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교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시작하는 말 십여 년 전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던 동생 신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동생은 같은 지역에서 유학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작은 한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입교를 위한 교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생 대신 예비신자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한 형제가 부활 교리에 대해 질문을 하였고, 그날은 모두들 부활 교리에 대해 듣겠다고 하였다. 특히 성서에서 부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였으므로, 나는 성서 그 가운데서도 신약성서를 펴서 읽게 되었다. 부활에 대한 성서 대목은 아무래도 4복음서의 끝 부분에 실린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와 고린토 1서 15장에 실린 바오로 사도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엉뚱하게도 요한 복음에서 ‘생명’에 대한 가르침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고, 필자뿐 아니라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 성서, 특히 복음서가 부활을 얼마나 풍부하게 증언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요한 3,16).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4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어떤 면에서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한마디로 부활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구약을 통틀어 성서 전체는 바로 이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고 말할 수 있다(루가 24,27.44-46; 요한 5,39 참조). 이 글에서는 새로 나온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실린 부활 교리의 내용을 알아본 다음, 필자 나름으로 본당에서 가르치는 부활 교리교육의 실제를 소개하겠다. 1.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부활 교리 우리는 먼저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부활 교리 중 제1편 ‘신앙 고백’에 실린 부활 대목을 살펴볼 것이다. 앞에서 성서 전체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고 했는데, 「가톨릭 교회 교리서」(이하 「교리서」로 약칭)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교리서」 제2편은 ‘그리스도 신비의 기념’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례와 성사 편인데, 그리스도 신비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의 파스카 신비 곧 그 죽음과 부활을(감히 덧붙이자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우리의 죽음과 부활도 함께) 일컫는다. 그리고 제3편은 이른바 계명 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아닌가!(로마 6,3-11 참조) 제4편은 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기도에 대한 교리이다. 특히 교회의 기도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이다(2623-2649항 참조). 이처럼 「교리서」 곳곳에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교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제1편 631-658항에 실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는 사도신경 제5절과 988-1014항에 실린 “육신의 부활의 믿으며”라는 사도신경 제11절에 관한 부분만을 살펴볼 것이다. (사도신경은 전통적으로 열두 사도를 나타내고자 열두 절로 나눈다. 우리는 그 다섯 번째 절과 열한 번째 절을 알아본다.) 부활 교리의 더 풍부한 내용은 책 말미에 실린 ‘주제별 색인’에서 관련된 주제들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1) 사도신경 제5절: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도신경 제5절 가운데서 우리는 둘째 단락 곧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부분만을 볼 것이다(첫째 단락은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셨다.”는 내용이다). (1) 주님 부활은 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사건 「교리서」는 부활이 역사적이면서도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임을 설명한다(639-647항). 성서는 빈 무덤과 부활하신 분의 발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빈 무덤 자체가 주님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은 주님의 무덤이 빈 것을 눈으로 보고 부활을 믿었다. 그들이 당시에 처한 상황에서 이것은 확실한 증거였다. 다음으로는 부활하신 분의 발현이다. 여인들이, 사도들이 부활하신 분을 만났고, 마침내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1고린 15,4-8 참조).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였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님을 강조하신다(루가 24,36-43 참조). 그분은 손과 발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고, 음식도 함께 나누셨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그분의 몸은 이제 하느님 아버지의 신적 영역에 속한다. 이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데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엠마오의 제자들이 그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확인되지만, 부활 그 자체는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신앙 신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2) 주님 부활의 의미 「교리서」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651-655항). 첫째, 부활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이 신적 권위를 지닌 진리임을 확인해 준다. 둘째, 부활은 하느님 약속의 실현이다. 구약의 약속뿐 아니라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약속의 실현이 부활이다. 셋째, 부활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확증한다(요한 8,26-28 참조). 넷째, 주님 부활은 우리를 다시 살렸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새 생명을 누리게 되는 ‘의화’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입양’은 부활의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입양’은 흔히 말하는 우리 사회의 입양과는 전혀 다르다. 비록 성자 그리스도의 아들 됨과 우리의 자녀 됨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입양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거룩한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다시 낳으셨다(1베드 1,3 참조). 다섯째,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장차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이 같은 희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사는”(2고린 5,15) 것이다. 2) 사도신경 제11절 : 육신의 부활 이제 사도신경 제11절 부분을 보자. 제11절(“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은 제10절(“죄의 용서와”)과 제12절(“영원한 삶을 믿나이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제11절만을 살펴볼 것이다. 더욱 유기적이고 풍부한 교리 지식을 원하는 분들은 ‘육신의 부활’ 교리를 ‘죄의 용서’와 ‘영원한 삶’에 관한 교리와 연결시켜 묵상하기 바란다. 사도신경에 해당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보면,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대신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하고 고백한다. 전자에서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후자에서는 희망으로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육신의 부활은 우리 믿음이며 희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의인들도 죽은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며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바란다(989항). ‘육신’이라는 말은 연약하고 죽어야 할 운명에 놓인 인간을 가리킨다(창세 6,3; 시편 56,4; 이사 40,6 참조). 