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9) 사람이 정말 귀한지 궁금해요
하느님 모습 닮아 존엄한 인간
지난 호에서 정부의 실패가 가져온 폐해가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는 곧 다수 시민의 삶을 고통으로 내몰 수 있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 근본적 치유를 위해서는 사회정의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회정의란 소수의 특정 그룹이 아니라, 사회 모든 구성원이 사회ㆍ정치ㆍ경제ㆍ문화의 전 영역에서 적절한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해 자기완성을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공동선을 구축하는 사회통치 원리를 말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01항 참조).
인권의 원천은 주님이시다
사회정의와 공동선 실현, 그리고 사람의 자기완성은 상호 조건이며 목표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인에게 이는 신앙의 실현이기도 하다. 창세기 표현을 빌리면 사회정의와 공동선은 "보시니 좋았다"는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이며, 자기완성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하느님 뜻의 실현이다. 안타깝게도 하느님 뜻을 자기 것으로 삼아 하느님처럼 되려는 '유혹'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창세기는 아담과 인간의 범죄(3장), 카인의 형제 살인(4장), 사람들의 악(6장), 그리고 바벨탑 구축(11장)으로 이어지는 죄악의 확장을 서술한다.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른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당신 손길을 펼치신다. 아담과 여자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고,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시고, 노아에게 방주 한 척을 만들게 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창세기는 사회정의와 공동선, 그리고 자기완성이 어떻게 훼손되는지 보여주고, 하느님께서는 그 회복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자기완성은 하느님 모습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교회는 사람의 존엄함을 절대적 가치로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자기완성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 강생과 부활에서 존엄함의 절대성을 찾는다. 게다가 성령께서 사람의 삶을 이끌어주시기에 무엇보다도 사람은 귀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사람 존엄의 근거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찾았다. 사람의 존엄함을 훼손하거나 가벼이 여기는 모든 행태는 곧 하느님께 대한 도전인 셈이다.
사람의 존엄함은 인권이란 옷을 입고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교회는 아주 명료하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권의 궁극적인 원천은 인간의 단순한 의지나, 국가라는 실재나, 공권력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에서 그리고 그의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인권은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다"(153항).
이웃의 인권에 관심을 쏟자
그런데 먹고살기 바빠서였을까,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국가 지도자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였을까. 우리는 인권 훼손과 침해에 참 관대했다. 검역주권 논란(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논란)에서 시민의 집단 항의는 진압되고 무더기로 사법처리됐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의 절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금지된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라 할 수 있는 정치 및 시민 권리가 훼손되고 실종됐다. 기륭전자, 재능학습지, 이랜드, KTX,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리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아직도 곳곳에서 이 경제적 권리는 무시되기 일쑤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만큼 살게 됐는데 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왜 그토록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힘겨워하는지, 도대체 어느 정도 잘 살아야 만족할지 생각해볼 문제다.
어느 인권활동가의 글을 인용한다. "지난 5년동안 숱한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23분의 OO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 OO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들과 활동보조인 없이 화마에 쓰러져간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살인단속에 쫓겨 다치고 병든 이주노동자들, 일제고사와 경쟁 강화에 자살한 청소년들,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고 애도하지 못한 죽음, 살아 있을 때 그 손을 붙잡지 못한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우리는 함께 살 용기마저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자 없는 양처럼,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누군가의 재촉에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내 삶의 완성이 정말 귀한가. 사회정의와 공동선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한가. 인권에 관심이라도 투자하자.
[평화신문, 2013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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