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지킬 계명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내용은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계명(誡命)은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계(誡):죄악을 범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 이 계명은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신자로 살아가며 이 ’계명’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한 가지나 몇 가지를 자의(自意)나 타의(他意)로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커다란 짐을 갖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계명에 대한 첫 느낌입니다.
계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기에 갖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계명이 주어진 것은 사람을 구속하거나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계명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시나이 산에서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 도착한 것은 홍해바다를 건너 탈출하지 석 달째 되는 첫날(출애 19,1참조)이었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 하느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고, 신명기에 나오는 것은 출애굽 이후 40년째 되던 11월 1일(신명1,3참조)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예전의 가르침을 반복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계명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자 제정된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고, 그 정신에 따라 살아간다면 하느님이 애초에 의도하신 뜻을 실천하는 길에 다가선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계명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내용도 같은 입장에서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형식대로, 이것만은 지켜야 하느님에게서 이런 저런 축복을 얻고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 들어간 말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이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땀이나 수고로써 억지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다룰 것은 십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실천에 대한 것입니다. 그 실천과 행동에 대한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믿는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을 구별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한 가지입니다. ’가족들을 사랑한다’ 또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가족이나 이웃이 내 사랑을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따르는 행동을 보여야 말하는 의미가 충분히 발휘되는 것이죠. 성서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듯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보서간 2,15-16. 신약 443쪽) 우리가 말을 한 다음에 그 말에 적합한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계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예화> <아래 두 가지 예화의 출전: 송봉모 신부님의 강연테이프 기록>
계명이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정신을 이야기해도, 때로는 저도 거부감을 가질 때가 있고, 듣는 여러분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실천의 방법을 우리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려면,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됩니다.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이것만큼 하느님께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는 법입니다.
① 어떤 사람이 신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신부와 함께 가던 중 십계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신부님, 저는 십계명이 싫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왜 그리도 ’무엇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귀찮아 죽겠습니다.
신부는 그 사람의 얘기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몰라 암담해 하면서 말없이 운전만 하였다. 그러던 중 그들이 타고 가던 차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동쪽은 어디로 가고, 서쪽은 어디로 간다는 이정표를 바라보고 있던 신부는 핸들을 그들이 가야 할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 사람이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신부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쪽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신부님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아!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하는 이정표는 귀찮아 죽겠네. 어디로 가면 어떤가. 그냥 내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두게나"
② 한번은 어떤 사제가 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십계명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하였다. 강론이 끝나고 나서 한 신자가 그 사제에게 찾아와 말하였다. "오늘 하신 십계명에 대한 강론은 너무 솔직하고 강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아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려 하지 않는데, 이제는 더 멀리할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십계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렇게까지 강조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러한 충고를 들은 사제는 일어나서 어딘가에 가더니 ’극약’이라 써 붙인 약병을 들고 왔다. 그는 그 신자에게 약병을 들어 보여주며 말하기를, "제가 이 병에 붙어있는 ’극약’이란 딱지를 떼어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이면 어떨까요? 그러면 더 위험할까요? 아니면 덜 위험할까요?"
제 1 장 천주께서 내리신 십계명
358-112. 구원받기 위해서 교리를 믿기만 하면 넉넉합니까? : <답> 구원받기 위해서 교리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반드시 천주의 십계명과 천주교회의 모든 법규를 잘 지키고 덕을 닦으며 죄를 피해야 합니다.
358-113. 천주께서 내리신 십계명은 무엇입니까? : <답> 천주께서 내리신 십계명은 옛적에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반포하신 열 가지 계명입니다.
첫 계명은 하느님에 인간의 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이 이 세상의 것을 지어내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신앙인들을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분에게 대한 우리의 합당한 자세가 바로 114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14항을 읽습니다>***
제 1 절 : 제 1 계명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358-114. 제 1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답> 제 1 계에 명하시는 것은 흠숭지례로 천주를 만유(萬有)위에 공경하여 높임입니다.
