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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6.30.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3,555 추천수0
 

3. 삼위일체 (22항-25항)

2006-06-30

이제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이 하느님의 속성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삼위일체(三位一體)(Trinity)(Trinitas)’라고 합니다.  셋이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용어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말씀을 드릴 수 있기는 합니다만, 설명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행동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아듣거나 설명할 수 없다고 신학에서는 정의하는 용어가, 계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이긴 하나인데, 역할은 셋으로 드러나는 분, 부르기는 한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우리가 그 내용상의 구별을 따로 할 수는 없는 분, 바로 하느님이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에 적용된 속성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드린 다음에, 교리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2. 천주 몇이 계시뇨? : (답)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23. 하나이신 천주, 몇 위를 포함하여 계시뇨? : <답>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성부, 성자, 성신(성령) 이시니라.

24.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 하시뇨? : <답>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신(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느니라.

25. 세 위 서로 높음과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별이 있느뇨?

<답>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 가지로 다만 한 천주이시니라.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모르기에 그런 요소가 더 강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신학을 설명하는 용어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말하고 본보기로 들자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말도 그에 속할 것입니다.  


‘불켜진 초’에 대해서 묘사할 때도 그럴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빛과 열이 나오죠.  물론 몸체도 있습니다.  그 어느 한가지만을 가리켜서 설명할 때, 그것을 우리가 ‘불켜진 초’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으로 본적은 없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들은 그러한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단체에서는 그 용어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구요.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람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활동을 표현하면, 창조주요, 구원자요, 지속시키는 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별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알아들은 몸짓입니다.  그리고 유한(有限)한 인간의 세계에서 무한(無限)하신 분을 규정한다는 것도 사실은 어렵고 무모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해야하죠.  사람으로서 이해하자면, 자꾸만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을 거룩하신 아버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사시다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그 희생(犧牲)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분을 거룩하신 아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을 통하여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사람들의 생활을 이끄시는 힘을 가리켜 거룩한 영이라고 구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용어해설입니다. 


세상의 처음, 또는 교회의 처음부터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대략 4세기경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라는 학자는 이 신비에 대해서 탐구했던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분에 대한 생활은 따로 전기가 있고, 자서전이 있을 만큼 파란만장한 전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 성녀 때문에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선 유명한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은 북아프리카 타사스테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어머니 모니카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5년 이상이나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합니다.  일종의 방탕아로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당시 유명한 사조였던 ‘마니교’를 통해서 진리를 얻으려고 9년간이나 시도하다가, 로마로 가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를 만나고 성바울로의 독서를 통해 개종하고 387년 부활전야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후 죽을 때까지 북아프리카 발레리우스에서 주교직을 수행한 분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들려드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체험담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느 날엔가 이 신비에 대한 탐구를 하기 위해서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면 좋겠는가?’를 고민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걷던 도중에 파도가 출렁이는 물가 곁에 앉아서 어린아이가 모래 사이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개 껍데기로 바닷물을 조금씩 옮겨넣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어린이 혼자서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네가 거기에다 물을 옮겨 넣어 봐야 곧바로 모래로 스며들고 또 해야 하는데......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어린아이가 한다는 정색을 하고서 한다는 말이, ‘제가 바닷물을 이 구멍에 모두 담을 수는 있어도, 아저씨가 고민하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는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명석했던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제서야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남긴 일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소년을 직접 보았는지 어쨌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였던 사람도 자신이 탐구할 수 있는 범위였는지, 아니었는지를 빨리 구별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소년을 통하여 계시를 접하고 인간의 행동을 빨리 접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사람의 생명을 이리저리 조작하겠다고 덤비는 요즘의 생명공학(生命工學)이 훗날에도 정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고 훌륭한 결과만 맺을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총천연색 꿈을 갖고 시작을 합니다만, 정말로 그렇게만 가능하겠는지는 따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생성자체도 그렇죠.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만나 조화를 이루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인간 생명의 시작을 교회는 ‘난자와 정자가 여성의 몸이나 시험관에서 합쳐친 순간부터’라고 말합니다.  시작을 알지 못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느 순간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불분명해집니다.  그러나 국가의 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것들은 그 말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난자와 정자가 합쳐지고 난 뒤, 7개월이나 9개월이 지나서 사람의 형태가 보이면 그때부터 인간이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더 찬란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 생겼을 때부터 나이를 계산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도.....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말입니다.  1973년에 제정되었다고 하는 ‘모자보건법’을 아주 기가차게(=죽을만큼) 잘 이용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인구성장율이 세계 최저라고 하는 결과가 얼마전에 났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과학이라든 생물학에서는 난자와 정자가 합쳐져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만 알지, 왜 그런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 거기에 무슨 구조가 있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진행시키지도 못합니다.  다만 돼있는 구조에서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지금 과학에서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꽤 많이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들을 해도, 아직 사람의 혈액은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헌혈하는 이유이지요?


인간은 없던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있던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작하다가 훗날 인류에게 득(得)이 될지 실(失)이 될지는 알지 못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것은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계시에 의한 만큼만 우리가 알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설명으로 이해하거나 그 진리의 본질에 닿을 수 없는 것이 그 신비입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요소 가운데는 이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차차 말씀드려 나가기로 하죠.  


