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 천주교회 법규 <2006-10-13>
지난 시간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십계명의 정신을 해석하여 교회에서 정한 규정’에 대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인간 사회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나이 산에서 주신 것입니다. 법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법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애초에 주어질 때에도 올바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고, 그 법이 의도하는 바도 올바른 것을 지향해야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고 법이 정해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 의도가 명확해야만 올바른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말씀드린다고 한, 교회의 규정에 관한 내용을 시작하기 전에, 사족(蛇足)에 해당할 법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지난 시간까지 다룬 십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다고.......라고 저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고, 교회공동체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을 내세우고 싶은 사람들은 질문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계명을 주신 것을 봤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모세가 하느님과 만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꾸며낸 것이 십계명 아닐까?....라고 두 번째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질문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만일 그 질문이 옳은 내용이라면.......반대의 질문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계명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가 얻을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모세는 인간이었습니다. 성경에는 120년 정도 살고, 가나안 땅을 요르단강 너머에 있는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죽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소리는 계명을 모세가 창작했다고 하더라도 모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세가 계명을 창작한 것은 아니다....즉,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한 일꾼이었을 뿐이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도 같은 입장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십계명을 올바로 지키고 실천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거나,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환경의 다양성을 들어서 질문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해도 좋은 질문이 있고, 내가 입으로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대답도 있거나 얻을 수 없는 대답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똑똑한 척 하지만, 정말로 똑똑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음을 거짓으로 꾸미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추가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 시간 이후부터는, 십계명의 정신을 담아서 교회가 정한 규정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으로 받은 계명은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의 정신은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제한하고 억압하기 위해서 계명이나 법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계명이나 법의 정신은 이러하다고 말씀드리지만, 항상 그렇게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거나 살아가는 태도가 법의 근본정신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도 아닙니다. 사람의 판단은 입장과 환경에 따라 다르더라도, 참으로 올바른 길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오늘부터 다룰 천주교회의 법규 역시도 의도는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애석하게도 그 법이 갖는 삶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의무만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애초에 법을 주신 하느님도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법의 정신을 통해서 권리를 찾지 못하고 의무만을 찾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고달파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래의 정신을 기억하면서, 교회에서 정한 법규의 설명으로 가겠습니다.
140.(문) 천주교회 법규는 몇 가지 있느뇨?
(답) 여러 가지 있으니, 그 중에 특별히 ‘십이단(十二端)’에 있는 성교사규(聖敎四規)와 그외 두 가지는 더욱 중요하니라. |
세상에 중요한 것이 어찌 몇 가지만 있겠습니까마는, 교회에서 정하여 신자들이 지키기를 가르치는 것들은 네 가지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교사규라 합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한 사항을 기준으로 우리의 생활을 돌이키면 적어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일은 하고 산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 네 가지는 주일을 지키는 것, 단식과 금육에 대한 것, 고해 성사하는 것, 영성체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항입니다. 주일, 즉 쉬는 날에 대한 규정입니다. 쉬는 날에는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제 1 절 : 제 1 규 :
141. (문) 제1규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모든 주일과 파공첨례를 거룩하게 지냄이니라.
142. (문) 어떻게 주일과 파공첨례를 거룩하게 지내느뇨?
(답) 미사에 참여하고 금한 일을 하지 아니함으로 하느니라.
143. (문) 미사에 참여할 본분을 달리 기울 수 있느뇨?
(답)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신공(神工)으로 기울 수 있느니라. |
계명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명을 늘 부담스럽고 피하고 도망쳐야할 것으로만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의 생활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각과 삶의 자세를 달리 가져야 합니다. 일 년에 쉰두 번 있는 주일과 교회에서 별도로 미사 참례하도록 정한 날에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하느님께 돌아서고 우리의 삶에 하느님의 뜻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에서 정한 네 가지 항목 중에서 첫 번째 것입니다.
