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대 교 리 (四 大 敎 理)
일시 : 1999. 9. 3. (금) 시간 : 20:00-21:30 장소 : 성산동 성당 견진교리
1. 인사와 소개
2. 견진성사란?
제가 이곳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견진 교리의 주제로 명령을 받은 주제는 '천주교회의 사대교리'에 대한 것입니다. 사대교리를 간단하게 한자로 표현하고 그것을 한글로 읽으면,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입니다. 간단하게 네 가지를 알려드렸는데, 여러분들은 이미 신앙인으로 살아오셨고, 지금도 신앙인으로 살고 계시니 천주교회의 '사대교리'를 믿으시겠죠.
여러분이 어떤 대답을 하셨더라도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해야 하겠죠. 만일 고양동에서 이곳까지 멀리 왔다가, 날개를 펴지도 못하고 그냥 접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기분일텐데, 그것이 싫으니 말입니다.
2.1 여러분들이 귀중한 시간을 내어서 준비하는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성사'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고,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늘 체험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너무도 복잡해서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푹 젖어서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지 않아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여유를 우리가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특별한 기회를 내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들으려고 준비하는 이 시간은 우리 눈에 보이는 방법, 우리의 감각이 작용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견진 교리를 준비하는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삶의 여유와 공간을 드리는지 그 분량에 따라, 삶에서 하느님의 힘을 발견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유와 공간 말고도 다른 것들이 더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가올 하느님의 은총을 은총이라고 알아듣는 삶의 지혜, 즉 믿음입니다.
견진성사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라고 했으니, 은총을 받기 위한 다른 조건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올바른 믿음입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5,9-10을 보면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신명기 5,9ㄴ-10)고 소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우리 가슴이 뜨끔하게 협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선의(善意)와 비교하여 말하면 그런 협박과 위협은 무시해도 될만한 것이고, 오히려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엄포를 놓는 말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협박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내용은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그 자세가 올바로 갖춰져 있다면, 하느님의 위협을 우리가 위협이라고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2.2 견진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힘을 받게 됩니다. 물론 세상이 평안해도 신앙을 아무 때나 증거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지키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을 옛날에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군사라는 존재가 그 의미를 갖는 경우는 전쟁 때라고 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부대장이 한다는 소리, "야, 나라에서 너희들에게 왜 옷을 주고 먹을 것을 주는줄 알아? 그것은 전쟁 때에 한번 멋있게 쓰자고 하는 것이야!"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가 군대에 있었을 때,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다음 군대에 머물 때에는 제가 쓰여질 기회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견진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고 했으니, 같은 의도로 찾자면 우리에게 신앙을 증거 할 때가 오면 여러분들이 준비해서 받은 견진성사 은총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여러분들의 목숨을 요구하는 어려움일 수도 있고, 그저 말로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을 어려움일지 그것을 지금으로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여러분 앞에 닥쳐올지는 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성실하기로 약속하고, 그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베풀어주실 축복의 세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을 살면서 이렇게 훈련받고 연마한 신앙의 무기를 쓰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사용할 때가 온다면, 세상은 혼란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무기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기란 폭력의 요소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갈등과 고민을 안겨주지 않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좋은 결실을 맺어 하느님의 뜻이 통하게 하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 하는 일들에 남다른 보통 사람들이 하는 자세와는 다른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3. 사대교리에 대한 설명--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과정으로 완성되는 단계인 견진성사를 올바로 받으려면, 우리가 그 때에 사용할 신앙의 무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제가 말씀드려야 할 주제입니다. 그 내용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고 설명해야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말씀드릴 시간적인 여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많은 응답과 주제들 중에서 몇 가지로 축소해서 그에 가장 강력한 무기인 '믿음'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톨릭 교회를 이루는 믿음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본질적인 4가지 중요교리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1 가톨릭의 사대교리(四大敎理)는 ①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서, 그리고 만물의 최고 상위권자로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 ②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이 세 분으로 묘사되는 분이시지만, 그 셋은 실상 한 분이라는 믿음을 말하는 삼위일체라는 것, ③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인류에게 구원의 길로 다가올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다는 것을 믿는 일, ④ 인간은 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정해진 길을 과연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했는지에 따라 후세에서 받을 상과 피하지 못할 벌이 갈라진다'는 내용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내용들을 좀 더 자세하게 여러분에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3.2. 천주존재 (天主存在)
여러분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처음에도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봤으니, 지금 질문은 중복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사대교리의 첫 번째 항목, <하느님의 존재>를 다루는 첫 번째 내용이자 질문입니다. 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만, 사람이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를 묻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은 생활의 재미를 느끼고 사십니까? 사람으로 산다는 즐거움을 느끼고 사십니까? 만일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하는 분들은 하느님이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질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까지 질문해가면서 낭비할 시간이 없이 삶이 재미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 사람들은 어느 때 그 질문을 하고 어느 때 그 응답을 듣기 원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몸으로 견뎌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삶이 너무나 어려워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기대했던 도움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꼈을 때, 바로 그때에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계시다면 왜 지금 나의 상태는 모른 체 하고 주무시는지?'를 질문하고 '그 답이 빨리 체득되지 않는다'고 외쳐댑니다. 사실은 그렇게 외쳐댈 때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고 묻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순간'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지내질 못합니다.
