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38] “성령을 믿으며” (1) 성령의 파견(강림)
성부와 성자에 대한 신앙고백 다음에 세 번째로 성령에 대한 고백이 이어지고 이로써 신경은 마무리 된다. 이 고백 이후의 신경 내용은 성령의 활동과 연관된 사항들이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성인의 통공’, ‘죄의 용서’, ‘육신의 부활’, ‘영원한 삶’ 등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주관하시는 사건들이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교회가 태어나고 성인들 간의 사귐과 나눔이 이루어지며 성사가 거행되고 마침내 개인과 세상의 구원이 최종 완성된다. 성령의 이 고유한 구원활동을 교회는 ‘성화’라 칭하고 성령을 ‘성화주’라 부른다. 성령 강림은 성자의 구원사업이 성취된 결과이다. 성자께서 강생과 삶,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으로써 구원사업을 완수하신 이후로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성령의 파견은 성자의 파견이 완결된 결실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부로부터 계획되고 준비되어 왔으며, 또 성자에 의해 실현된 결정적 구원사건들이 성령에 의해 계승되고 최종 마무리됨을 뜻한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은 성부로부터 비롯하고 성자를 통해 실현되는 모든 것,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과 생명 등을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완성시키는 ‘성화주’이시다.
성령 없이는 교회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성인들 간의 친교는 성립되지 않으며, 성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온 세대 사람들 안에서 자라지도 결실 맺지도 못할 것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보다 못하고 뒤떨어지기 때문에 두 신적 위격 다음에 호칭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는 주님인 성령께서 세 번째로 호칭되시는 것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고유한 역할 때문이다. 성부가 ‘시초’에, 성자가 ‘과정’에, 성령이 ‘마침’에 각기 고유하게 작용하시는 것이다.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고 싶어도 물이 없으면 반죽할 수 없고 또 불이 없으면 반죽된 밀가루를 빵으로 구워낼 수 없듯이, 성부로부터 비롯하고 성자에 의해 성취된 하느님 사랑의 업적은 성령 없이는 마무리되지 못한다. 성찬 전례중 집전사제는 봉헌된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얹고 성령의 강림을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하고 축성 기원기도를 바친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비로소 빵과 포도주의 봉헌예물이 거룩하게 되어 성자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변화된다. 곧 축성되는 것이다. ‘축성’이란 창조된 것을 하느님께 예물로 바쳐 되돌려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축성되는 것을 ‘성변화’라 한다.
성령이 파견되심으로써 제자들이 ‘사도(파견된 이)’로 변화되어 교회가 태어나고 또 ‘선교 공동체’ 곧 명실상부한 교회가 되었다. 성령과 교회를 통하여 성자의 구원사업이 세상 안으로 퍼지고 온 세계 모든 이들 안에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성자의 파견을 ‘강생’, 성령의 파견을 ‘강림’이라 한다.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의해 차례대로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강림하심으로써 성삼위의 사랑 및 생명의 사업이 완성되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두 가지 방식 곧 성자와 성령의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구원사업을 성취하셨다. 성령 강림 역시 성자의 강생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아포기 및 자기 내어줌이다. 그래서 두 가지 파견에 대해 ‘내려오다’를 뜻하는 ‘강(降)’이라는 낱말을 쓴다. 하느님은 온전하게 내어주는 사랑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으므로 하느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선사되는 것이다. [2009년 2월 8일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39] “성령을 믿으며” (2) 성령의 상징 (1)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을 때 성령께서는 거센 ‘바람’과 ‘불꽃 모양의 혀’로 강림하셨다(사도 2,2-3 참조). 성령은 강한 힘과 뜨거운 열정으로 그들을 변화시켰다. 성부와 성자는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되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시지만 성령의 형상은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자연물들이다. 인간의 모상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는 우리에게 인식되시지만 성령은 물, 불, 바람, 숨, 구름, 기름, 비둘기 등으로 당신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신다.