미사는 제사입니다. 아직도 잘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은 ‘천주교는 제사를 금지한다’고 알지만, 그것은 미사가 제사임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옳은 소리도 아닙니다. 한때는 서양세계 중심이었던 그리스도교회 공동체가 동양의 풍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동양식의 제사를 금지하고 거부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우리나라 교회 초창기 역사인 조선시대에는 박해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2년 교황청의 훈령에 의하여 그 내용은 사라졌습니다. 동양의 제사가 ‘조상공경의 한 가지 예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유교식의 전통 제사를 지내는 일을 제대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지방(紙榜: 종이로 만든 神主)에 ‘신위(神位)’라고 쓰는 글자 금지, 제사 예절 가운데 합문(闔門:제사 때 유식(侑食:제사 시간중에 혼령이 음식을 먹으라고 제관들이 기다리는 시간)하는 차례에서 문을 닫거나 병풍으로 가리는 일)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양에서 지내던 제사에 ‘영적인 존재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었고, 우리가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태도와 자세를 바꾸라고 한 결정’이었습니다. 제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만큼만 하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피를 바쳐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바라며 본보기를 보였던 십자가상 제사인 미사에 우리가 건너뛰는 일 없이 참석하라는 것이 첫 번째 교회의 법규입니다. 이 사항을 의무로 바라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정신을 우리가 간직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으면 좋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노는 날에 몸이 놀 생각만 하지 말고, 신앙인으로서 영혼의 사정도 생각해서 할 일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공(罷工)이라는 말은 전에도 설명을 드린 것처럼, 하느님을 기억하며 ‘쉬라[休]’는 것이지, 무조건 ‘놀라[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자면, 주일(=일요일)은 노는 날이 아닙니다. 말을 잘못 생각할 때, 사람의 삶은 달라집니다.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이 쉬게 되어서 생기는 문제가 요즘의 실업(失業)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실업(失業)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쉬는 날, 쉬어야 하는 날에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는 것이 ‘성교사규의 첫 번째’에 속한 사항입니다. 쉬라고 하는 목적은 하느님도 세상창조에 엿새를 일하시고 하루를 쉬신 것을 본받아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되새김하는데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요즘에는 주 5일 근무제, 혹은 주 40시간 근무제로 가고 있으니, 판단은 또 달라지고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144. (문) 주일과 파공첨례 날에 미사 참례할 본분 외에 또 당연히 할 일은 무엇이뇨?
(답) 공식예절과 강론과 교리 강좌에 참례함이니라.
145. (문) 주일과 파공첨례에 금한 일은 무엇이뇨?
(답) 육신 이익을 위한 육신에 힘 드는 일이니라.
146. (문) 주일과 파공첨례에 할 만한 육신 일은 무엇이뇨?
(답) 천주 공경과 자선사업에 관한 일과 공무나 가사에 피치 못할 일과 큰 손해 없이 미루지 못할 일과 또한 상당한 연고 있어 관면으로 하는 일이니라.
147. (문) 상당한 연고 없이 신부를 속여 파공관면을 청하면 죄 있느뇨?
(답) 죄 있느니라. |
관면(寬免: 죄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관면이라는 하느님의 힘을 행사하는 사제나 그 허락을 내리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능력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정과 상황에 따라 첫째 규정에 나오는 파공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자는 의미에서 교회가 정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과 그 관면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주일에 대한 규정과 하느님을 생각하는 일에 대한 태도가 무덤덤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전의 한국교회에는 이 관면이 자동적으로 부여됐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자가 많지 않았을 때에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자동관면은 1989년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성체대회(聖體大會)’를 반환점으로 해서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앙인이 되고 나서도 파공이라든가 관면에 대하여 시큰둥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했습니다만, 예전의 신앙인들에게 그렇게 정했던 규정의 의미를 알아듣고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주일과 파공의 규정을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나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해졌기 때문에 예전에 정해진 규정만으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한 공식적인 규정은 한 가지로 정해서 제시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도 개인적으로 적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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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정한 ‘성교사규의 두 번째 규정’은 ‘단식과 금육에 대한 것’입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일이고, 금육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 2 절 : 제 2 규
148. (문) 제2규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정한 날에 대재(大齋)와 소재(小齋)를 지킴이니라.
