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25] “고난을 받으시고” - 고난 의미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은 십자가라는 치욕적이며 혹독한 형벌의 고통이다. 신체적 고통 이외에 정신적, 영신적 고통까지도 겪는 형벌이다. 그분은 신체적 고통 말고도 수치와 경멸, 비웃음과 조롱 등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으며, 제자들의 배신까지도 겪어야 했다. “나무에 매달려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신명 21,23)로서 영신적 고통도 감당하셨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십자가에 매달리셨으므로 그분의 영혼까지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십자가는 야만인이 만든 지독한 형벌이다. 죄수가 극도의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는 것이므로 잔인하기 그지없는 형벌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숨을 거둘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가장 혐오스러운 십자가 고통을 감당하셨다.
예수님은 고난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셨다. 십자가 고난을 겪기 전에도, 그 후에도 그런 고난을 겪어야함을 익히 아셨다. “많은 고난을 겪게 되리라.”고 수난을 예고하셨으며(마르 8,31), 부활 후에도 그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루카 24,2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다고 해서, 또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고통을 미화하거나 고통 그 자체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찬양해서는 아니된다. 고통 그 자체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의 힘을 지닌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1요한 4,7-10)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아드님으로, 이 땅에서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이는 그분이 사랑의 큰 상처를 받을 분임을 뜻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응답 받거나 거절당할 수 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 측의 거절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 또 두 자유로운 존재(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안에서만 자신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랑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거절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다. 그런데 사랑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을 원한다. 또한 상대방의 가장 큰 행복을 원하므로 그 상대방이 사랑을 거절하더라도 계속 그를 용서하며 사랑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기를 원하시므로 인간의 고통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다.
고난은 그분이 죄인들과 맺으신 깊은 유대의 결과이다. 처음부터 끝가지 죄인의 모습을 취하고 죄인들과 어울리고 사귄 연대성 때문에 혹독한 고통을 겪으셨다.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죄인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7,34) 용서의 기도는 그분의 고통이 용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드러낸다. 그분은 죄인을 죽기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므로 고난을 겪으셨다. 스승이신 그분에 대한 제자들의 배신은 죄 많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셨음을 가리킨다. 고난은 그분이 처음부터 죄인들과 맺으신 깊은 연대관계의 결과이므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실재를 나타내 보이는 표징이 된다. 사랑의 순수성과 깊이를 드러내고 또한 아울러 그 사랑에 큰 상처를 입히는 죄의 심각성을 폭로한다. 고난은 죽기까지 사랑한 열정 그리고 그 사랑을 거절한 죄의 무게를 보여준다.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 하고 빌라도는 상처투성이의 예수님을 성난 군중들 앞에 내보이며 외쳤다. 그 모습은 죄로 인해 상처 입은 인간의 모습이면서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용서하시는 그분의 자비하신 모습이다.
[2008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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