구약성서 시편 가운데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는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꾸짖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편 14장과 53장에 아주 비슷한 내용 두 편이 나옵니다. 시편 53장(70인역. 불가타역은 52장)을 보겠습니다. 임승필 신부님이 번역하신 200주년 새 번역의 내용입니다.
2.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는 도다. 모두가 타락하여 불의를 일삼아 착한 하는 이가 없도다. 3.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시는 도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4. 모두가 빗나가 온통 썩어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서 불러준다면, 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몰아 부치기보다는, 삶이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사람정도이겠지만, 그것은 인간을 좀더 낫게 보려는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저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탓이고,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쓸데없는 질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삽니다. 좋고 훌륭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머리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서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계신다고 내가 인정하면 계시는 것'이고, '하느님은 내 고통을 몰라주시니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계시지 않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계시는 분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 삶이 좋은 결실을 맺는 것뿐입니다.
3.3 삼위일체(三位一體) :
다음은 교리의 두 번째 항목인 삼위일체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라는 것은 하느님의 특성을 인간의 언어로 정리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특성까지도 자가들의 언어로 표현하겠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하고도 아무런 탈없이 살겠다고 다짐하는지 놀라운 일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하느님의 시각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무모한 일을 하려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그렇게 헤아릴 수 있다면, 인간을 너그럽게 봐주시는 하느님의 업적과 의도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삼위일체를 우리가 아는 용어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만물의 존재를 있게 한 성부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성자, 그리고 그 업적이 지속되도록 작용하는 힘인 성령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실상은 한 분이요 한 몸'이라는 것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그날 그날을 헐떡이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하느님이 한 분이든지 두 분이든지 아니면 세 분이든지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올바로 깨달아 알고 올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바라보고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판단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특성을 우리가 인간의 용어로 정리하는데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특성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의 사랑을 다른 대상에게 베풀어주고 또한 다른 이의 사랑을 받으며 삽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사회가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사회에서만큼 사랑이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는 사회는 없습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충만함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교회의 정신입니다. 흔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이라는 학설과는 다릅니다. 진화론은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의 세포였던 것에서 여러 개의 세포로 가진 동물이 생겨나고, 한 종류에서 또 다른 종류가 생겨나고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 세계가 생겨난 지 45억년 또는 50억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마치도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있는 것처럼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 삼위일체의 사랑에 근거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창조론에서는 그 입장이 다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세 위격(位格)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가 닿을 수 없는 계시진리이기에 우리에게는 그저 받아들이는 자세만이 필요하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재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머리로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세상을 좋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큰 뜻을 완벽하게 수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올바른 행동을 하려면, 몸이 건강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그 몸을 올바로 움직일 수 있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올바르게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정도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한 분 이신데, 그 하느님을 우리가 느끼는 방법은 세 가지, 그 하느님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엄청난 보이지 않는 끈이 작용해서 기묘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도 삶의 정신과 모범을 통하여 그 하느님의 특성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입니다.
3.4 강생구속(降生救贖) :
다음은 세 번째 항목인 '강생구속'입니다. 강생구속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는 것이고, 그 분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그 어떤 분도 그리고 저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본 것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많습니다. 요즘 한창 이야기하는 '환경호르몬'도 그런 것의 하나이고, 쓰레기 소각장에는 항상 따라 다니는 '다이옥신'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요소를 최대한 피하고자 애를 씁니다. 나쁜 것이니 피해야 하죠. 그러나 사람이 판단하는 나쁜 것과 좋은 것의 판단 기준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 정말 나쁘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있고, 우리가 판단을 잘못해서 나쁘지는 않은데 잘못해서 친구로 두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신 성부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세상 만물을 다스리며 사람들이 선하게 살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한 욕심 때문에 사람의 생활은 옳고 그른 것을 혼동해서 보기 시작했고, 정말로 피해야 할 것과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진행되다가 정해진 때가 되었을 때, 제 2 위 성자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기원전 4년경입니다. 처음에는 미약한 인간으로 인간의 여러 가지 규정을 몸에 익히던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는 나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제자들을 선택하고 인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남아있던 욕심과 고집은 하느님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이 생각해 낸 가장 비참한 방법의 하나로 인간으로 오셨던 하느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게 됩니다. 그것이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의 사건입니다.
