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보조성의 원리 - 도움의 원리 어떤 사람이든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렇게 서로가 얽혀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삶이기에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을 남의 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 서로 돕는 데에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무질서하게 도와준다면 도움을 받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특히 상위단체나 국가가 개인이나 하위단체를 도와줄 때 자칫 잘못하면 개인이나 하위단체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도움은 개인이나 하위단체가 자신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국가나 상위단체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보조성의 원리이다. 1. 보조성이란? 보조성(補助性, subsidiarity)이라는 말은 라틴어 subsidium(보조)에서 유래하였다. subsidium이란 말은 로마시대의 군사용어로 예비 부대를 일컬었다. 즉 전방에서 싸우는 부대와는 달리 일단 유사시에 전방부대를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예비부대(보조부대, subsidiarii cohortes)를 일컫는 말이었다. 보조성이란 말을 사회에 적용시키면 보다 큰 사회구성체가 개인이나 보다 작은 생활 단체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취하는 보충적·응급책적인 조치를 일컫는 말이 된다. 공동선을 위하여 사회가 개개인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연대성 원리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조 활동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나 상위단체가 유의해야 할 권한의 분할과 한계가 보조성 원리에 속한다. 따라서 보조성의 원리는 공동선과 연대성의 원리를 먼저 인정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대성의 원리는 개인들간의 관계, 개인-집단들간의 관계 그리고 개인-집단들과 전체사회(국가)간의 관계에서 연대성의 실현을 통해 공동선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에 보조성의 원리는 개인들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집단들이, 하위집단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상위집단들이 그리고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전체사회, 즉 국가가 떠맡거나 빼앗지 않고, 당사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공동선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보조성은 도움을 받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율성을 보호하고, 도움을 주는 상위집단의 전횡을 막기 위한 원리인 것이다. 2. 보조성 원리의 근거 왜 상위집단이 하위집단을 도울 때 하위집단의 자율성을 보호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보다 포괄적인(대형의) 사회 조직체에 의해서는 잘 실현될 수 없는 과제와 권리를 소유하는, 보다 작은 생활공동체(예컨대 가정)의 구조와 그 특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보조성의 원리가 사회에서 인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개인과 하위집단이 상위집단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이유로 생활에 부당한 간섭을 받는 것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보다 큰 사회 조직체의 보조 행위적 조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요구될 수 있다. 첫째, 우선 개개인이나 소규모의 생활공동체가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영역에서 자기의 탓이든 아니든 간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 보다 포괄적인 규모의 사회 구성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제 때문이다. 세상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 큰 사회조직체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사회 상황의 변화로, 이전에는 소규모 집단이 수행하던 일을 지금은 대규모 조직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사회철학의 근본원리이다. 따라서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하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회활동은 본질적으로 사회 구성체의 성원을 돕는 것이므로 그 성원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해서는 안된다.”(사십주년, 35) 3. 보조성 원리와 국가 보조성 원리의 실현은 먼저 국가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사실 국가의 목적은 공동선의 실현이며, 이를 위해 국가는 고유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국민들의 모든 활동이 공동선을 향해 일치하도록 통제하고 돕고 조정하는 것이 국가의 특권이며 사명이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들의 경제적·정치적 생활뿐 아니라 정신적·종교적 생활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의 개입이 개인의 활동과 발전 그리고 생활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되며, 물질적·정신적·종교적·도덕적 질서에서 개인의 의무와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방법으로 수행되어서는 안된다. 보조성에 따른 공권력의 개입은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돕기 위한 것이며, 국가가 개인들에게나 집단들에 ‘보조’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조성의 원리는 상위집단이 하위집단의 기능을 제거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과 도움을 통해 하위집단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보조성은 개인이나 하위집단의 기능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공동선의 진작을 위해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하위 집단들이 정상적으로 자신들에게 귀속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도움과 구조 그리고 보조의 역할을 통해서 이 기능을 수행한다. 달리 말해서,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한 국가의 개입은 개인들이나 집단들의 권리를 제거함 없이 조정하고 촉진할 뿐만 아니라, 그들 상호간에도 어떤 특권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조성의 원리는 공권력 개입의 규범이며 국가의 기능과 직무 수행의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국가는 ‘시민들의 한 부분’인 부유하고 유복한 이들을 돌보는 동시에 다른 ‘부분’, 의심 없이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들을 ‘등한시’ 할 수 없다.” “개인의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서, 국가는 특별히 약자들과 빈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자기방어 능력이 있으므로, 공적인 보호를 받을 필요가 덜하다. 이와는 반대로 빈곤한 대중은 든든한 재산이 없으므로, 국가의 재산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들은 빈곤한 대중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을 특별한 배려와 관심으로 돌봐야 한다.”(백주년, 10) 또한 국가는 사회의 어떤 집단들이나 산업계층들이 약하거나 초보 단계여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대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공동선의 긴박한 사정으로 정당화되는 이러한 기능은 하위단체들의 고유한 임무를 계속해서 제거하지 않고, 국가의 개입 범위를 과도하게 확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자유가 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정해진 시간의 한계를 두어야 한다. 4. 글을 마치며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오늘날 우리 나라의 모습을 살펴볼 때 참으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서 경제·교육·노동·문화 분야에서 국가가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망친 대표적인 일은 교육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장관들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교육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기초학력이 모자라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 사회의 성숙도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비민주적인 사고방식·업적주의·관료중심주의·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공직사회의 풍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국가의 활동을 개인과 하위 단체를 위한 보조적 역할에 한정하여야 하며,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넘어설 때 국민들은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 사회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나 상위단체의 도움에 그저 감사하며 모든 것을 그들의 뜻에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주도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개인이나 하위 단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는 상위단체나 국가의 도움을 정정당당히 요구하자. [월간빛, 2002년 5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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