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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신경 해설: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18 조회수2,213 추천수0
[사도신경 해설 13]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1) 하느님의 ‘외아드님(성자)’


신경의 둘째 항목은 인간 예수님이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님”, “그리스도”시라는 신앙 고백문이다. 그분은 애초부터 인간과 다른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태어날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루카 1,32)이라 예고함으로써 보통 인간 존재가 아님을 명백히 밝혔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자각하셨다. 열두 살 때 이미 아들로서의 정체와 사명에 대해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늘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부모가 사명에 관한 그분의 선언을 당장 이해 못할 정도로 그분의 자각은 뚜렷하였다.

예수님의 이 자각은 스스로 깨달은 바이기도 하지만 하느님도 이를 공개적으로 확증해 주셨다. 사람들 틈에 세례받는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고 선언하셨다. 또 높은 산 위 제자들 앞에서 새하얀 모습으로 변한 그분을 향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고 명령하셨다. 아들로서의 이 자각은 하느님이 그분께 쏟으시는 부성애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요한 5,20).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실 만큼 완전히 사랑하심을 찬양기도로 나타내셨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하느님이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주셨으므로 두 분은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요한 17,21).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 속에 머물러 있으며, 그래서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아버지로부터 나왔다”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말로 나타내신다. ‘발출’ 또는 ‘파견’이라는 표현은 그분의 독특한 출생과 특유의 사명을 드러낸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저를 사랑하셨다.”(요한 17,23)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요한 16,28)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파견되셨으므로 자신의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왔고 아버지 안에 있다고 확신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일을 최우선으로 이해하고 아버지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을 의식하고 체험하셨기에 그분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효도를 실해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그분은 목숨까지 다 바쳐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으니 아버지도 영원으로부터 두 분이 함께 누리신 그 영광으로 자신을 현양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5)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에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세상 창조 이전 영원으로부터 아드님이시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신 예수님은 신앙인이 하느님과 맺는 부자 관계와는 온전히 다른 방식으로 아드님이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본성(신성)에 참여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반면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한 본체’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무수한 하느님 자녀들 중의 아들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아들 곧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다. [2008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14]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2)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들 (1)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이 말씀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화내고 불평하던 큰 아들을 달래면서 하신 마지막 발언이자 비유의 결어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제시하신 근본 동기는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15,2)고 투덜거리던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대응하여 당신의 처신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죄인들과 어울리며 친밀하게 사귀는 자신의 처신은 그들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잘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결과라고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다. 같은 취지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비유들’인 잃었다가 ‘되찾은 것들(양, 은전, 아들)’의 세 비유(루카 15,1-52)를 제시하셨다. 이 비유들은 한결같이 후렴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라며 끝맺는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은 죄인의 회개이다. 이는 죄인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에 감동되어서 걸어온 잘못된 방향에서 전환하여 아버지를 향해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회개는 죄인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의 마음속에 여전히 불씨처럼 남아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충동받아 그 사랑의 풍요함과 동시에 자기 처지의 비참함을 깨달음으로써 진행되기 시작한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이 계획하고 실행하신 방도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는 파견이었다. 물론 하느님께서 그와 다른 계획과 방도를 모색할 수 있었겠지만 하느님은 외아드님의 파견을 통하여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아드님의 파견은 완전한 사랑의 방식으로써 구원하기 위함이다. 즉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또한 아울러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인간과 결합되어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단순히 죄에서 풀어주고 구원의 도움을 베푸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것이었다.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그 같은 계획을 결정적으로 실행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다름 아닌 “아버지 품 안에 계시는 아드님”(요한 1,18)이시다. 그 이전에도 하느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예언자들과 사제들 및 현자들을 보내어 계시와 구원을 위해 수고하셨지만 이 행적들은 부분적이며 일시적인 실현에 불과하였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한다”(히브 1,1-3). 아드님은 아버지의 마음까지 꿰뚫고 이해하는 아버지의 말씀 자체이시므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마지막 말씀’이시다. 따라서 아드님은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이는 계시의 절정이고 완성이시다. 그러므로 구원 및 계시와 관련된 하느님의 모든 약속과 말씀들이 아드님의 인격 안에 요약되고 완성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신 아드님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말씀이 되신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듣고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본 것은 생명의 말씀이다”(1요한 1,1). [2008년 8월 10일 연중 제19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15]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3) ‘구원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우는 것과 같은 의미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뿐 실제로 ‘외아드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구세주가 아니다. 인류의 스승이자 성현인 부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모든 이들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것은 그분의 탁월한 사명 수행과 성스러운 삶과 희생적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 외아들로서의 존재나 본질 때문인 것이다.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표현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난 하느님”,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신 까닭에 당신의 헌신적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다. 삶과 사명 수행 이전에 신앙의 존재와 본질 덕분에 구세주이시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갈라 4,4)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리가 속량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기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셨다. 세상에 오신 아드님은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셨는데, 이는 예속된 인간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다. ‘속량’이란 ‘사서 풀어준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땅한 대가(몸값)를 지불하여 노예를 사서 자유인이 되게 해주던 사회관습을 가리킨다. 즉 노예처럼 죄에 예속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게 해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은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고 희생시키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파견되신 아드님은 그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인간과 똑같은 처지에 들어오시게 되었다. 스스로 속박된 자가 되었다. 이처럼 아드님이 인간의 해방과 하느님의 자녀됨을 위하여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도록 세상에 파견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외아드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요한 16,27)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16,28) 이런 발언들은 예수님 자신의 근원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아드님이시므로 세상에 오실 수 있었다. 그분의 세상 파견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느님”을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신”(요한 1,18) 것이다.

아드님이 세상에 파견되신 목적은 인간의 속량 곧 해방과 구원이다. 그런데 파견은 구원의 본질을 규정한다. 파견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성자의 파견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원은 단지 인간을 온갖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속량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보이는 계시이며, 나아가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자아 봉헌이기도 하다.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결국 당신 자신을 전부 내어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로마 8,32) 성부께서 당신에게서 나신 성자를 세상에 파견함으로써 이루시는 구원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인간에게 내어주시는 것이다. 성자의 파견이 이러하므로 구원의 결과는 하느님의 생명의 전달인 것이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2008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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