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55]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1) 죽음
인간은 희망의 존재이다. 내일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희망하면서 산다. 오늘이 고달프더라도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 바라기 때문에 힘든 지금은 인내로이 견딜 수 있고 더욱이 보람 있게 지낼 수 있다. 내일과 미래를 향해 열려있지 않고 닫혀 있다면 희망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희망은 가까운 내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내일을 넘어서 먼 미래를 향해 뻗어있다. 내일에만 국한된 희망은 참 희망이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끝장난다면 인간은 진정 희망하는 존재일 수 없다. 죽음으로 끝장나는 삶이라면 인간은 희망의 존재일 수 없다. 참 희망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뻗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진실로 희망하는 존재라면, 희망이 인간 존재의 근본 요소라면, 인생은 죽음과 함께 끝장나는 삶이 아님이 확실하다. 우리가 영원한 삶을 갈구하고 믿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 있는 희망 덕분이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로마 5,12). 이 성경 말씀대로 과연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것인가? 죄가 끌어 들인 죽음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 곧 인간을 영원히 멸망시키는 죽음이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죽기 마련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 즉 ‘끝이 있는’ 존재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명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외부로부터 생명 안으로 침입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생명 안에 있다. 생과 사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두 개체가 아니다. 생과 사는 하나이다. 죽음은 이미 생명 안에 들어 있다. 생명이 자라면서 죽음도 함께 자란다. 죽음은 생명의 마지막이고 끝장이지만 생명 안으로 갑자기 들이닥쳐 모든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안에 이미 들어와 생명과 함께 자라는 생의 동반자이다. 생명 안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면, 참 생명은 죽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자연적인 죽음은 원래 생명 안에 있었는데 죄가 생명 안에 들어와 죽음을 영원한 멸망으로서의 가치로 바꾸어 놓았다. 죽음이 공포와 절망을 안겨주는 무서운 원수로 바뀌게 된 것은 죄 때문이다.
죽음이 생명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으면 죽음은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을 지닌다. ‘끝장’으로서 또한 ‘성취’로서의 죽음이 있다. 이는 끝의 두 얼굴과 마찬가지다. 마지막은 멸망을 뜻하는 끝장이 될 수도 있는 반면에 완성을 뜻하는 성취일 수도 있다. 목표 달성은 마지막 일이다. 죽음 역시 파멸이 될 수도 있고 완성이 될 수도 있다. 미완성의 생명이 죽음으로 인해 완성될 수 있다. 죽음의 두 상반된 모습은 삶의 질과 내용에 따라 좌우된다. 이처럼 죽음은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다. 죽음은 그 안에 삶을 요약하여 생전의 감추어 있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낸다. 삶을 결산하고 그 결실을 거두는 수확이다. 죽음이라는 끝이 없으면 삶은 영원히 감추인 채 남아있을 것이며 끝없이 권태로운 연속일 뿐이고, 안식 없는 분주함이며 수확 없는 헛일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으로써 그 가치를 역전시켰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닫고 있던 죽음의 본래가치를 회복시켰다. 그 긍정적 가치를 드러내고 그 흐름을 바꾸어 놓으셨다. 그분은 죄가 없는 거룩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또 지고한 사랑으로써 죽음을 겪으신 결과 죽음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죄를 쳐부수셨다. 그리하여 부정적 가치를 극복하고 긍정적 가치를 죽음에 되찾아 주었다. 죄를 극복하고 이기는 사랑의 승리를 위한 길을 터놓으셨기에 죄에 물든 죽음 즉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1코린 15,55) [2009년 6월 14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거창본당 주임)]
[사도신경 해설 56]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2) 천국, 지옥, 연옥
미사 중에 우리가 하느님께 비는 주된 소원은 영원한 생명이다. 시작 예식인 참회 때 사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하며 기도하고, 성찬기도 마지막에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하소서” 하며 간구하고 영성체 직전에 사제 혼자 마음 속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하며 간청한다. 미사 성제 중에 세 번이나, 더욱이 중요한 시점에 영원한 생명을 청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영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수고한 목적은 풍성한 생명 곧 영생이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의 일도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영생은 구원의 과정이 완료되는 도착점이고 신앙의 궁극 목표이며, 인생의 최종 완성이다. 영생에 대한 희망과 갈구가 삶을 무사안일과 현세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며 윤택하고 활력 넘치는 삶이 되게 해준다. 영생은 현세 삶의 끝에 주어지는 열매이다. 그것은 ‘육신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거쳐 주어진다.
영생은 성경에서 천국, 지복직관, 에덴 낙원, 혼인 또는 잔치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풍성함과 기쁨, 충만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표상들이다. 영생은 ‘천국’이나 ‘낙원’이 가리키듯 하늘 위의 어떤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지복직관이나 혼인이 가리키듯 하느님 바로 곁에서 누리는 친교이며 일치이다. 천국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는 영역을, 낙원은 죄로 인해 잃었다가 되찾은 새 에덴을, 지복직관은 하느님을 마주보는 기쁨과 희열을, 혼인잔치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각각 가리킨다. 영생을 가리키는 표현들에 집착해서는 아니 된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 영생은 현세 삶과 인격체의 완성이요 하느님 곁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히 사는 친교의 삶이다.
천국이 영생의 획득이며 향유이듯이, 지옥은 그 반대로 영생의 상실이다. 천국이 장소가 아니고 상태이듯 지옥은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한 처지다. 성경에는 지옥이 폐쇄, 배척, 고립, 단절 따위로 표현된다. 천국과 지옥은 하느님이 구원받은 이와 단죄받은 이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해둔 천상 지역이나 지하 감방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느님이 따로 만드실 필요가 없다. 천국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이며 지옥은 하느님의 영원한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형제들과 참사랑을 실행하고 체험할 때 천국을 미리 맛본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에 천국이 있다. 반대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등지며 닫힌 자세로 고립 속에 살거나 형제들을 미워하고 증오할 때 지옥을 경험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도움으로 지금 이 곳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시작한다. 성사들은 영생을 미리 누리도록 우리들을 초대한다. 하느님과 우리를 결합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것 모두가 영생과 연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죄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불완전한 형식으로 영생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천국 자체인 하느님과 온전히 결합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더러움을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현세에서의 정화는 끊임없는 ‘회개’이고 내세에서 거쳐야할 정화과정은 ‘연옥’이다. 이것 역시 장소가 아니라 완전한 결합에 방해되는 더러움을 없애는 고된 ‘마지막 정화’ 과정이다. [2009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거창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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