성경에서 성령은 무엇보다 숨, 입김, 기운으로 표상된다. 하느님의 ‘입김’이고 ‘숨결’이시다.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말씀 하시고 “숨을 거두신”(루카 23,46)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고 하셨다. 부활하신 분의 내쉬는 숨 덕분에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들이 되살아났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이다.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제게 생명을 주셨다.”(욥 33,4) 이 하느님의 기운이 한 처음에 어둠이 덮고 있던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참조). 성령은 하느님의 기운으로 창조와 생명의 원리이시다. 창조의 영이며 부활의 영이시다. 하느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으로 인한 탄생’에 관해 말씀할 때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으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성령은 세찬 바람으로 사도들에게 임하셨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때 바람을 이용하여 그들을 구출하셨다. 바람으로 갈라진 바다의 바닥을 말리시어 백성이 마른 땅을 밟게 하셨다(탈출 14,21-22). 바람은 자연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신비로운 힘이며 자유로운 힘이다. 자연의 모든 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제압하고, 때로는 무언가를 가져오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고 파괴하기도 한다. 성령은 해방과 심판의 힘이다.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를 바닷속으로 빠뜨리려는 세찬 바람을 예수님은 꾸짖어 잠재우셨다(마태 8,26). 가공할 힘을 가진 바람은 하느님에 의해 장악되고 조종된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이용하시는 자유와 심판의 힘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옆구리를 군사가 창으로 찌르자 거기서 “피와 더불어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생전에 예수님은 성령을 물에 비유하셨고 성령을 보내주기로 수차례 약속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강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7-38). 약속하신 성령을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실제로 보내주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다오”라고 청하신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물”(요한 4,4)을 주고 싶으셨다. 물은 생명 그 자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산꼭대기에서 계곡을 타고 흘러 강을 통과하고 바다로 모인다. 그리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물은 모든 것을 관통하고 일치시키고 하느님께로 이끈다. 성령은 물처럼 만물을 하나로 묶는 일치와 생명의 힘이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력과 활력이 넘친다. [2009년 2월 15일 연중 제6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40] “성령을 믿으며” (2) 성령의 상징 (2)
예수님은 성령의 불이 이 세상에 뜨겁게 타오르기를 원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 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냐?”(루카 12,49). 실제로 성령께서는 혀 모양의 불꽃으로 제자들 위에 강림하셨다. 그리하여 무기력한 제자들을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사도로 변화시켰다. 불은 모든 것을 삼켜 태워서 깨끗한 것은 보존하고 더러운 것은 없애버린다. 성령은 모든 것을 불살라 선은 보존하고 악은 태워 없애는 심판과 정화의 불이다. 위로 향하는 특성을 지닌 불처럼 성령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을 향해 드높여 주는 열정과 사랑의 불이다. 불 역시 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에 필수 요소다. 불 없이 바람과 물만으로는 생명이 생겨나지도 지탱되지도 못한다. 때때로 터져 나와 불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화산의 불길에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체온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들은 모두 불을 먹고서만 살 수 있다.
구름과 비둘기의 형상으로도 성령은 당신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신다. 구약에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부터 구름은 때로는 어두운 구름으로, 때로는 찬란한 구름으로 그 초월적 영광에 감싸여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계시한다. 드높이 있지만 땅 위에 그늘을 드리움으로써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구름처럼 성령은 우리와 친근한 분이시다. 비둘기는 물과 연관이 깊다. 노아의 대홍수 때에는 올리브 가지를 물고 와서, 홍수가 끝나서 땅이 다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예수 세례 때 그분 위에 내려오는 비둘기 형상은 무엇보다 먼저 성부의 사랑을 상징하며, 세례 받은 이들의 깨끗해진 마음 안에 성령께서 내려와 머무심을 나타낸다.
기름도 성령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을 충만히 발리어져’(메시아) 세상에 파견 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이시다. 기름(올리브)은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 향기를 내는 향료, 싸우는 선수의 몸을 멋지게 다듬어 주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게 해주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악과 투쟁하는 데 힘을 준다. 그래서 견진성사 때 그리스도인의 이마에 기름을 바른다. 기름은 하느님의 ‘날인(도장)’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전능의 날인을 찍으신”(요한 6,27) 분이시다. 우리도 세례와 견진, 성품 성사 때에 기름이 발리어져서 성령의 날인을 받는다. 세 가지 성사들은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는 성사이므로 지워질 수 없는 ‘인호’를 찍어준다. 성령의 기름으로 하느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령의 상징들 숨, 물, 불, 바람, 구름 등은 생명체의 생존에 없어서는 아니 될 요소들이고 동시에 모든 생명체가 아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공통된 특징들은 생명, 힘, 열정, 사랑이다. 성령은 그런 요소들처럼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생활에 절대 필요한 분이시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도, 유지할 수도, 성장시킬 수도 없다. 또한 성령은 그 상징물들처럼 우리에게 아주 친밀한 분이시다. 숨, 물, 바람처럼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인지하지도 느끼지 못할 정도다. 성령은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힘이다.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성령께서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성령은 선교의 힘, 증언의 능력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명력과 원동력이며 활력이시다. 하느님의 힘이요 능력이신 성령에 의지하면 우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2009년 2월 22일 연중 제7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41] “성령을 믿으며” (3) 성령의 현존
성령은 그 표상들인 물, 불, 숨처럼 고요히 현존하고 활동하신다. 그 표상들처럼 성령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계시므로 만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면서도, 또 아주 가까이 현존하시므로 우리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시는 것 같다. 신경도 성부와 성자에 대한 고백에 비해 성령에 관한 고백은 극히 간소하다. 다른 언급도 없이 믿음의 고백만 있다. 이는 성령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 내지는 무시를 반영하는 듯하다. 교회가 성령에 역사적으로 무관심하였을 때 활력과 생명력을 잃고 타성에 젖었다. 말씀은 살아있지 못하고, 신학은 빈약하고, 성사는 형식적 예식이 되고, 전례는 과거에 대한 회상에 불과하고, 기도는 기계적 반복이 되고 말았다. 성령은 우리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할 만큼 아주 친근하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파견을 약속 하시면서 ‘진리의 영’, ‘파라클레토스’(새성경에는 ‘보호자’로 번역됨)라 명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5-16) 보호자, 협조자, 위로자, 변호인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파라클레토스는 ‘곁에 불려와 있는 이’라는 뜻이다. 원래 어린이나 노약자 등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 곁에 머물며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이를 가리킨다. 어린아이에게는 엄마가 바로 그 같은 존재이다. 그리스도 역시 파라클레토스이시므로(1요한 2,1). 그분께서는 성령을 ‘다른’ 파라클레토스라 칭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사시며 그들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신 첫 번째 파라클레토스이셨다면, 이제 더 이상 육체적 방식으로 그들 곁에 계시지 않으므로 그분은 당신의 ‘아니 계심’을 ‘가까이 계심’으로 바꿔주실 다른 파라클레토스를 보내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는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성령은 하느님의 현존 자체이시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라는 ‘임마누엘’(성자의 별명)과 ‘파라클레토스’는 같은 뜻의 하느님 별칭들이다. 둘 다 하느님의 친근한 현존을 가리킨다.
