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주존재(天主存在)
4.1 인사
한 주간 잘 지내셨어요.
전혀 시작할 것 같지 않았던 2000년이 시작되고 벌써 두 달을 훌쩍 지내고, 오늘은 벌써 3월의 첫 번째 금요일입니다. 어르신들은 한 주간 동안 무슨 일을 그중 많이 하시나요?
아들, 딸은 다 성장해서 어르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시 손자나 손녀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보내시는 것은 아닌가 싶네요.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는 신부(神父)로서 주어진 역할을 실천하기 때문에 같은 경험을 할 기회는 없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때에 따라서는 아이를 상대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해서 말씀 드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지내다보면, 실제 나이를 기억하면서도 내가 지금 몇 살이지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읍니다.
오늘부터는 어르신들에게 천주교회의 교리를 말씀드리는 시간입니다.
천주교회,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궁금한 것을 알려드리고 공동체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읍니다. 우리 성당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하는 이 ’연장자’ 교리도 그 방식의 하나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천주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성서에 대한 말씀을 드렸읍니다. 오늘부터는 속성(速成)반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을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알려드리는 속성반에서 꼭 강조하는 내용에는 네 가지 중요교리가 있읍니다. 이 교리에 대한 소개를 드리고, 어르신들이 그 내용을 인정하고 따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만 다음과정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네 가지 중요교리는 ①하느님은 존재하신다는 것 ② 하느님의 속성은 삼위일체라는 것 ③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구원자로 보내셔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것 ④ 사람이 세상에서 산 삶의 결실에 따라 선한 사람에게는 상이 내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응당한 벌을 내린다는 것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한자를 사용하여 간단하게 말하면, ①천주존재(天主存在) ②삼위일체(三位一體) ③강생구속(降生救贖) ④상선벌악(償善罰惡)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의 내용을 설명하는 날입니다.
4.2 시작기도
오늘의 교리 설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가 하느님을 영접하고 우리의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겠읍니다. 시작기도는 가톨릭 기도서 10쪽에 나와있는 <성호경>부터 12쪽까지 나와있는 <사도신경>까지 하겠읍니다.
4.3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질문’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서, 그리고 만물의 최고 상위(上位) 권력자(權力者)로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첫 번째 내용 천주존재(天主存在)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이 있읍니다.
내용을 이렇게 시작하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 말은 사람이 질문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질문을 해도 합당한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 중에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물음’은 사람이 월권(越權)을 행사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말을 그렇게 정하기는 한 것이지만,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사람이 가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대상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그 대상을 사람이 가진 지식으로 자꾸만 규정하고 싶어합니다. 바로 그 마음자세에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데도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와 유사한 질문 한가지를 더 하죠!
여러분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심장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은 북한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특정한 장소와 많은 사람들이 사는 장소를 그렇게 부르자고 정한 것뿐입니다. 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의 같은 기관을 본 경험을 가질 수는 있읍니다. 하지만 자신의 장기(臟器)를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은 없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장기는 우리가 의학적으로 알아낸 지식대로 움직이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을 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피와 모든 것을 움직이는 작용을 하게 합니다. 물론 심장이 혼자서 알아서 하는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우리의 뇌가 명령한다고 해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기 쉬운 한가지 요소를 함께 갖고 있읍니다. 그 요소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은 생활의 재미를 느끼고 사십니까? 사람으로 산다는 즐거움을 느끼고 사십니까? 만일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하는 분들은 하느님이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질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까지 질문해가면서 낭비할 시간이 없이 삶이 재미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재밌고 행복하게 사는데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런 쓸 데 없는 질문까지 해 가면서 낭비할 정력(精力)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맞는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 사람들은 어느 때 그 질문을 하고 어느 때 그 응답을 듣기 원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몸으로 견뎌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삶이 너무나 어려워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기대했던 도움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꼈을 때, 바로 그때에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계시다면 왜 지금 나의 상태는 모른 체 하고 주무시는지?’를 질문하고 ’그 답이 빨리 체득되지 않는다’고 외쳐댑니다. 사실은 그렇게 외쳐댈 때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고 묻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순간’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지내질 못합니다.
