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평화를 위하여
10.1 인사
시작이 반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말 그대로 시작이 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소리를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시작은 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벌써 10번째 시간이 되었고, 금요일에 어르신들 만나는 일도 오늘로 마감합니다.
또 한가지, '시작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늘까지 저를 통하여 어르신들이 알아들은 천주교회에 대한 입문은 이제 '시작'을 마치는 순간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은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작을 좋게 만드는 것은 이제 어르신들의 몫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를 골라서 태어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일은 우리가 각각의 현실을 깨닫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어떤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의 차이뿐입니다. 오늘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10번째의 교리를 통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입니다.
시작기도로, 가톨릭 기도서 15쪽에 나와있는 <봉헌의 기도>를 하겠습니다. 우리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10.2. 신앙인의 올바른 삶
사람이 한 대상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혼인하시고 그렇게 살아오신 분들이 많습니다만, 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부관계를 이루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거기에 무슨 매력이 있기에 서로 다른 곳에서 자란 사람이 만나 몸을 비비고 30년 50년을 함께 살까? 그것도 행복하다고 노래하고 아무런 탈도 없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고통에 찌들고 병원에 입원한 한쪽편의 배우자를 간호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답을 얻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와 유사한 삶을 어르신들은 사셨겠지만, 같은 체험을 하신 분들이 있다면 아마 어르신들 역시도 무슨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혼인의 생활과 더불어 오늘 교리를 마치고 내일 저녁에 세례식을 하고 들어서게 될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실에는 별 차이 없습니다. 그 신앙인의 길을 올바르게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무엇을 더 알아들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10.2.1 평화란 무엇인가?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큰 바람중의 하나는 '우리 가정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이나 내일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아닌 저도 갖는 심정입니다. 아마 어르신들은 그런 생각을 더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란 단순히 싸우지 않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싸우는 것을 평화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신앙인으로 살아갈 사람으로서 바라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는 '저기 십자가에 양팔을 벌리고 달려있는 저 분,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1948년에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혹시 아닌가요? 틀리면 다음엔 수정하죠> 그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비폭력주의'였다고 합니다. 비폭력의 방법은 사실 험난합니다. 그 곤경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현실에 충실하게 살려고 다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항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 심심찮게 등장하던 '군중 시위'에서도 돌과 화염병이 돌아다니던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하는 이 말은 어느 쪽을 두둔하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나라에서 실천했다고 하는 '비폭력주의 시위 방법'이 부러워서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죠. 마태오 복음서 5,38-42에 나오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는 말을 너희는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사실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듯 하면서도 가장 완벽한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은 아무리 옳고 좋다고 하더라도 반대되는 행동을 부르게 돼 있습니다.
10.2.2 자신을 희생하는 삶은 평화의 근원
사람은 일반적으로 욕심이 많습니다. 그저 이것저것 가져다가 자신이 안심할 수 있는 테두리에 뭔가를 자꾸 쌓으려고 합니다. 재산을 쌓기도 하고, 권력을 쌓기도 하고, 명예를 쌓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육신의 힘이 쇠약하거나 그 생명이 멈추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려하고 다른 사람보다 큰소리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공통점입니다. 그 일에 대한 무상(無常)함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해진 이치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 육신의 세상에서 통하고 유지되는 기본질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상에서는 달리 말합니다.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24). 농사 지으신 경험이 있거나 식물의 성장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는 압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파종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땅에 뿌려진 씨앗이 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되기를 거부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수 차례 강조한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이셨지만 하느님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싶지 않으셨던 예수(필립비2,6-11)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 한가지가 위에서 말씀드린 '한 알의 밀 알이 드러낼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고, 그 의미를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것은 그 삶의 모범을 따르는 신앙인들도 그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라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세상입니다. 가끔씩은 내 의지와는 다르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자제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조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삶을 통하여 무엇을 이룰 것인지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0.3 신앙인으로 할 수 있는 삶의 방법들
오늘 천주교회에 대해서 정해진 시간을 갖고 하는 날에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략하게나마 그 요점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0.3.1.그 첫째는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뭔가를 먹어야만 삽니다. 공기는 물론이고 물이나 음식을 먹어야 그 힘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몸에 그런 것이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이 심어주신 영혼도 음식이 있습니다. 그 음식을 가리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개인의 영혼은 풍요로워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요즘 사순절을 맞이해서 많은 신자들이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도 있고, 가톨릭 기도서에 적혀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기도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시기를 맞아서 이웃을 위한 다른 행동과 기도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10.3.1.1. 신앙인들이 그중 많이 하면서 많은 오해도 받는 묵주의 기도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묵주를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연습을 하죠. 집에 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한번이지만, 가족들을 통해서 더 많이 자주 하시기 바랍니다.
10.3.2 그 둘째는 성서 읽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책과 글자로 되어있는 것이라고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외형은 그래도 실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의 의지를 우리가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의 생활은 생각외로 훨씬 더 다양하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읽느냐고 질문하지 마시고, 일단 읽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게 당신의 뜻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10.4 영성체 연습과 한달 후 첫 고백성사 있음을 공지.......
제가 하고 욕심이 많아서 말로 하는 설명은 열심히 했습니다만, 실제 연습은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하게 될 영성체 연습을 빠트릴 수는 없죠. 잠시 후에 하겠습니다.
또 한가지 한달 정도 후에, 5월 13일 주일에 첫 고백 성사 하겠습니다. 시간은 10시 30분 미사를 마치고 하겠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10.5 마침과 기도
긴 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이로서 제 입을 통하여 여러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리는 교리 시간은 마치겠습니다. 잠시 후에 필요한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시면 될 것이고, 내일 저녁 6시까지 성당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마침 기도로는 우리의 신앙을 담고있는 가톨릭 기도서 11쪽에 나와있는 <사도신경>을 천천히 합송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