그리고 ‘육신의 부활’이라는 말은 죽은 다음에 불멸하는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다시 살아남을 의미한다(로마 8,11).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몸을 지닌 채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 죽을 몸도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 우리 믿음이요 희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을 믿고 기다린다(995항). (1) 장차 이루어질 부활 「교리서」는 육신의 부활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진술한다. 첫째, 육신의 부활이란 무엇인가? 죽음으로 사람의 육체는 썩게 되지만,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함께 결합되어 부활하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육신을 영혼과 결합시키시어 불사불멸의 생명을 주실 것이다(997항). 둘째, 누가 부활하는가?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요한 5,29). 셋째, 어떻게 부활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닌 채 부활하신 것처럼,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한다.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난다(1고린 15,52-54). 부활한 우리가 어떻게 변할지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우리는 그저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변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넷째, 언제 부활하는가? 부활은 마지막 날에(요한 6,39-40.44.54; 11,24), 세상 끝날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1데살 4,16). (2)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 「교리서」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부활과 함께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부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1002-1004항). 우리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앞당겨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골로 2,12).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곧 그분의 파스카에 참여하는 것이다. 세례성사뿐 아니라 성체성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한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증언한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 육신도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육신이 아니고, 부활의 희망을 지닌 육신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4-58). 우리의 몸은 이처럼 소중하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로마 8,18.23; 골로 3,4 참조).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1고린 6,15.20). (3) 죽 음 「교리서」는 육신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우리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1005-1014항).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리서」는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고,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라고 설명한다. ① 인간의 죽음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대가’(로마 6,23)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1006항). 「교리서」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죽음은 지상생활의 마침이다. 태어남으로 지상생활이 시작되었듯이, 죽음으로 지상생활을 마치게 된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인간은 자신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둘째,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죄 때문에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창세 2,17; 지혜 2,23-24). 창조주께서는 사람이 죽지 않게 마련하셨건만,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죽음을 불러왔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변화시키셨다. 인간(아담)이 불순명으로 죽음을 불러온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순명으로 죽음이라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키셨다(로마 5,19-21 참조). ②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간의 죽음에 새 지평이 열렸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2디모 2,11).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의 부활에도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하여 당신께 부르시는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의 죽음을 성부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 죽음을 앞두고 하신 성자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 2. 부활 교리교육에 대한 몇 가지 제안 이제 부활 교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일선 사목자나 교리교사들과 나누고자 한다. 우선 필자는 이 제안들이 부활 교리교육에 대한 더욱 폭넓은 논의를 위한 것이지, 정답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을 관심 있게 읽은 분들의 고견을 듣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1) 부활 교리교육에서 시청각적인 설명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복음서에 실려있다. 예수님은 문이 잠겨있었는데도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요한 20,19). 그분은 상처를 보여주시고(루가 24,39-40), 음식도 함께 드셨다(루가 24,30.42-43; 요한 21,12-13). 그분은 갑자기 사라지셨다(루가 24,31). 이런 시청각적 설명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며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설명은 그 자체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부활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옛날 교리 문답에는 사기지은(四奇之恩)이란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설명하였다. 빛나고, 빠르고, 막힘이 없고, 변함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리교육은 자칫 부활의 기묘함에만 초점을 맞추어 부활 신비의 깊은 의미를 지나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활을 초월적 사건으로 다루어 시청각적인 설명을 배제하면 추상적인 이론으로 흐르고 말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시청각적인 설명을 주저하지 않았다. 곧 천사의 나팔 소리, 불멸의 옷, 불사의 옷(1고린 15,50-55 참조), 지상의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육신의 장막, 하늘의 집을 덧입음(2고린 5,1-10 참조) 등이다. 예수님께서도 사후의 삶에 대해 말씀하실 때 시청각적인 설명을 기피하지 않으셨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 천사의 인도, 아브라함의 품, 큰 구렁텅이(루가 16,19-31 참조)가 나오고, 최후심판 이야기에서는 천사들을 거느림, 양과 염소 가르기, 영원한 생명의 나라, 영원히 벌 받는 곳(마태 25,31-46 참조)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 교리교육에서 시청각적인 설명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며, 다만 핵심 메시지의 전달 곧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통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깊이 새겨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2) 부활 교리교육에서 그리스도 -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학은 인간학이다.” 하는 말은 교리교육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주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메시지는 곧바로 “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하는 말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런 메시지 전달이 없다면 아무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수천 번 큰소리로 외쳐보아도 무의미한 소리에 불과하다. 