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6)
20.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
1)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구원의 역사[救世史]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기 위한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4항).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고,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렇게 복잡한(모순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실까요? 이슬람교처럼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살면 간단할텐데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님의 깊은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라고 우리는 다만 믿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알려 주셨고, 사도들이 그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신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0항).
2) 삼위일체는 사랑이시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에 앞서 계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과 의논 상대가 되어 드릴 존재가 없습니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홀로 계시는 분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외로운 분이지요. 상대가 없는 외로운 하느님, 이런 분이 사랑의 하느님이실 수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여타의 다른 종교들에서 말하는 외로운 독재자 같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분은 홀로 계시지만, 동시에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이 구별되어 있어서 그분들 안에서 서로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베풀기 어렵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에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흘러 넘칩니다. 사랑은 기쁨이기에 저절로 노래가 나오고 세상에 소리치고 싶어집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나누시는 하느님의 사랑도 흘러 넘칩니다. 그 사랑은 흘러 넘쳐 세상을 창조합니다. 세상은 하느님 사랑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창조를 믿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하느님,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3) 사랑의 구조 : 구별됨과 하나됨
“세 분이면서 하나, 구별되지만 하나”라는 삼위일체의 표현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구조입니다. 사랑은 앞서 말했듯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스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와는 다른 사람, 구별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첫 번째 전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이 구별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관심을 갖고, 아껴주고, 궁극적으로는 하나가 되려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그 구조상 “구별되지만 하나”를 지향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무척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랑을 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4) 삼위일체의 삶으로 초대받은 우리
삼위일체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올바른 인간 관계, 즉 사랑의 관계는 “구별됨과 하나됨”의 긴장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됨”만 고집하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정도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그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식대로만 하나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짓밟는 폭력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아버지가 폭력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 가족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쟁취한 하나됨은 허무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나눌 상대방들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하나되고자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기 혼자 남게 됩니다.
반대 방향의 유혹도 있습니다. “구별됨”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추구하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른 인격들간의 다툼을 수반합니다. 그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다르니까 하나됨을 포기하고 그냥 이 자체로만 자유롭게 머물러 있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나도 너를 안 건드릴테니, 너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무관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사랑의 삶과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창조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들의 탄생의 비밀이고,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또한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그리워하며 광야의 여행길을 걸어갔듯이,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향해서 길을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
[2013년 2월 10일 설(연중 제5주일) 의정부주보 5-7면,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