149. (문) 대재는 어떻게 지키느뇨?
(답) 대재는 그날 점심만 먹는 것이니 그 밖에 특별히 저녁에 조금만 요기함은 가하니라.
150. (문) 소재는 어떻게 지키느뇨?
(답) 소재는 그날 육찬과 육수를 먹지 못하는 것이니, 달걀과 생선과 우유와 짐승의 기름으로 만든 음식은 먹어도 되느니라. |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경우는 그 적용이 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참살이(=영어로는 well-being)라는 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는 체중을 줄이는 행동도 단식의 하나로 보일 수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정신과 비교한다면, 그렇게 하는 일로서 내가 단식이나 금육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본래 규정을 무시하는 행동들입니다. 단식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자는 의미에서 일 년에 이틀을 정합니다. 날짜가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니고, 사순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신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하느님의 업적을 전하던 수난절 시작 때인,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의 공생활(公生活)의 마지막 시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수난 성금요일’에 단식을 권고합니다.
이 두 날에는 먹는 것을 멈추고 우리 삶의 정신을 인류구원에 바치셨던 예수님께로 돌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식에 참여한 내 삶의 몫을 봉헌하여 다른 이에게 나누자는 것이 단식을 말하는 본래의 정신입니다. 단순히 먹지 않고, 내 재산을 늘리자는데 그 정신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육은 고기나 고기와 관련된 것으로 만든 것을 먹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적용되는 금육의 규정은 매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대략 53번의 규정된 날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기는 네발 가진 짐승을 말합니다. 서양에서 하는 식사의 주식(主食)은 고기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 정착되어 전래되었기에 금해야 하는 것이 고기[肉]가 되었지, 아마 동양에서 성립된 가톨릭 신앙이라면, ‘쌀[米]’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찌되었든, 교회가 이런 것을 정하고 강조하는 이유는 ‘신자로서 행하는 마음과 행동의 자발적인 면’에 있는 것이지, 억지 춘향식으로 ‘하지 않으면 죄’로 구별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입니다.
다음은 단식과 금육은 몇 살부터 지켜야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151. (문) 대재는 몇 살부터 몇 살까지 지킬 본분이 있느뇨?
(답) 대재는 만 18살부터 만 60세까지 지킬 본분이 있느니라.
152. (문) 소재는 몇 살부터 지킬 본분이 있느뇨?
(답) 소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킬 본분이 있느니라. |
지켜야 할 연령층에 대한 것은 복잡한 내용은 아닙니다. 먹을 것을 한 끼 건너뛰고 그 몫을 나누라는 대재(=단식)는 18살-60살까지이고, 고기에 관련된 것을 먹지 말고 예수님의 수난에 함께 참여하라는 소재(=금육)은 14살 이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나이보다 적거나 많은 사람이 실천하는 일은 정신을 살린다면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형식만을 갖고 따질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지키지 못할 때 흔히 통용되는 것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관면’이라는 내용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게 되면 그 삶의 정신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 세 번째 규정입니다.
제 3 절 : 제 3 규
153. (문) 제3규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명오(明悟)열린 모든 신자 매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해를 함이니라. |
성교사규의 세 번째에 나오는 ‘고해성사에 대한 규정’은 최소한의 규정입니다. 이 규정은 각 국가에서 정한 다른 규정에 의해서 대치할 수 있는 규정입니다. 세계 교회법(=반포한 교황님의 이름을 따라, 요한바오로 2세 법전/1982년)에서 정한 규정은 ‘최소한 1년에 한번 고해성사’이지만, 한국 교회법에는 ‘1년에 두 번’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판공성사’라는 말로 부르기도 합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때와 성탄을 준비하는 때, 우리 삶을 뒤돌아보고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법 규정의 의미입니다. 이 판공성사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 냉담(冷淡)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신앙은 받아들였지만, 합당하게 살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정한 규정조차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단순히 의무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가 우리의 힘겨운 삶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꾸어주고 우리 삶을 가볍게 해주는지 모르거나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훗날 ‘고해성사’를 말씀드리는 때가 있다면 다시 강조하겠습니다만, 사제(司祭)라는 사람이 죄의 사함을 선언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민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신앙인 개개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자고 하는 제도는 아닙니다.
