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9] “전능하신 천주 성부” (1) 아버지 하느님
구약성경의 주요한 하느님 이름이 ‘야훼’라면 신약성경 하느님의 이름은 ‘아버지’이다. 구약시대에도 하느님은 ‘아버지’라 불렸다. 많은 종교가 하느님을 그렇게 부른다. 하느님은 간혹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아버지’ 명칭은 하느님의 권능과 통치력을 부각시킨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탈출 전 당신의 ‘맏아들’(출애 4,22)로 부르며 해방시키기로 선언하셨고 그들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선사하셨으므로 더 더욱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 왕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신다(2사무 7,14 참조).
‘아버지’ 이름을 가부장제도의 산물로 여겨 ‘어머니’ 칭호가 하느님께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엄격하고 위엄스런 아버지보다 자애깊은 어머니의 표상에 더욱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통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라는 신앙의 언어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첫째, 하느님께서 만물의 근원이며 초월적인 권능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속성들 중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계시되는 속성은 ‘초월성’이다. 즉 ‘거룩함’이다. ‘거룩하다’는 원래 ‘다르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므로 세계의 어느 것과도 동일시될 수 없는 거룩한 분이시다. 그래서 “하늘 위나 땅 아래 있는 것이든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탈출 20,4). 이 신상제작 금지명령은 세상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유와 초월성과 거룩함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하느님은 민족과 종족, 세상의 어떠한 권력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초월해 계신다. 하느님의 초월성은 무한한 권능과 절대적 자유를 뜻한다.
둘째로, 피조물을 포함하여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느님”(시편 67,6)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계시에서 부성애의 이 측면을 더욱 부각시켰다. ‘아빠’ 호칭에서 그 같은 면모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어린이가 아버지에 대한 깊고 친밀한 신뢰심을 드러내고 아울러 존경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애정 어린 표현이다. 힘든 역경의 순간에 한층 더 그 호칭은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신뢰심과 심오한 애정을 드러낸다. “아빠!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5). 예수님은 ‘아버지’ 칭호 자체가 지니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할 하느님의 여성다움과 모성을 ‘아빠’라는 고유한 애칭으로써 보완하신다.
한편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으로써 구약성경이 그토록 강조해 온 창조주로서의 초월적 면모를 그대로 전해주셨다. 하느님은 만물을 부성애로써 보호하며 보살피는 창조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며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불렀다 해서 우리가 ‘어머니’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로는 물론이고 아울러 어머니처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실상 하느님은 인간의 성별을 초월해 계신다. 때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어머니처럼 느껴진다면 기도 중에 ‘어머니’라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인간적 부성애와 모성애의 근원이면서도 이를 초월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거룩한 ‘어버이’시다. [2008년 7월 6일 연중 제14주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10] “전능하신 천주 성부” (2)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천사의 말을 듣고서야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아기를 낳기로 작정하셨다. “남자를 알지 못해서” 하느님의 위대한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한 처지이지만 마리아가 망설임 끝에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은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천사의 단언을 들은 때문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전능을 들어 구원의 가능성을 역설하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3-26).
성경은 하느님의 속성을 ‘영원’, ‘신실’, ‘거룩’, ‘무한’, ‘자비’, ‘선’ 등 여러 가지로 묘사하지만 사도신경은 ‘전능’만을 제시한다. 전능은 “천지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에 가장 어울리는 속성이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것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보살피고 권능과 사랑으로 다스리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창조주이신 까닭에 전능하시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전능에 근거한다. 하느님이 전능하지 않고 또 우리가 전능을 믿지 못하면 그분의 존재도 믿을 수 없고 안심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전능이 하느님 신앙의 바탕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느님의 전능을 자주 단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셨네”(시편 115,3).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저는 알았습니다”(욥 42,2). 신앙인은 하느님께 믿음을 표명하거나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항상 전능을 고백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전능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가정 적절한 순간이기에 교회의 공식 기도문도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부르며 시작한다. 하느님은 무엇이나 다 이루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굳게 신뢰하며 간구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전능과 관련하여 말씀하셨다(루카 18,18-27). “선하신 스승님” 하고 부르며 영생의 길에 대해 묻는 어떤 부자에게 그분은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단언하면서 구원에 관한 담화 끝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구원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단정하신다.
한편 끈기와 신뢰심으로 기도할 것을 역설하기 위해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하느님이 당신 선에 근거하여 가장 큰 선물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느님께서 선하고 전능하시므로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하며 어렵고 힘들 때에도 언제든 간구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은 전횡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에 바탕을 둔 전능이다. 사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사랑이 없는 전능은 독재로 전락한다. 그런 전능은 이기적 만행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려는 전횡일 뿐이지 남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에 불과하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태 27,41).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들은 이 비웃음은 전능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으나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스스로 무능하셨다. 사랑과 선에 바탕을 둔 하느님의 전능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해 믿고 고백하는 모든 것의 토대이고 출발점이다. [2008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