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9) 경제민주주의의 대안
협동과 단합이 보여준 ‘큰 힘’
인류는 세계대공황 등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회보장제도 같은 인간적인 요소들을 거둬들여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면서 슬기롭게 진화해왔습니다.
만능으로 여겨지던 시장경제와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자본주의 체제가 승자독식의 폐해와 소외 등 비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 세상에 등장한 협동조합은 ‘집단지혜’(Collective Intelligence)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던 가난한 이들이 마음을 모아 싹을 틔운 협동조합은, 그것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지켜내고 발전시켜온 이들이 없었더라면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명멸해간 다른 제도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선진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려가며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협동조합은 근래 들어 더욱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지난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도 협동조합을 ‘경제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롬 교수는 개개인의 지나친 욕심으로 공동체의 자원이 고갈되는 소위 ‘공유의 비극’ 상황에서 시장도 정부도 아닌 지역 주민들의 자치적 노력에 의한 공유자원 관리가 유효하다는 대안을 제시해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목초지 관리에 있어 목초지의 사유화나 정부의 규제보다 주민들의 자율적, 자치적 해결책이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규제나 강제적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실제 그 문제에 관계된 사람들, 즉 시민과 지역 사회의 결정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고 본 오스트롬 교수가 협동조합의 정신과 목표에 대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영국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을 이끈 선구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도 바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공동체였다는 점에서 조합원들이 함께 공유했던 비전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갈수록 자본의 힘이 위력을 더해가고 노동자들은 생산시스템의 일개 부속물로 전락해가는 사회 안에서 로치데일 조합원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했다면 아마 로치데일 조합도, 협동조합운동도 오늘의 모습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치데일의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동과 단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자신들의 그런 신념과 미래를 담아낼 그릇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개인의 욕심을 부추겨 인간을 개별화하고 단절시켜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경제와 사회 체제는 분명 하느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세상을 이긴 로치데일 조합의 성공은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돼, 1937년 국제협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ICA)은 로치데일 조합원들이 세운 협동 원칙을 기초로 협동조합원칙을 공식적으로 채택합니다.
지금도 되새겨보면 노동자들의 지혜와 실천에 놀라움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안겨주는 온갖 고통에 찌든 노동자들이, 그것도 배움의 기회를 많이 가져본 적이 없는 소외된 이들이 어떻게 오늘날에도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 하느님의 섭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2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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