구약성서 시편 가운데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는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꾸짖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편 14장과 53장에 아주 비슷한 내용 두 편이 나옵니다. 시편 53장(70인역. 불가타역은 52장)을 보겠습니다. (임승필 신부님이 번역하신 200주년 새 번역의 내용입니다.)
2.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는 도다. 모두가 타락하여 불의를 일삼아 착한 하는 이가 없도다. 3.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시는 도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4. 모두가 빗나가 온통 썩어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서 불러준다면, 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몰아 부치기보다는, 삶이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사람정도이겠지만, 그것은 인간을 좀더 낫게 보려는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저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탓이고,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쓸데없는 질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4.4 하느님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질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만 그 대답은 ’불가능’입니다. 사람이 가진 눈은 단백질로 돼 있읍니다. 단백질로 돼 있다는 것은 썩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이 현재 머물러있는 제 위치를 떠나거나 산소가 포함된 혈액이 흐르지 않게 되거나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현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한계를 지닌 인간의 눈으로 애초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인간의 용어로 정한 하느님을 보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이죠.
세상에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무지하게 많읍니다. 현미경을 통해서 보면, 우리의 손위에는 무지무지하게 많은 세균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세균이니까 해로울 것이고 모조리 없애야만 우리가 깨끗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몸 속에는 많은 균들이 살고 있읍니다. 기생충처럼 정말 해롭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많은 세균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하느님을 볼 수 없읍니다.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엄청난 월권(越權)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4.5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 존재 증명
짧은 세상을 살다가 떠날 사람은 자꾸만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를 써 왔읍니다. 이런 노력을 가리켜서 ’신(神) 존재(存在) 증명(證明)’이라고 합니다. 이런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읍니다. 어차피 인간의 지성이 가 닿을 수 없는데도 인간은 자꾸만 그것을 탐구하고 자신이 가진 짧은 지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은 과학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재고 자르고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불가능한 것으로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 밀어붙이기 십상입니다. 그런 모습은 인간이 스스로 약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존재에 대한 탐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읍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연구는 사실 탐구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信]’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보다 앞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신 분들이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나 모습은 과학적인 탐구의 차원이 아니라, 순수하게 받아들였던 믿음의 차원이었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사는 우리들보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읍니다. 지금의 뛰어난 과학도 예전의 것, 지금보다 훨씬 못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삽니다. 좋고 훌륭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머리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서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계신다고 내가 인정하면 계시는 것’이고, ’하느님은 내 고통을 몰라주시니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계시지 않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계시는 분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 삶이 좋은 결실을 맺는 것뿐입니다.
4.6 하느님이 하신 일
다음 순서는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기록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성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뤘던 말씀을 강조해서 다시 말씀드린다면, 성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하신 일을 인간들이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내용의 일부를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기록은 일부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될 수 있는 것들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읍니다. 성서의 기록자들은 역사적인 확인은 뒤로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의 첫 번째에 나오는 중요한 사실을 따라서,
①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출발점-즉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6일만에 창조된 것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읍니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이 지구가 탄생한 것이 약 45억년 또는 50억년 정도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과학자들도 그 길이가 얼만큼이나 되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그런 말을 합니다. 대단한 오만이죠. 사람은 환경의 변화를 힘입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환경이 왜 달라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금은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다른 동물은 왜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한 것들이 자가당착(自家撞著)의 논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읍니다.
인간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그 존귀함과 귀중함이 따른다는 것은 신앙에 의한 설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도 돈을 주고 그 생명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동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② 하느님은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읍니다. 그 민족이 고생하다가 탈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배반하기도 하고, 다시 돌아서고... 사람들을 이끄시기 위해서 예언자들을 동원하시기도 했고... 하느님은 정하신 때가 되어 당신의 아들을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인간으로 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기도 하셨읍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7 ’천주존재’에 대한 결론
사람으로서 많은 질문을 하고 답을 추구해봐도 제자리걸음인 것은 따로 있읍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하느님은 믿고 따라야 할 분으로 남는 것입니다. 흔히 인생은 도박에 비교합니다. ’어느 패에 내가 가진 것을 거는지’ 그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택하든지 우리는 책임의식을 잃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고민을 하고있는 우리 인류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시겠습니까?
4.8. 마침기도
사도신경(믿음) + 천주십계(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방법) + 고백의 기도(자신의 현실을 인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