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
23. 섭리하시는 하느님
1) 세상과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알아서 살아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실 수 있을까요? 그러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애지중지하듯이 당신의 애정이 깃든 세상을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 의도와 달리 죄와 고통 속으로 빠져들면 하느님은 자녀를 걱정하는 어버이처럼 함께 고통받고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간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개입하시어 항구하게 돌보시는 것을 “섭리”라고 부릅니다.
만물은 고유의 선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창조주의 손에서 완결된 상태로 나온 것은 아니다. 만물은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아직도 다다라야 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진행의 상태’로 창조되었다. 당신의 피조물을 이러한 완전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를,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다스리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302항).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사소한 필요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자녀답게 의탁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 6,31-32).
2)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섭리하시는가
그런데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창조는 믿지만, 하느님의 섭리하심은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개입하셔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사에 관여하신다면 세상이 뒤죽박죽 되지 않겠는가? 우산장사는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소풍을 가는 어린이는 좋은 날씨를 기도하면 하느님은 어떻게 하셔야 하는가? 기도 쎈 사람이 이기는 것인가? 말도 안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계시되, 그냥 바라만 보셔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느님의 섭리”를 너무 좁게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하느님이 움직이신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어린 자녀는 엄마에게 여러 가지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엄마가 아이의 요청을 항상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현명한 엄마는 아이의 전체 인생을 생각하면서 어떤 것은 들어 주고, 어떤 것은 거절할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은 다른 방식으로 들어 주고, 어떤 것은 나중에 들어 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엄마는 그 아이의 인생 전체에 개입합니다.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의 섭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아이에게 인생 전체의 지침을 요약 정리해서 주고, “이대로 살아라” 하고는 내버려 두는 엄마와도 같습니다. 훌륭한 엄마라면 아이의 그때그때의 요구 사항들과 엄마가 생각하는 아이의 전체 인생을 견주어 보면서, 아이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이처럼 세상과 인간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3) 섭리 그리고 악의 문제
하느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사에 개입하시고 돌보신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는가” 이것은 아주 심각하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309항).
① 이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세상을 돌보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은 “하느님 홀로 모든 일을 다 맡아서 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책임을 맡기시어 자유로이 당신의 섭리에 참여할 권한도 주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307항).
②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협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의 뜻에 거슬러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로써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초래된 것입니다.
③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벌을 내리신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랬다가는 인간에게 자유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신비롭고 오묘한 개입”을 하십니다.
창세 37-50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스런 섭리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많은 잘못을 합니다. 야곱은 요셉만 편애하여 문제의 발단을 만들고, 요셉은 교만을 떨고, 형들은 질투해서 살인을 계획하고,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고, 보디발은 아내 말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여 요셉을 감옥에 가두고…. 이런 잘못들마다 사사건건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더라면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께서 문제를 방관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배후에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요셉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모두가 구원되는 좋은 결과로 이끄셨습니다.
모든 일을 다 겪은 후에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창세 45,8; 50,20)
우리는 요셉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숱한 역경 속에서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역경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한 역경 속에서도 그 배후에서 움직이시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돌보시며, 최종적으로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실 수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5-7면,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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