부활 교리에서도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는 늘 우리의 부활과 연결시켜 설명하여야 하고, 우리의 부활(죽은 이들의 부활,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도 참 인간이시며 온 인류의 전형이신 주님의 부활과 연결시켜 설명해야 한다. 주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떼어놓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반쪽 설명이 아닌, 전체의 왜곡을 불러오게 된다. 3) 마지막 날의 부활과 오늘의 부활, 그리고 사후의 세계 부활은 분명 마지막 날,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이 점은 성서에서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도 이루어지는 실재라는 것과, 개인의 죽음에 이어지는 부활에 대해서도 교리교육은 설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에 대해서는 성서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고, 앞에서 말한 대로 「교리서」 1002-1004항에서도 진술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누리게 될 부활에 대한 교리교육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는 사람이 죽은 다음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우도(右盜)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 하고 말씀하셨다. 4) 사후의 부활과 마지막 날의 부활은 맞닿아 있다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각자가 맞게 되는 주님의 재림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최후 심판’과는 따로 사람이 죽은 다음 바로 받게 되는 ‘사심판’ 또는 ‘개별 심판’에 대한 교리를 가르쳐 왔다. 이것은 죽음이 어떤 면에서 개인이 맞이하는 주님의 재림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희망을 북돋울 때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때 자연스럽게 사후에 맞게 될 영복 또는 천국을 이야기한다. 무수한 순교자들이 이 같은 희망으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던가!(2마카 7장의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사도 7장의 스데파노의 순교 참조) 사실 죽은 다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며, 죽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죽은 다음의 부활과 마지막 날의 부활이 죽은 이들에게는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 점은 이른바 사심판과 공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또한 무수한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성인들의 통공’을 설명할 때 우리는 흔히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 그리고 정화 중인 연옥의 교회를 말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인 연도도 좀 더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사제가 말한 것처럼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그 영혼은 다시 연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5) 사후의 세계에는 영혼만 있는가? 사후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상상하는가? 그곳에는 영혼만 모여 있는가? 아니면 영혼과 육신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 있는가? 나는 영혼만 있는 천국을 상상할 수 없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의인들은 온전한 인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상상의 세계는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 천국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천국에는 사람만 있는 것으로 상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창조계 전체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로마 8,21). 우리가 바라보는 구원이 우주적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6) 부활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부활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부활이 저승에서나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이 지상의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지상의 삶은 천상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더욱더 세상에 투신하도록 하며, 끊임없이 세상 변혁을 위한 노력과 협력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이 세상의 부활을 이루지 못하면, 저 세상의 부활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부활하시어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성자와 성령의 파견은 바로 이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부활에 앞선 죽음이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에 앞서 당신 죽음을 예고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을 알아듣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그분의 부활도 전혀 알아듣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마르 8,31-33; 9,31-32; 10,32-34 참조). 바오로 사도도 부활에 앞선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3-4).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이 세상에서 우리는 부활과 죽음을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죽음 없는 부활이나, 부활 없는 죽음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체험 없이 부활 체험이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 확인한다(골로 3,1-4; 갈라 6,14; 2디모 2,11).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다(요한 3,5-8).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로마 12,1-21; 에페 4,17-24; 골로 2,5-17), 성령 안의 새 생활(로마 8,1-17; 갈라 5,16-26)이다. 맺는 말 ‘엠마오’라고 부르는 부활 나들이가 있다. 이것은 엠마오의 제자들이 부활날 시골로 내려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과 연관이 있다. 부활 대축제를 준비하고 신자들과 함께 이를 경축하느라 애쓴 신부 수녀들이 부활 주간에 소풍을 나가는데 이를 엠마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엠마오 나들이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다시 듣는다.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마태 28,10; 마르 16,7 참조) 나는 갈릴래아를 오늘의 현실, 내 삶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는 곳은 빈 무덤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오늘 우리는 거짓과 미움과 불의만이 살길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같은 세상에서 진리와 사랑과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은 거짓과 미움과 불의가 사람 세상의 끝말이 아님을 굳게 믿으며, 마침내 맞이하게 될 승리의 날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미에는 후렴처럼 승리하는 자에 대한 약속이 나온다(묵시 2,7.11.17.26; 3,5.12.21).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이 승리를 이루어내신다. 그분께는 결코 패배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분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우리에게도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요 희망이다. ‘사도’는 한마디로 주님 부활의 증인,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을 말한다. 그들은 그저 빈 무덤이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만을 전하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삶, 곧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삶, 성령을 따라 사는 새 삶인 부활의 삶을 살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도들처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교리교육이 부활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목, 2004년 4월호, 정승현(전주교구 신부, 전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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