위의 24항에 나오는 내용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으로 표현하면 출생에 대한 문제입니다. 애초에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규정했으니, 인간의 지식과 상식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을 인간이 지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 것이냐,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시기로 보면, 성령은 분명,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있고 난 다음에 등장합니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이러저러한 표현이 성령의 별칭(別稱)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 얘기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수많은 세월과 역사를 두고 이루어져 왔던 이야기는 접어두고, 이 종속성에 대한 문제 때문에 동방교회와 로마가톨릭,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교리적 원인이 됩니다.  동방교회란 흔히 여러분이 아시는 러시아정교회를 가리킨다고 알면 되겠습니다.  즉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가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서방교회인 가톨릭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고, 이론적인 싸움입니다.  어찌되었든 한가지 분열의 원인이 되었기에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출발점이 있으면 가서 부딪히고 돌아올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겠죠.  교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좀 지루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해를 위해서는 참고가 참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천지창조, 천사, 마귀  (26항-32항)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업적, 즉 하느님이 하신 일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부분의 시작입니다.  여기에서는 천지의 창조와 천사와 마귀에 대한 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교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확립한 내용들입니다. 


천지 만물의 조성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에도 강조하기는 했습니다만, 신앙에서 이야기하고 믿음의 내용을 말하는 내용과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쌍방은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충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내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 행하는 월권이라는 것이죠.  


과학에서는 이 지구가 생긴 기원을 45억 년 전 또는 50억 년 전 조그만 먼지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런 먼지들이 어느 날인가 갑자기 혼자 있기 싫어서 무슨 전기적인 충격을 받아 하나씩 둘씩 뭉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생명체가 생겨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세포하나가 두 개로, 물 속에 살던 것이 땅위로..... 하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만든 전파망원경인가요 천체 망원경인가요 하는 것을 가지고 우주의 한 귀퉁이를 촬영합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 ‘지금도 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학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은 필연성(必然性)이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적자생존(適者生存)’이나 ‘용불용설(用不用說)’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시간이 가면 또 타당성이 사라질지도 모를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주의 탄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그러한 이론이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시대에 통용되는 물리학의 이론,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도 다음 세대에 가면 그 이론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과학을 무시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의 이론에 의해서 발명된 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마이크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 예비자 교리를 시작할 때 언급했듯이, 인간을 얼마나 귀중한 존재(存在)로 볼 것인가 하는 차이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느님이라고 하는 대상,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는 없지만, 지고(至高)의 존재로부터 나온 참으로 중요한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존과 쾌락을 위해서 지지고 볶고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동물이라든가 그보다 못한 존재들에게서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존재로 발전했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과학과 종교, 실험에 의한 이해와 신앙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느냐 아니면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점입니다.  ‘인간은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차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겉모습은 종교요 신앙이라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세 가지 내용을 다룹니다.  제목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세상 사물이 생기게 된 이야기와 천사와 마귀에 대한 것입니다.  순서에 따라서 한가지씩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천지의 조성에 대한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6. (문) 천지를 조성하신 자라 함은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천주 당신 전능으로 없는 가운데로조차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섭리하심으로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는 자라는 뜻이니라.


하느님을 세상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소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눈으로 본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셨을 성서에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첫째 권인 ‘창세기’가 그것입니다.  창세기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책이고, 이스라엘이라고하는 특정한 민족이 하느님 야훼를 기억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옵니다.  다시 강조하는 참으로 분명한 사실은 이 두가지가 단순한 사실(事實)보고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1,1-2,4ㄱ2,4ㄴ-2,25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이 말하는 바를 인용하면, 역사적으로는 뒤에 것이 더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앞에 시기보다 약 4-500년 안팎의 시기가 앞선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첫 번째의 것보다 단순합니다.  진흙으로 남자를 만들고, 에덴 동산을 마련하셨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게 하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는 아담, 마지막에는 자신의 짝이 나타났음을 보고 기뻐서 소리치는 아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기원 전 950년경에 기록되기 시작한 문헌(J.E문헌)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에 비교해서, 처음에 나오는 창조이야기는 바빌론 유배시대라는 때를 배경(P문헌)으로 한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보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더 발전된 국가였고, 기원전 587년에 이스라엘 남쪽 국가를 멸망시킨 국가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신으로 믿고 받들어 섬기던 모든 것은 사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사물의 한가지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았다고 믿음을 고백하던 작성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창조이야깁니다.  당시 자기 민족이 세운 국가를 멸망시키고 자기 민족을 강제로 지배했던 민족들이 섬기던 만물들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느님의 작품’이었다고 표현함으로써,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민족에 힘을 주는 의도로 작성된 문헌이고,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힘이 있을 것 같은 태양과 커다란 물고기, 나무들 모두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공경하는 ‘당산(堂山)나무’도 아마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 교회의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저절로 세상이 생긴 것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는, 인간이 쉽사리 이해하겠다고 덤비지 못할 분이 조성하신 것이 세상이라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떤 생각을 가져왔건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도 이렇게 말씀은 드리지만, 세상의 창조모습을 보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대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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