세상의 사물 가운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있다는 수백만 마리의 세균들이 그럴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니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세상을 이루는 요소는 그것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첫 번째 근원이시라고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을 손바닥의 세균과 비교하는 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느님을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위(上位)에 공경하는 것을 가리켜 흠숭(欽崇)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 예(禮)공경하는 것이 말씀드렸으니,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115항, 116항>을 읽습니다***
358-115. 제 1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답> 제 1 계에 금하시는 것은 천주께만 드려야 할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358-116. 천주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리게 되는 경우는 어떤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 <답> 천주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리게 되는 경우는 바로 온갖 미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즉 마귀와 잡신을 섬기거나 마술과 마법을 쓰거나 헛 징험으로 길흉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뭔가에 의지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은 의지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알려고 하고, 현실에서 제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언제쯤인지 그것을 알아보려고 돈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본 것에 대하여 훗날 감사하는 행동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첫 번째 순섭니다. 그러나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주려고해도 인간이 스스로를 귀중하게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우리가 흔히 불안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고작 돈을 사용하는 것 정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미신(迷信:마음이 무엇에 홀려서 망녕된 믿음에 집착함. 종교·과학적 견지에서 망녕되다고 생각되는 신앙)에 홀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명하죠. 그러나 말로만 현명한 것이 아니라면, 사용해야 할 올바른 방법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미신의 일반적인 특성은 길(吉)과 복(福) 대신에 흉사(凶事)와 화사(禍事)를 통하여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닥친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식으로 무엇이든 의지할 곳을 찾는 특성을 이용하여 사람을 홀립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대우를 받으려하거나, 사람이 그 중요성을 깨닫고 산다면 미신이라든가 사람을 홀리는 일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고, 결국에는 인간 세상에 자리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공경에 대한 것 다음에 교회에서 정한 규정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뛰어난 역할을 했던 여인,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같은 인간이긴 했지만 삶의 모범을 남긴 성인들에 대한 공경입니다. ***<117항을 읽겠습니다>***
358-117. 성모 마리아나 성인성녀들, 혹은 그 성해(聖骸)를 공경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 <답> 성모 마리아나 성인성녀들, 혹은 그 성해를 공경함은 올바른 일입니다. 이것은 천주께만 드리는 흠숭지례(欽崇之禮)와 크게 다른 것으로 성모 마리아께는 상경지례(上敬之禮)를 드리고 성인성녀들과 그 거룩한 유해에는 공경지례(恭敬之禮)를 드려, 그 전달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남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역할을 남기기도 어렵지만, 웬만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알아주지 않아서 그렇기도 합니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시도하는 일에도 우리가 같은 존경의 마음을 바칠 수도 있지만, 의도적인 일에 대한 존경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만 착각할 뿐입니다.
마리아의 신앙과 그의 생활을 남다르게 보는 천주교회의 신앙에 대하여 ’마리아 숭배 종교’라고 개신교는 비방합니다. 한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다른 이를 깎아 내리고 비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나 위상(位相)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시기는 사람의 일생만큼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서 마리아를 공경해 왔던 역사는 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지혜가 우리보다 못나서 그런 믿음이 지금까지 전해져왔다고 억지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겉모습만 현명해지고 똑똑해졌지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과거의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천주교회에서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의 업적에 동참하신 분이고, 그에 동참하기 위해서 인간의 조건에 닥쳐왔던 여러 가지 곤경을 믿음으로 극복한 분이라고 믿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수세기를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가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의 모범을 남기신 분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당의 마당에 웬만하면 설치되어 있는 마리아 성모상도 교회에서는 같은 의도로 모시는 것이고, 우리 신앙인들도 그와 같은 모범을 따르자고 다짐하며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교회의 신앙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을 밟는 것입니다.