이런 일을 짐작하고 계셨을 하느님의 아들은 그 역사적인 순간이 오기 전에 제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실천할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당신 생명을 마치기 하루 전날, 성서에도 그 내용이 간단하게 기록돼 있는 것처럼 '최후의 만찬' 제사를 통하여 우리의 몸과 피를 다하기까지 이웃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을 공경할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시는 제사를 세우십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하신 일의 간략한 요약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해서, 내 손으로 만져보지 못했다고 해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의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가끔씩 정말로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대충 그렇다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맨 눈으로 태양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 빛과 열의 도움을 받으며 살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들 가운데 몇몇의 도움으로 우리는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거기에서 새로운 힘을 얻죠. 또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는 말과 글, 그리고 수많은 정보들을 전화선을 통해서 주고받고 삽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분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우리의 자세는 금새 달라지고 정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없던 욕심과 의문이 갑자기 생기고 우리 마음의 문은 천천히 닫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하느님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당신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경륜을 알려주신 것이며, 이 일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죄와 욕심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사람으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代贖)하신 공로로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러나게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자 한다면 그에 합당한 자세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3.5 상선벌악(償善罰惡) :
네 가지 중요한 교리의 네 번째 순서, 상선벌악에 대한 말씀을 드릴 차례입니다. 상선벌악의 의미는 이 세상의 삶을 우리가 마칠 때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시고 선하게 살았던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신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일은 아닙니다.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우리들은 가끔씩 불만을 갖습니다. '저 사람은 옳지 않은 일은 빼놓지 않고 골라서 다 하는데 왜 잘 살고, 선하게 사는 나는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다가 우리는 결국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는 데까지 문제를 끌고 갑니다. 이런 현상은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도 아마 한 두 번은 가졌을 법한 문제입니다. 이런 마음과 생각이 우리에게 드는 이유는 급하게 생각하는 탓이고, 우리 눈이 보는 이 순간에 모든 일이 옳고 그른 길로 갈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의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선악의 결정이 나버린다면 사람이 반성할 마음도 자신의 행동을 고칠 여유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보았던 다윗은 시편<37장>에서 이런 글을 적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 (1-3ㄱ) 남이 속임수로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아라. 화내지 말고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악한 자는 망하게 마련이다. (7ㄴ-9ㄱ) 조금만 기다려라. 악인은 망할 것이다. 아무리 그 있던 자리를 찾아도 그는 이미 없으리라.(10)"
구약성서의 또 한 곳 나훔 예언서<1장>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야훼께서 힘이 없어 오래 참으시는 줄 아느냐? 결코 죄지은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3ㄱㄴ)
신앙인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신중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흘려보낸 과거의 시간에 조금이라도 흠이 남아 있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지냅니다. 이런 일들이 가끔씩은 세상을 활기차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그렇게 돌아봄으로써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거듭나고 다시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올바른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상선벌악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은 마태오 복음서 25장 31절-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입니다. 세상 끝날, 공심판 때에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하느님이 준비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행동을 했는지에 멋쩍어합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자세로 그들은 심판관에게 응답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배제된 자들이 하는 표현은 가당찮습니다. '불만 있습니다. 심판자여! 언제 당신이 우리 앞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언제 나그네 되고 헐벗었으며 언제 병들었고 감옥에 갇혔기에 저희가 심판관이신 당신을 모른 체 했다는 것입니까? 기분이 몹시 언짢습니다. 이 판단은 무효입니다'라고 외쳐 댑니다.
세상일에도 엎질러진 물의 비유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훗날의 보속과 선행으로 인하여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도 있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신앙인의 삶에 적용하고 그것이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그 관리권을 인간에게 맡기신 하느님이 훗날 세상을 다시 올바로 세우실 때 적용할 기준이라고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는 내용, 상선벌악입니다. 지금 당장 심판이라는 그 일이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3.6 네 가지 기본 교리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듣기 힘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A.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구라는 별을 돌아다니던 어린 왕자는 어느 날 여우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우의 이야기를 통하여 '관계를 맺으면 그와 연관된 기억 때문에 세상의 삶이 달라진다'는 거라는 귀중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우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밀밭도 금빛을 가진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 때문에 여우가 밀밭을 바라볼 때마다 특별한 관계를 맺은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우를 만나고 큰 깨달음을 얻은 어린 왕자는 수많은 장미들을 보면서 자기별에 있었던 단 한 송이 장미꽃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주고 벌레를 잡아준 자기별에 있는 장미꽃에게 신경을 써준 그 시간 때문에 그 장미꽃이 중요하게 기억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 성산동 성당에 모이신 여러분들도 1999년을 지내면서 받는 견진성사가 참으로 중요하고 여러분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하려면 그 성사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에 무한한 영향을 끼치고 우리 생활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는 하느님과 그 분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기본 자세로 가져야 할 마음자세가 될 것이고, 첫 번째 견진 교리로 여러분에게 네 가지 중요한 교리를 말씀드린 저를 통하여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긴 시간, 어려운 내용을 함께 하느라 고생하신 견진성사를 준비하시는 성산동 신자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총을 가득히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