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월 8일 원죄없으신 동정 성마리아 잉태축일에 한 강론입니다.
끝부분에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실었습니다.
제목과 같은 답답한 질문에 매여사는 것보다는 좀 더 공격적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예로부터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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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12월 8일)
제1독서 : 창세 3,9-15.20
제2독서 : 에페 1,3-6.11-12
복음 : 루가 1,26-38
1998. 12. 8.
오늘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 축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리아 성당 봉헌 축일이었던 9월 8일--성모의 탄생일로 기억한다--로부터 9개월을 역산하여 요아킴과 안나를 통하여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원죄가 없다고 교회가 선언한 것은 잉태되신 순간을 누군가 보았기에 그렇게 선언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낳게 될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고 그 은총을 통하여 살았노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에 '크게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는 말과 큰 차이 없는 것입니다. 크게될 나무의 떡잎이라고 해서 그 떡잎에 뭔가 써 있거나 남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첫 순간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깁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초세기에 이레네오 성인이 마리아를 가리켜 새로운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첫 번째 하와로 기억하는 여인이 행했던 일이 오늘의 첫 번째 독서에 나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서 창조물을 관리할 책임을 맡았던 초창기의 사람으로서 뱀에게 속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이 첫 번째 여인의 역할이라면, 새로운 하와로 등장하는 여인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의지를 받아들여 이 세상에 구원자가 태어날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역사는 어떻게든 이루어졌겠지만, 특별히 우리가 오늘 이 마리아의 잉태순간을 기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고, 원죄가 그의 삶에 자리할 곳이 없었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갖는 첫 순간의 마음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하여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의 소리를 듣고 응답할 수 있었을까? 2천년전 사람들보다도 훨씬 문명의 세계에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들도 그것만큼 이해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너무 똑똑한 시대, 소음이 많은 세상에 살다보니 참으로 조용하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유를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물질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시대, 편리함만을 제 1의 가치로 꼽는 시대에 살다가 보니, 우리의 마음 저 바탕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옛날 그 시대의 순수한 마음자세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우리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축일에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 가능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을 먼저 닫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순수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자 한다면, 가장 가까이 우리 자신부터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찾아보고 그 일을 우리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하기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한 걸음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로부터 선한 일은 싸우는 것처럼 다투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겠다는 자세가 없다고 한다면, 좋지 않은 일에 대하여 피하겠다는 마음자세는 필요합니다.
우리 생활가운데서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아담처럼, 하와처럼 내가 져야 할 책임에 대하여 나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핑계를 대고 도망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 인간이 하는 일을 판단하실 하느님이 보시는 세상입니다.
또한 믿음의 새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자신있게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 주보 5면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늘 하는 질문과 답답한 해결책이 실려 있었습니다. "너희는 성모님을 믿는다면서...?'하는 내용과 응답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는 신자들의 삶이 왜 바뀌지 않을까? 우리도 좀 더 자신감있게, '너희는 인류의 구원자로서 보조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신 성모님을 왜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지?'하는 질문을 던지고 응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쓰레기를 어질러 놓기 시작하면 열 사람이 그 뒷감당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인간으로서 겸손한 마음을 갖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의 뜻을 밝히신 마리아가 이 세상에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날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우리의 미약한 삶이 이웃 안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백성들 안에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마리아를 통하여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