다음 네 번째의 규정입니다.
제 4 절 :제 4 규
154. (문) 제4규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답) 명오 열린 모든 신자 매년 부활 전후에 적어도 한번은 성체를 모심이니라.
155. (문) 제3, 4규에 ‘적어도 한번은 하라’함은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이 두 가지 성사를 매년에 한번만 받으라 함이 아니니, 성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자주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성사는 매일이라도 받기를 원하느니라. |
성교사규의 네 번째 규정은 앞선 세 번째의 규정과 관련 있는 내용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고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갖추고,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교회의 주문(注文)이요, 권고입니다. 세상의 모든 삶은 의무로 볼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성체는 어떤 의미인지 말로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미사를 통해서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일입니다. 밀과 물을 섞어서 빵의 형태로 만들고, 미사를 통하여 사제가 하느님께 그 빵을 봉헌하고, 사람이 만든 재료가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는 ‘실체변화(實體變化)를 통하여, 다시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는 과정이 성체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성체인지, 아니면 그 과정을 준비한 제병인지 알아낼 재간은 없습니다. 오로지 신앙인의 눈으로, 그리고 믿음으로만 바라볼 일입니다.
다음에 계속되는 교무금과 혼인에 관한 규정은 십계명에 근거를 둔 규정은 아닙니다. 사람은 살면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지는 못합니다. 한 국가에 소속돼 있으면, 내가 선택한 지도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세금을 내야하고, 다양하게 주어지는 다른 의무들을 이행해야 합니다. 만일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대한 권리도 일부는 제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무금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합당하지는 않은 모습입니다.
제 5 절 : 성교사규 외의 두 가지 법규
156. (문) 십이단에 있는 ‘성교사규(聖敎四規)’외에 지킬 두 가지 법규는 무엇이뇨?
(답) 교무금에 관한 것과 혼배 법에 관한 것이니라.
157. (문) 교무금에 관한 법규는 무엇이뇨?
(답) 신자들이 천주 명을 따라 교회 사업과 성직자의 생활을 힘대로 보조함이니라.
158. (문) 성교회에서 어찌하여 교무금 바치기를 명하느뇨?
(답) 이는 구령사업을 힘써 돌보는 성직자들이, 천주공경과 자기 생활에 필요한 보조를 신자들에게서 받는 것이 당연한 연고로 명하느니라.
159. (문) 혼배 법에 관한 법규는 무엇이뇨?
(답) 신자들이 혼배하려 할 때, 조당(阻擋)이 있으면 그 조당을 풀기 전에는 정혼(定婚)하지 말고, 또한 성혼(成婚)의 규칙을 지킴이니라. |
두 가지 내용은 교무금에 대한 것과 혼인에 관한 것입니다. 교무금은 교회공동체에 바치는 예물입니다. 예물이라고 붙이는 의미는 강제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참여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매달 어느 정도의 금액을 내기로 정하고 참여하는 교무금과 주일과 특별한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헌금을 받아 신앙의 새로운 가족 준비를 위하여, 현재 이루어져 있는 교회공동체의 살림유지와 운영을 위해 사용합니다.
혼인에 관한 내용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룰 때,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고 그 축복을 삶에 드러내자는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이 혼인에 관한 규정을 지키지 않을 때, 조당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조당 상태가 되면, 신앙인의 권리인 ‘고해성사와 영성체 하는 일, 그리고 기타 다른 성사(聖事)들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합니다.
혼인에 관한 규정에는.....혼인 상대자 둘 중에 어느 한쪽편이 신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할 규정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혼인을 앞 둔 사람들이거나 해야 할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이기에, 여기서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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