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29]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1) 죽음에 대한 승리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참으로 죽어 묻히셨다. 교회는 부활 대축일 전에 성 토요일을 지내며 그분의 묻히심을 기억한다. 숨지신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마련한 새 무덤에 안장되셨다. 요셉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직접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구하였고 자신의 무덤을 그분께 선뜻 내어주는 등 장례절차를 도맡다시피 하였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고 ‘예수님의 제자’이며,‘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기도 하다.(마르 15,42-47) 유다교 최고의회 의원인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식 일체를 주관했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범법자로 몰아 신성모독자로 사형에 단죄한 장본인이 최고의회였기 때문에, 그 의회 의원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구하고 자기 무덤에 안장한 사실은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는 셈이다. 예수님의 묻히심은 비록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로마 제국이나 유다 당국이 그분의 무죄를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심으로써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순간 끝까지 죽음을 겪으셨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다.”(히브 2,9) 그분이 죄인으로 처단되셨지만 ‘모든 이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숨을 거두신 후 장례 중에는 당연히 사람들의 존경과 예우를 받으셨다.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요한 19,42) 안에 안식을 누리셨다. 예수님의 죽음의 상태는 그분이 묻히시고 죽음의 나라에 가신 신비이다. 성 토요일의 신비이다. 그분의 묻히심은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신 후 취하시는 하느님의 안식일을 드러낸다. 창조사업을 마치신 후 하느님께서 안식을 취하신 것과 같이 구원사업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하느님처럼 안식을 누리셨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세상 구원을 위하여 하늘 위에서부터 땅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이다. 삶과 더불어 시작되고 죽음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마무리되는 ‘하강’의 과정이었다면 땅 아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죽음을 겪으신 후에 저승에 ‘내려가셨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분께서 ‘이승’에서 십자가 죽음이라는 가장 낮은 단계까지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삶을 마치신 후, ‘저승’에까지 내려감으로써 마침내 ‘하강’을 마감하셨다. 최하단에까지 내려오신 그분은 부활하시어 가장 높은 단계에로 ‘올라가실 것(승천)’이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히브2,9)
‘저승’은 산 이들의 세계인 ‘이승’과 달리 ‘죽은 이들의 세계’이다. 또한 그곳은 단절과 멸망의 장소인 지옥과도 다르다. 특정 장소라기보다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예수님 이전에 죽은 모든 이가 처해있던 상태이다. 사람들이 죽은 후 결정적 구원을 기다리는 상태이다. 예수께서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의인들을 만나러 저승에 가신 것이다.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히브 2,14) 악마에게서 죽음을 앗아 쳐부수신 뒤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던 의인들을 해방시키려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셨다. ‘저승’ 표현은 예수께서 참으로 죽으셨음을, 그리고 우리를 위한 구원적 죽음으로써 죽음과 그 세력들을 철저히 패배시켰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2008년 11월 23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30]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2) 십자가 죽음의 의미
예수의 생애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삶이었듯이, 그분의 죽음 역시 남을 위하는 헌신적 죽음이었다. 선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착하게 죽음을 맞는다(선종). 이기적이고 추한 삶은 아름답지 못한 죽음에 귀착된다. 착하게 죽기 위하여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 죽음이 생명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서 생명과 더불어 커나가고 있기 때문에, 삶의 끝인 죽음은 삶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인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삶의 결과이기에 그 죽음은 그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분은 불의와 거짓, 폭력에 의해 처형당하셨지만 삶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위하여 살아온 것처럼 헌신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분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겸손하게 사셨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셨고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낮추며 사셨다. 그분의 순종과 겸손은 십자가 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며 기도하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하고 외치며 숨을 거두셨다. 죄인처럼 자신을 끝까지 낮추어 세례를 받으신 그분은 십자가상 죽음을 또 다른 세례로 여기며(마르 10,38) 죄인처럼 울부짖으셨다.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체험은 죄인의 경험이다. 그분은 죄가 추호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겪는 죽음을 겪으신 것이다. 그만큼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낮추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 2,7-8) 예수님은 죽을 때까지 초지일관 겸손과 순종을 완전하게 실천하셨다. 이는 죄 많은 인간과 온전히 하나됨으로써 그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는 이 구절은 십자가 죽음의 세 가지 원인을 지적한다. 첫째, ‘성경 말씀대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으심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으로써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완벽히 이행하셨다. 아버지께서 구원을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아들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셨다.”(요한 3,16)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파견함으로써 인간에게 내어주셨으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놓으신’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인간의 불의, 거짓, 폭력이 그분을 처참하게 거꾸러뜨렸다. 예수님의 피투성이와 상처투성이는 인간의 죄가 끔찍히 저지른 처참함이다. 종교의 거짓과 위선, 정치의 불의와 무책임, 민중의 실망과 미움, 그리고 군인의 폭력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인간의 자유가 오용이나 남용될 때 하느님마저 죽이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일생동안 순종과 겸손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죽도록 섬기고 사랑하셨으므로 삶과 사명에 대한 죽기까지의 성실과 책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종하시고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는”(이사 53,11) 주님 종의 삶을 살며 사명을 수행하셨다. 십자가 죽음의 이 같은 구원적 효과를 교회는 속량(구속) 해방, 의화, 화해, 보상, 공로 등으로 표현한다. [2008년 11월 30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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