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 ‘처음이 희망이다’
새로움이 필요할 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
■ 처음의 추억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이후 즉위식이 있기까지의 행보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행보와 발언이 한마디로 ‘신선’ 그 자체였다. 그는 특히 “교회는 기득권이나 힘의 논리를 버리고 예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그가 택한 ‘프란치스코’라는 공식 호칭에서도 예견된 바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첫마음을 관철한다면, 우리 교회에 틀림없이 새바람이 불어올 것이라 기대해마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언론에 보도된 새 교황의 사진을 볼 때면, 고 정채봉 시인의 ‘첫마음’이란 시가 떠오른다. 차제에 교황을 위한 우리의 기도로 ‘첫마음’을 노래해 보자.
첫마음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날의 첫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 처음의 영성
새로움이 필요할 땐, 원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다. 중세의 암흑기에서 당대의 지성인들은 그 출구로써 ‘처음’을 찾았다.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성경, 다른 하나는 그리스 문화유산 클래식으로의 복귀였다.
이스라엘 백성 또한 똑같은 탈출의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역시 역사의 고비 때마다 ‘맨 처음’으로 더듬어 올라갔다. 거기서 희망의 근거를 찾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그 절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이스라엘은 절대로 망할 수가 없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그 누가 침공을 해도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이 ‘예루살렘 불패신앙’을 철석같이 갖고 있었는데 잿더미가 되어 망해버렸다. 이 참담함 속에서 이들이 희망으로 찾은 것이 창조신앙이었다. 물려받은 문화 중에서 창세기를 뒤져 ‘처음’이 어땠는지 확인한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때 찾은 사상을 담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bara)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bara)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나는 주님, […] 이 이스라엘의 창조(bara)자, 너희의 임금이다”(이사 43,15).
당신의 이름으로 희망을 주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 속에서 다른 얘기는 하나도 안 들어 왔다. 그런데 ‘창조의 하느님’ 그랬더니 그제야 희망하게 된다. 왜? ‘바라’(bara)의 하느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 역사 자체이며 시작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왜곡된 질곡의 역사를 시정하고 회복시키는 일쯤은 그분에게 식은 죽 먹기다. 이윽고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 희망을 붙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 절대적 창조
방금의 이야기를 실감있게 알아듣기 위하여, 위에서 언급된 ‘바라’(bara)에 대해서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자. 이는 ‘창조하다’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다. 성경에 47번이나 나오는 동사 ‘바라’의 주어는 언제나 하느님이다. 이 단어가 쓰일 때는 주어가 사람이나 사물로 나온 적이 없고 무엇으로 만들었다는 표현도 없다. 이 단어에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아무런 재료도 없이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곧 새롭고도 예외적이며 놀라운 창조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창세 1,1), ‘짐승’(창세 1,24), ‘사람’(창세 1,26-27)을 만들 때 이 동사가 쓰인다. 특히 인간 창조 때에는 세 번이나 반복된다(창세 1,27 참조).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창조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내시는 이 ‘바라’(bara)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 하늘과 땅을 만드신 것도 이 ‘바라’의 절대적 창조였고, 단순한 생물들보다 한 단계 높은 동물을 만드신 것도 이 ‘바라’였다. 이윽고 최후의 걸작 인간을 만드실 때는 ‘바라’가 세 번이나 등장할 만큼 대작업이었다.
이 바라의 영성을 우리가 깨달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자체가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인가? 없는 데에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구원의 언어인 까닭이다. 그랬기에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우리는 어디다가 희망을 둘꼬” 그랬을 때, 딱 하느님의 예언자가 나타나서 저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야곱 이스라엘을 만들어 낸 분이신데 새 역사를 창조해 내지 못하겠느냐는 식의 강변이다. 이를 쉽게 풀어 말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절망을 접고 희망을 가져라.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무엇인들 못하시겠느냐. 이 고장난 역사를 새롭게 세우고, 이 단절된 축복을 다시 이을 수 있는 분이 야훼 하느님 아니시더냐!”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의 화두는 절망과 분노다. “미래가 안 보인다. 비전이 안 보인다”고 답답해한다. 교회는 교회대로 위기라고 말한다. 신앙인들은 벌써 위기와 몰락을 얘기한다. 우리 역시 출구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살길은 ‘처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늘 새롭게 ‘처음’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창조경륜에 전폭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아닐까.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7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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