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7)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
‘착한 소비’ 지향하며 사랑 실천
인류가 역사 속에서 찾아내 발전시킨 협동조합이라는 보물은 어둠 속에서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협동조합 자체가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의 많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지상에서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함”(에페 4, 13)을 들려줍니다. 170년 전, 산업혁명의 본고장 영국 로치데일에서 살았던 가난한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본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보여준 삶은 그들 가운데 주님이 함께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합니다.
가난에 배고픔을 달고 살아야 했던 28명의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최초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인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진리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세기를 뛰어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건한 생명력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윤리적(착한) 소비’를 지향했다는 점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정치적 신념 등이 모두 달랐던 초창기 조합원들은 배움이 깊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랑과 배려를 통해 한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치데일 조합 조합원들은 당장 자신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웃을 배려하며 자연환경까지 생각하는 활동을 펼쳐 나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가족과 형제, 한 식구나 다름없는 이웃이 함께 소비하는 것이니만큼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정성이 담긴 사업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로치데일 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투자한 자본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자를 지불하고, 이익금은 조합에 출자한 비율이 아니라 조합이 운영하는 매장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등 조합을 이용한 비율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소비자조합의 기본 구조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은 처음 세운 식품점이 큰 성과를 거두자 협동 공장과 방직 공장까지 설립해 공유와 나눔의 영역을 넓혀나갑니다. 조합원이 1만 명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자 도매 부문도 개척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함께 거둔 수익을 교육과 자선 사업 등에 기부하며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활동을 확산시켜 나갑니다. 이들의 삶에 담긴 나눔과 사랑은 핵분열을 하듯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치데일 조합은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를 모범으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소비조합 설립이 확산되어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답게 온갖 이념과 사상이 난무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름다운 초심을 지켜온 로치데일 조합 노동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줍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이 보여준 상호 존중과 그 바탕에 견고히 자리잡고 있는 사랑 실천은 상상도 못했던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많은 이들이 주님의 섭리를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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