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교회와 다문화
왜 교회는 다문화 현상으로 우리 사회에 이주해 온 이민족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들이 단순히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기 때문에 교회가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아니다. 교회가 이들을 돌보는 것은 교회의 신원과 관련이 있다. 즉 이민족과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탄생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도교회 때부터 이민족들과 함께 한 형제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본지에서는 교회가 받은 소명, 그 탄생, 그리고 초대교회의 삶에서 나타나는 이민족에 대한 태도와 그 태도에 나타나는 교회의 다문화에 대한 근원적 소명을 살펴보려 한다.
1) 복음선포와 다문화
예수님은 수난 전 겟세마니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뿐 아니라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셨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란 제자들의 복음선포를 듣고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들”이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람, 특정한 민족, 특정한 문화를 지닌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언어, 지역과 시대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는 특정한 부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지향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따라 세상을 일치에로 이끌 의무(세상일치의 사명)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일치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마태 28,19; 루카 24,47)고 하시며 복음선포의 사명을 맡기셨다. 그런데 복음사가에 따라 복음선포의 대상이 약간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마르코복음은 “모든 피조물”을 복음선포의 대상으로 선포하고 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제자의 파견과 죄의 용서를 연관시키고 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든지”(요한 20,23) 용서해 줄 권한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복음선포 사명의 대상이 비록 복음사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지만, 복음선포의 대상이 어떤 특정 민족과 지역, 특정 언어와 문화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모든 민족, 모든 지역, 모든 언어, 모든 문화에로 열려져 있다. 즉 복음사가들이 표현한 “모든 민족들”, “모든 피조물”, “누구”라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의 무한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제자들의 복음선포 사명을 물려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모든 민족,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해야할 의무와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는 세상 만민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세상복음 선포 의무와 세상 일치의 의무는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민족과 문화, 언어와 지역의 한계를 초월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 결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인 복음선포 사명과 세상 일치의 사명에는 그 어떤 차별이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6-28) 이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의 온갖 민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으고 있기에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며, 민족과 문화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에로 이끄는 소명에로 불리었다.
2) 교회의 탄생과 다문화
교회는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오순절에 태어났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성령이 “불꽃 모양의 혀”(사도 2,3) 모양으로 사도들 위에 내렸다. 성령의 강림은 사도들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성령강림은 바벨탑의 죄로 인해 말이 뒤섞여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던 상태에 놓였던 사람들을 사도들의 말을 자신들의 말로 알아듣게 만들었다. 성령강림은 온갖 지방에서 유다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소통의 부재를 소통의 상태로 변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소통으로 인해 사람들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알아들었고 그날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 삼천 명 가운데는 갈릴래아 사람, 파르티아 사람, 메아아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다, 카파도키아와 폰소스, 아시아 사람, 프리키아와 팜필리아, 이집트 주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로마인, 유다인,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 전 세계에서 모여 온 사람들이 성령 강림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는 첫출발의 닻을 올리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어떤 특정 민족 안에서 태어나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지방에서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성령강림으로 인해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교회가 창립된 오순절의 사건은 민족들 간의 어떤 차별이나 배제가 없는 일치와 소통, 그리고 회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오순절 사건은 어느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다양한 인류에게 여러 언어로 다가가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교회는 그 출발에서부터 다양한 지방 출신의 다양한 언어를 쓰던 사람들로 구성된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교회 안에서는 다문화의 요소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3) 이민족을 받아들인 사도교회
사도행전 10장은 사도교회 때 이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푼 결정적인 사건을 자세히 전해 주고 있다. 베드로는 환시 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에 각종 짐승이 담겨져 있고 이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베드로는 종교적으로 속되고 더러운 것이라며 거절하자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환시 이후 이민족인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던 집에 도착하여 코르넬리우스가 본 환시를 말하였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카이사리아로 가서 자신이 본 환시에 따라 이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들에게 성령이 내렸다. 이와 같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시에 따라 이민족을 받아들였다. 또 최초의 공의회인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안티오키아의 이민족 출신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유다의 관행인 할례를 베풀지 않기로 결정하고 다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목을 조여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할 것만을 요구하였다.(사도 15장 참조) 이렇듯 사도교회는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혈통과 문화가 다른 이민족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 들이는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4) 결론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왜 가톨릭교회가 다문화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선교의 사명과 인류 일치의 사명을 부여 받았으며, 오순절에 일치의 성령에 의해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하나의 백성,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하였고 사도시대부터 이민족들을 신앙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볼 때 가톨릭교회는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 민족, 문화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민족을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라면 당연히 이민족, 이방인을 기꺼운 마음으로 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신원을 살아가는 길이다.
[월간빛, 2012년 12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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