‘곁에 불려와 계시는’ 성령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도와주는 ‘협조자’이고, 우리를 온갖 죄와 위험과 시련에서 지켜주는 ‘보호자’이며, 피고인으로서 재판석에 불려있을 우리 대신 증언해 주는 ‘변호인’이고, 어려움과 고통 중에 허덕일 때 격려와 힘을 주는 ‘위로자’이시다. 파라클레토스를 이처럼 여러 가지 칭호로 바꾸어 번역하는 것은 그 뜻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에 따라 우리 곁에 와서 베푸시는 무수한 도우심을 다양하게 표현한 결과다.
성령은 ‘진리의 영’(요한 14,16; 16,13)으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며”(16,9)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16,13)이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26). 진리 안으로 이끌어 거짓을 깨닫게 하며 또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어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 진리와 성령의 주요 활동이다. 분별력과 이해력도 성령의 큰 선물이다. 거짓과 뒤섞여 있는 진리를 가려내고, 잊기 쉬운 진리를 기억하게 하며 진리의 삶에로 이끄신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거짓과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한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복음선포는 성령이 죄와 의로움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고 진리 안으로 이끄시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해주신 결실이다. 성령은 소리 없이 곁에 와 계시어 보호자와 협조자, 진리의 영으로서 활동하신다. [2009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가톨릭마산 6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42] “성령을 믿으며” (4) 예수와 교회의 영
예수님은 성령의 파견을 약속하면서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요한 14,15) 그리고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버지께 간청하고 당신이 떠나가야 성령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신다고 말씀함으로써 성령이 온전히 당신께 의존해 있음을 밝히신다. 성령은 성부께는 물론 성자께도 의존해 있으면서 활동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26)“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6,14)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모든 것을 선사 받으셨으나 성자 스스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께 대한 의존 관계에서 말씀하고 행동하시는 것처럼 성령 역시 모든 면에서 성자께 의존해 계시다. 성령은 전적으로 성자의 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의 파견에 대해 두 가지 전승을 전해준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 당일에 성령을 보내신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데 반해 루카 복음서는 부활 후 50일째 성령이 강림하신 것으로 보도한다. 이는 성령의 파견을 주님에게 혹은 교회에 결부시키느냐에 따라 생겨난 견해차이다. 요한은 성령강림을 부활하신 주님과 직결시키고 있는 반면 루카는 교회의 창립에 연관시킨다. 요한은 성령을 부활한 분의 선물로 묘사하며, 루카는 성령이 교회의 창립 주역임을 강조한다. 두 복음사가는 각기 성령이 주님의 영이고 아울러 교회의 영임을 부각시킨 것이다.
‘주간 첫날 저녁’ 곧 부활 당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다.(요한 20,22) 성령은 부활한 분의 선물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함으로써 숨을 내쉴 수 있는 분, 성령을 주는 주님이 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는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영을 모신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다.”(1코린 12,3) 그러므로성령에 의지할 때에만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
성령 강림으로써 드디어 교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성령 강림일은 교회 창립일이다. 예수님이 생전에 메시아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그 조직의 뼈대를 형성해 주셨는데, 십자가 사건으로 와해되었던 공동체가 부활 후 성령이 오심으로써 마침내 신앙공동체 곧 교회가 태어났다. 교회는 예수 부활의 선물인 성령께서 강림하신 결실이고 선물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교회의 탄생과 성장의 주역임을 기술한 성경이다. 성령께서 늘 교회와 함께 하시므로 교회가 초창기의 시련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선교 열정을 갖고 복음을 선포하면서 세상 안에 뻗어나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성령의 표상인 ‘세찬 바람’이 교회 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불어온 것처럼 성령은 교회 내에서만 활동하는, 교회에 예속된 영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영이다. 곧 하늘에서 내려와 교회 안에 활동하신다. 교회는 성령께서 충만하게 활동하시는 특유한 활동 장소이지만 유일한 독점자리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성령은 교회의 영이시다. 교회의 탄생과 성장 등 모든 활동의 원리이시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성령강림 덕택에 교회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로써 선교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때문이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8) 성령은 특히 선교하는 교회의 원동력이시다. [2009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9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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