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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10: 연중 제4주일 - 신앙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02 조회수1,994 추천수0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10) 연중 제4주일 - 신앙

하느님 진리에 동의하는 초자연적 은총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나자렛 주민들은 믿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인간의 합당한 응답이 믿음, 곧 신앙입니다.


◇ 살펴봅시다

㉠ 신앙(150~152, 166~175항) :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해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150항)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고 하느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그런 믿음을 피조물에게 두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150항)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 곧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강생하신 말씀이시기 때문"(151항)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1,18).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주시는 분은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교회 안에서 교회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우리가 "저는 믿습니다" 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 언제나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고백합니다. "교회가 먼저 믿고 이로써 나에게 그 신앙을 전해주고, 키워주고 지탱해주기"(168항)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 알아둡시다

㉡ 신앙의 복종(144~152항) : '복종하다'(oboedire)는 라틴어로 '에게'라는 뜻을 지닌 'ob'와 '듣다'라는 뜻을 지닌'audire'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복종은 말하자면 자신이 들은 하느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복종으로 모범을 보인 대표적 인물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믿음으로 따랐고 이방인으로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앙으로, 자신의 외아들까지 바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 때문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됐습니다(로마 4,11-23; 히브 11,1-18 참조).

교회는 나아가 동정 마리아를 "가장 완전하게 신앙의 복종을 실천하신 분"(148항)으로 제시합니다.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신앙의 동의를 합니다. 이 때문에 모든 세대가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리아는 일생 동안 극도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를 "가장 순수한 신앙을 실현하신 분"(149항)으로 공경합니다.

신앙의 특성(153~165항):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153항)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려면 하느님 은총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한 성령의 내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은 "참으로 인간적 행위"(154항)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결코 반(反)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155항). 신앙이 지성적 행위라는 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동의(同意)하는 것이 결코 정신의 맹목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지성 또는 이성의 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확실합니다. 신앙의 이 확실성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큽니다. 성 안셀모(1033~1109)는 "신앙은 이해를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믿는 바를 이해하도록 요구하고 또 이 이해를 통해 우리는 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믿기 위해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유명한 금언을 남겼습니다.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는 것은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 해도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159항)고 교회는 단언합니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159항)입니다.

신앙과 이성의 이런 관계에 비춰 우리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적 규범에 따라 이뤄진 탐구라면 결코 신앙과 대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내기 때문"(159항)입니다.

신앙이 인간의 응답 곧 인간적 행위라면 그 행위는 어느 누구도 억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됩니다. 곧 신앙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여야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 믿음을 항구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정리합시다

- "신앙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인격적으로 온전히 귀의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행위와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에 대해 밝혀 주신 계시를 지성과 의지로 따르는 것이다"(176항).

-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 이외에 다른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178항).

-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선물이다.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도움이 필요하다"(179항)

[평화신문, 2013년 2월 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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