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1) 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고통은 여러분들의 믿음을 성장시킵니다”
■ 김 추기경의 30년 불면증
고(故) 김 추기경이 30년간 불면증으로 고생했다는 얘기는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불면증은 낭만이 아니다. 단 하룻밤, 몇 시간 뒤척이는 것도 나는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려고 몸부림친다.
그런데 김 추기경은 장장 30년간 그렇게 시달렸다. 김 추기경은 실제 이런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시간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수면제도 듣지 않는다. 기(氣) 치료의 과민 현상인가? 오늘 하루 여러 가지 일들이 걱정이다. 하지만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졸저,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참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김 추기경은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무슨 고민, 어떤 원인들 때문이었을까.
잠을 잘 이룰 수 없던 김 추기경이 하루는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증세를 호소하던 중, 그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폭우라도 쏟아지면 판잣집 사람들 걱정, 한겨울 추위가 오면 달동네 사람들 걱정, 쌀값 떨어진다는 뉴스를 보면 농민들 걱정이지요. 요즘은 정치가 혼란스러워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감옥에 투옥된 민주인사들도 걱정이구요.”
의사는 ‘그렇게 걱정이 많으면 절대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조언과 함께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날부터 추기경은 약에 의지해 잠들곤 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이 나라 민주화의 갈망과 군사독재정권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제 김 추기경 불면증의 비밀이 드러났다. 대범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 시간 사건 현장에서, 문제의 현주소에서 끙끙대며 잠을 못 이루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김 추기경으로 하여금 날밤을 새우게 한 것이었다. 약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기를 즐겼던 그인지라, 함께 잠을 뒤척인 것이었다.
■ 신이 인간을 정말로 사랑했는가?
1987년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 전회장은 당시 서울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던 정의채 신부에게 24가지 질문을 보내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인생 제반 문제에 대해 종교계의 현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대담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 질문지는 그대로 보관되어 25년의 세월이 흘러 내 수중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물음!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감당하기 힘들 때, 우리 역시 저런 물음을 묻는다.
때로 고통은 어떤 위로도 거부한다. 위암 수술 후 병원에서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신음조차 나지 않는 밤을 꼬박 새웠다는 어느 환자의 하소연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거린다. 그 고통의 낱낱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으며, 열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도처에서 들려오는 재앙과 참사의 절규는 또 얼마나 참혹한가. 일부러 귀를 막지 않는 한 여기저기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절로 묻습니다. 왜, 왜, 왜?
■ 고통의 영성적 의미
사람들은 고통의 책임을 하느님에게 돌리는 데 익숙하다. 여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즉, “신은 왜 태초에 고통이라는 것을 허락했는가?”를 따져 묻거나 “왜 전능한 신이 내게 고통을 막아주지 않는가?”하고 원망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탄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고통의 진면목을 헤아려보자.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통에는 기능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호의 기능이다.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준다. 고통이 없다면, 겨울에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며,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태워버리는 일들이 수 없이 일어날 것이다. 또 고통은 우리 몸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알려주는 신호다. 이 신호 체계가 고장 난 병이 바로 ‘한센병’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손이 썩어 들어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이 손상을 입는다고 한다. 이는 고통이 없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고통은 영성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허락하시는 고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견책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성경은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매를 드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은 ‘잘되라’는 교육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견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서자’이지 ‘적자’가 될 수 없다(히브 12,7 참조). 유념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대안을 마련해 놓았을 때만 매를 든다는 사실이다.
둘째, 시험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시험을 주시는 의도는 성숙의 은총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권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1베드 4,12). 이런 고통은 믿음을 성장시킨다.
셋째,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겪는 고통이 있다. 이는 내가 고통을 겪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한다는 의미에서 대속적(代贖的) 고통이라 불린다. 대속적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우리 역시 이 고통에 동참할 수 있다. 성인들은 이런 고통을 자청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그 경지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위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그 모든 환난에도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코린 7,4).
‘견책’으로 받는 고통은 하느님께서 잘못된 길에 들어선 당신 자녀를 제 길에 들어서도록 주시는 고통이며, ‘시험’으로 받는 고통은 믿음의 성숙을 위해 허락하시는 고통이며, ‘대속적인 의미’의 고통은 남을 위해 우리 자신이 공로를 쌓도록 초대하시는 고통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통을 당하든 그 고통을 소화하고 승화시켜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고통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봉헌할 줄 알아야 한다. 즉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까지도 잘 갈무리해서 누군가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희생의 의미로 바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을 좋은 뜻으로 포장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더 커진다. 최선의 선택은 고통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너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너에게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그 답과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17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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