제 1 계명의 다른 사항입니다. 십자가나 마리아를 표현하는 석상과 같은 사물에 대한 공경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118항을 읽습니다>***
358-118. 십자가나 거룩한 석상 같은 것을 공경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 <답> 십자가나 거룩한 석상 같은 것을 공경하는 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이러한 공경은 그 물건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표상하는 자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인의 사진이나 소중한 가족 사진을 품고 다니기도 하고, 특별히 선호하는 연애인의 커다란 사진을 액자에 담아서 집에 걸어놓기도 합니다. 같은 의미로, 같은 입장에서 교회에도 신앙의 길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 종류에는 십자가, 성모상, 성인들의 동상, 벽화, 사진 등의 방법을 이용합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용하여 신앙을 설명합니다만, 눈에 보이는 바로 그것에 힘이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 성모상, 성인상, 사진을 귀중하게 여기고 그 모습을 통하여 신앙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취급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허상(虛像)이기에, 그 모습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중요한 것입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두 번째의 계명을 이야기하기 전(前)에 출애굽기 20,3-4, 신명기 5,8-9에 나오는 계명 한가지가 십계명에는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계명이 생략되어있고, 10번째로 나오는 계명이 두 가지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두 번째 계명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이름을 부르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름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이란 남이 부르라고 정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함부로 남용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름을 짓는 것은 아닙니다. 제 2 계명에 관한 것을 먼저 읽겠습니다. ***<119-122항을 읽는다>***
제 2 절 : 제 2 계명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58-119. 제 2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답> 제 2 계에 명하시는 것은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정성되이 부르며, 맹서와 허원을 지키는 것입니다.
358-120. 맹서는 무엇입니까? : <답> 맹서는 전지하신 천주를 사실의 증거자로 부름입니다.
358-121. 허원은 무엇입니까? : <답> 허원은 어떤 선행을 하기로 천주께 약속하는 것으로, 실행치 않으면 죄가 되는 줄 알면서 하는 것입니다.
358-122. 제 2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답> 제 2 계에 금하시는 것은 상당한 연고 없는 맹서와 거짓 맹서와 욕함과 저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십니까? 이름은 한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로 성서에서는 사용합니다. 특정한 대상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정한 대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물음에 응답한다는 것은 항거하지 못할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3, 9에는 최초로 범죄하고 숨어있는 첫 인류를 찾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에 그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그 의미를 알아챈 아담은 대답합니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신약성서 마르코 복음서 5, 9 에는, 게라사 지방을 여행하시던 예수님이 마귀들린 사람을 만나자 묻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수효가 많아서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 하느님은 에집트 백성에게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때에 모세를 통해서 에집트 왕 파라오에게 하신 말씀 "나는 손을 들어 너와 너의 백성을 질병으로 쳐서 땅위에서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까닭이 있어 너를 남겨두리라. 그것은 너에게 나의 힘을 나타내어 이 땅위에서 나의 이름을 두루 떨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려면 내가 가진 힘이 더 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좋을 만큼의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두 번째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과 관련된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생겨난 그분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맹세라는 말과 허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사용해야 합니다.
다음은 세 번째 계명입니다. 쉬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달력의 표시에 따라 주일이 주간의 첫날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 날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이 무엇을 따르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자세는 달라집니다. 먼저 123항과 124항을 읽겠습니다.
제 3 절 : 제 3 계명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358-123. 제 3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답> 제 3 계에 명하시는 것은 천주께 공식 기도와 예절을 바치고, 육신의 일을 피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입니다.
358-124. 천주교회에서 구약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답> 천주교회에서 구약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지키는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께 받은 권으로 그렇게 정한 것으로, 신약을 구약과 구별하고 또 신약서에 새 교회의 기원이 되는 예수 부활과 성령강림이 일요일에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이 계명을 가리켜서 파공(罷工:<罷:중지하다,그만두다> : 주일과 지정된 대축일에 육체노동을 금함)이라는 말로 썼습니다. 그저 무조건 쉬라는 의미를 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에 6일간에 걸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7일째 되는 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기2,2)고 합니다. 그 정신을 본받아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씩은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하며 그분의 뜻에 우리를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 날 하루만이라도 신앙의 정신을 돌이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성당에 들러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새로운 한 주간을 지낼 힘을 얻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본래 정한 규정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그런 정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다르게 봅니다. 한 주간동안 정신없이 움직였으니,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 ’건드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인 세상으로 바뀌는 모습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 인간마저 그렇게 바뀌는 것이야 말릴 수 없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은 공통적일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에 같은 정신을 갖고 쉽니다만, 교회에서는 주일로 그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왜 주일로 바뀌었는가? 성서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주일에는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제자들과 그분을 찾아간 여인들이 발견한 기쁜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쉰다고 해서 같은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회에서 말하는 본래의 정신을 기억하며, 우리 삶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