과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복지 민영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영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이 점차 저변을 넓혀감에 따라 이들을 돕는 조직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처음 만든 프리어 스프렉클리(Freer Spreckley)는 클리프 사우스콤(Cliff Southcombe)과 1997년에 첫 전문가 사회적 기업 파트너십 회사를 세워 사회적 기업을 돕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회적 기업 지원단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1997년에 창설된 ‘사회적 기업 런던’(Social Enterprise London, SEL)입니다.
SEL은 런던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 있는 3500여 개의 사회적 기업 가운데 2000여 개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회적 기업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SEL은 사회적 기업 경영 지원을 비롯해 교육, 1대1 컨설팅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 관련 지원정책 연구와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 육성을 위한 인프라 조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SEL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창업과 안정적 경영에 필요한 내용을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 교육하는 일반 프로그램과 신규 시장 개척이나 공공서비스의 사회적 기업화와 같은 특성화 프로그램이 그것입니다.
또한 영국의 자원봉사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for Voluntary Organi sations(NCVO)는 지난 2000년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지속가능 자본지원 프로젝트’(Sustainable Funding Project)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후 ‘미래빌더’, ‘센트리카’, ‘채리티은행’ 등에서 자본금을 지원받게 되면서 사회적 기업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둘러싼 영국 사회의 이러한 모습들은 가난이 숙명(宿命)과 질곡(桎梏)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 어떤 기적과 희망을 낳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2년 8월 26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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